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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의 이야기

성탄메세지

샤론의 수선화 2016. 12. 25. 16:02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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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찬미예수


임마누엘 하나님(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어김 없이 찾아 읽게 되는 이 유명한 말씀, 그리고 이에 대한 수많은 메시지들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성취의 말씀으로 확장된 신약 마태복음 1:21-23절의 말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들어오신 하나님에 관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이 소리 높여 외쳤지만

"임마누엘"이란 말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선지자는 이사야였다.


이사야가 임마누엘 사상을 외쳤던 당시 유다의 상황은 이랬다.


앗수르가 신흥제국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지금의 시리아 아람이 쇠퇴하는 와중에 위협을 느끼고

오랜 원수지간이었던 북 왕국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지중해변에 팔레스타인에 있는 조그만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거대한 앗수르에 대항하는 반 앗수르 동맹을 맺는다.

그들은 유다도 연합군대에 동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유다는 어느 쪽에도 예, 아니오를 할 수 없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아하스는 당연히 많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국가의 존망, 왕권의 위협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유다 왕 아하스를 만나게 했다(3절).

그래서 이사야는 아하스를 만나 말했다.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고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몹시 불안하여 떨고 있는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 두 나라가 연합해서 왔을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다.

저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고 이겨라.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전하며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권고한다.

처해 있는 현재 상황에 주눅 들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자고 종용했다.

그리고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데 도움 될 만한 징조 하나를 구하라고 권한다.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10-11절)고 한다.


징조를 구하지 않는 아하스 왕의 불신

하지만 아하스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감히 징조를 구하지 않겠고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뜻 아하스가 하나님께 굳은 믿음과 그분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졌기에 징조를 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굉장히 완곡한 표현이지만 그렇게 할 필요 없습니다. 라는 뜻이다.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그 분의 구원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징조조차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심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들려주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징조 자체부터가 이상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지성과 이성에 합리적이지도 않고 전혀 앞뒤가 맞지도 않는 징조가 주어진다.

숫처녀(Virgin)에게서 아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처녀란 그 어느 누구와도 성적관계를 맺지 아니한 정결한 여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임마누엘 징조는 더욱 독특하고 강한 징조다운 징조가 된다.


그 징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하다.

결코 헤쳐 나올 수 없는 위기상황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실 것이다.

찾아오시는데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만질 수 있도록, 인간의 몸을 입고서 찾아오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면초가에 빠져 있는 그 백성을 정녕 구원하실 것이다."


신약으로 확장된 임마누엘 하나님


바로 이 사건이 신약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되신 우리 주님이시다.

구약 시대의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선포된 메시아 사상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합하고 아우르는

우주적 구원을 이루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한 임재로 함께하신다.

마1:18-25을 보면, 아하스에게 전해진 임마누엘 징조가 이제 천사를 통해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전해진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이 말씀은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아이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 자신의 현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요셉은 천사가 전한 임마누엘 징조를 믿었다.

유다 왕 아하스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하스는 그것을 믿지 못하였기에 임마누엘 징조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요셉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임마누엘의 놀라운 사건이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이며 모든 것에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여기에서의 이 역사적 정황 속에서 처녀 잉태는 아기를 낳지 못할 자가 처녀가 애를 낳는 것이 초점이 아니다.

처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열 두 살쯤 될 때에 이스라엘과 아람이 다 망할 것이니 걱정마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즉 기간에 대한 이야기다.

처녀라는 말은 젊은 여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사야에서는 처녀 탄생이라는 기적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고 기간에 대한 이야기다.

즉 너희가 다 아는 시집 안 간 집안에 그 누구인 것과 같다.

이사야도 알고, 아하스도 아는 그 누구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나 그 애가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아서 12살이 되기 전에

15절에 나오는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철이 들 때) 엉긴 젖(버터, 또는 그냥 우유)과 꿀을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음식은 호사스러운 식단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농작을 할 수 없어서

농작물의 수확이 없는 식단을 나타내는 아주 어려운 시절을 가질 것에 대한 말씀이다.

그때 그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예언서 번역에는 그 애가 12살 쯤 되었을 때, 철들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런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너희가 가진 국부, 국력이 더 커져서 힘으로 두 나라를 엎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여전히 궁핍하고 어려워질 것이지만

길게 잡아도 20년 내에 내가 두 나라를 다 멸망시키겠다.

