샬롬! 찬미에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운명론에 매이거나 무엇엔가 매몰되고 끌려가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누구나 자동사를 꿈꾸고 산다. 결코 타동사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자동사의 삶은 다른 사물이나 다른 사람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이 제자신만 움직이는 성질이 있다.
반면 타동사의 삶은 반드시 목적어와 어울려야만 동사가 되는 성질로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의 목적어란 이웃들과 어울려 나누고 소통하는 타동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사로 사는 것 같지만 목적어를 support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세가 타동사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또한 사람들은 능동태로 살려고 하지 결코 수동태로 살려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어가 다르다. 능동태는 주어가 나다. 그러나 수동태는 내가 주어가 아니다. 수동태의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고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어가 되는 삶이 바로 수동태의 삶인 것이다.
요셉 이야기에 보면, 주어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요셉이 말하는 것을 보면 나는, 나는, 나는, 그런 것 거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요셉이 하는 간증은 온통 하나님이 주어다.
하나님이 나에게 꿈을 주셨습니다(창37:5).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창39:21). 하나님이 나를 형통케 하셨습니다(창39:23).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꿈을 해몽하게 하셨습니다(창41:15-16). 하나님이 나로 번성케 하셨습니다(창41:52). 하나님이 나로 지난날의 고생과 아픔을 다 잊게 하셨습니다(창41:51). 하나님이 나를 이곳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창45:5-6).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가 되게 하셨습니다(45:8-9). 하나님이 나의 꿈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창50:20).
이와 같이 요셉의 인생은 수동태의 인생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온 삶이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신일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도록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성경에서 이와 가장 반대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신약성경에 기록되었다(눅12: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탐심을 물리치라'는 주제로 한 부자에 대한 예를 말씀하셨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16절)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17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18절) 또 "내가" "내 영혼"(19절)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내용이다. 이 부자의 심중에 "내가"라는 단어가 주어가 되고 있다. 이 짧은 문맥 속에 "내가"라는 단어가 무려 6회나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너무나도 이 세상적이고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의 life style을 본다. 그는 가장 능동태로 살았고 가장 자동사로 살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잘 나타난 삶의 표본은 아브라함의 인생이다. 그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산 삶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의 이끌림에 의해 가나안까지 갔던 것이다. 그가 지도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었다. 지도를 펴놓고 어디로 갈까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이사야서의 핵심은 "남은 자 사상"이라할 수 있다. 큰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와 같이 그루터기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명의 새순이 돋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남고 싶어서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겨주심으로 인해 우리가 남게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들이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말한다. 인생의 실패와 성공은 능동태의 삶이였냐, 수동태의 삶이였냐, 자동사의 삶이였냐, 타동사의 삶이였는가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예수님은 수동태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인생의 주어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예수님 안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셨다. 자신의 일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 하셨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만하셨다. 자신의 계획대로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셨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셨다. 예수님은 수동태의 삶의 모본이시고 타동사의 삶의 모본이셨다.
우리의 삶이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바뀌려면 내 인생의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의 옥좌에 예수님을 앉게 하고 인생의 키를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동사의 삶이 아닌 타동사로 사는 인생들이다.
글과 문장의 형태는 인간의 사상과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지만 삶은 현장 속에서 타동사와 수동태를 체화하고 녹여내는 행동과 인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온누리 교회를 담임하고 떠나신 하용조 목사님의 "인생은 수동태입니다."라는 고백의 글을 소개해본다.
제가 암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인생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절감한 때였습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허리케인처럼 삶의 잘 정돈된 방에 고난이라는 돌풍이 불어 닥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질병으로 인해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많은 계획들을 수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획하던 길로 계속 달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멈춰 세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기장 밖에서 지켜보시도록 내버려 둔 채 마음대로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차치하고 심지어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될 때에야 인생은 수동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혼자서도 잘해내리라는 오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기도란 인생이 수동태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먼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조차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가장 위대하게 드러날 때는 우리가 가장 연약해질 때입니다. 우리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신앙의 본질은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능동태의 삶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신뢰하는 수동태의 삶이다. 우리의 인생의 제일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우리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만을 영원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능동태가 아니라 그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수동태의 삶으로 가능하다. 신 목사 |
'믿음과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블리스 오블리제 (0) | 2017.01.23 |
---|---|
하나님 부르심의 최후 통보 (0) | 2017.01.16 |
또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0) | 2017.01.01 |
성탄메세지 (0) | 2016.12.25 |
보물찿기 하며 살아가기 (0) | 2016.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