무슨 약속일까? 미래를 내가 잡고 있다. 이게 임마누엘 징조의 핵심 부분이다.

네가 이해하고 네가 준비하고 네가 결정하는 대로 끝나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이 정한 목적지로 갈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라는 징조의 약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고 선포인 것이다.


시간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

이러한 약속은 결국 우리에게 시간을, 미래를, 운명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지금 이사야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선포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징조는 그때 이해했던 시간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 미래와 궁극적 결론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은

신약 백성들에게 보다 더 크게 그 성취를 맛보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약속과 성취 사이


마태복음 1장 18-23절까지를 보자.

여기에 바로 임마누엘의 그 약속이 신약에서 더 깊게 성취된다.

그때에는(이사야의 역사적 정황에서) 20년 내에 네가 벌벌 떠는 저 두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너는 세상적인 조건과 방법으로서 네 미래를 개척하려하는, 전부 결정하려하는 그 안목과 그 이해에서 더 올라오라.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다스리고 있고 시간과 존재들에게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해라.

이게 이사야의 역사적 정황에서의 선포였고 실제로 일어난 역사였다면....


신약에 와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뜻이 훨씬 더 깊어지고 훨씬 더 놀라워진다.

그는 처녀 몸에서 난다. 처녀 몸에서 났다는 것은 날 수 없는 여자에게서 났다는 것에 핵심이 있지 않다.

그건 기적이고 당연히 놀라운 일이지만 그렇게만 얘기하려면 그럴 바에야 남자가 낳는 것이 낫다.

처녀냐 아니냐 논쟁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남자가 아기를 낳으면, 그것도 머리로 낳으면 더 기적이 아니겠는가.

요한복음 1장 1-4절까지를 읽어보자.

이 부분이야말로 진짜 기적이요, 신비요 영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서에서 그는 창조주시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다.

우리를 만든 이가 자기가 만든 것의 결과에 들어오신다.

시간적으로 보면 마리아에게 낳음으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됨으로서 자기가 만든 자의 결과물의 자리에 들어오시고

그걸 처녀가 남으로서 우리가 만들지 않는 그 결과를 하나님이 만드신다는 두 가지 이중적인 내용을 거기에다 실현하신다.

그러니 이런 성경의 증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시간과 모든 존재를 이끌어내시고 통제하시고

그분의 의도와 뜻과 섭리로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와 개인과 인생을 다스리시며

역사의 정황과 모든 조건에 개입하고 일하고 계시는 가를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라는 순서를 가지고 있고 공간적으로도 모두가 다른 지위 다른 조건 속에 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라는 것은 다 합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동원되고, 간섭하시며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작동되는 메카니즘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전복시키고 역전시키실 수 있는 분으로 궁극적 질서들을 확립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아래 그 순서로 일하시지만 결국은 앞뒤가 언제든지 묶이고 역전될 수 있는, 그렇다고 그것이 혼란도 아니고

뒤집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평면보다 더 큰 입체같이 거기에 시간이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뒤로도 흐를 수 있는 것 같이 성경은 증언한다.

그것이 말이 되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성육신하심으로서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계시록 1장에 가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 모든 종말이 선언되고 있다.

4-5절을 보자.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예수님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증명하신 것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묶어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을 이루고 마신다는 역사적 산 증거를 삼으셨다.

아하스와 같이 우리의 고민도 언제나 미래를 오늘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붙잡혀 있다.

우리들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해결 방법은 예수 안에서 선포된 것 같이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다는 것이다.


8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시간 속에서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계획에서 필요 없거나 잘라버릴 필요가 없는 그중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목적에

필요 없는 것이 없는, 그리고 그 조건에 매여 있지 않은 그 모든 경우를 다 끌어 앉고 그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다.

그게 동정녀 탄생이다.

처녀에게서 낳았다가 아니라 창조주가 창조물의 후손으로 오시고 낳을 수가 없는 자가 낳는 결과, 완성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하여 성경에서의 요청들, 성경에서의 요구들이 나온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신 이의 목적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와 운명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리에 갈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 안에서 과거에 이미 성취된 것 같이 우리는 그걸 지금 할 수 있다.

장차 완성될 것은 시간 순서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그 미래를 당겨다 쓸 수 있다.

아하스가 믿든 말든 그 겁을 내는 두 나라는 하나님이 멸하실 것이다.

믿으면 명예가 되고 자랑이 된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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