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쇼생크를 바탕으로 한 콘텍스트(Context)를 초월한
텍스트(Text)의 삶
'텍스트'(Text)는 항상 '콘텍스트'(Context)에서
기록된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반드시 그 텍스트가 쓰인 문화적, 역사적 콘텍스트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텍스트는 '해석되기 이전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설교의 본문을 텍스트(Text)라고 할 때, 그 본문을 말하게 된 배경을
콘텍스트(Context)라고 부른다.
물론 설교의 경우는 또 다른 콘텍스트가
필요하다.
그것은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의 콘텍스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콘텍스트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모든 환경과 조건과 지역이 전혀 다른 입장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청중은 제 각각 다른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고려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콘텍스트는 신자가 살아가는 '삶의
정황'이라면, 텍스트는 신자가 삶에서 담아내야할 '복음'을 의미한다.
결국 신자는 정황(콘텍스트)의 어려움을 탓하지 말고 '복음'(텍스트)을 자신의 삶에
담아내는 삶이 중요하다.
쇼생크 탈출 영화에서의 Andy와
Red를 생각해 보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온,
감시와 폭력이 난무하는 교도소라는 공간은 삶에서 주어질 수 있는 최악의 정황(context) 중 하나다.
하지만 Andy는 그 정황에
짓눌리거나 자살한 Brook처럼 길들어지지 않고 '지유와 희망'을 추구한다.
교도소에서 오페라를 방송하고,
주정부에 대한 끈질긴 청원을 통해 교도소에 도서관을 만들고, 죄수들이 졸업장을 취득하도록 돕는 것은
자신이 '교도소(context)에
갇힌 죄인'이 아닌, '희망(text)을 가진 자유인'이라는 선언이다.
Red 역시 과거에는
'가석방'이라는 정황(context)에 몰두하지만 Andy의 탈옥 이후에는 가석방(context) 여부에 상관없이
옳음(text) 자체의 관점에서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평가하여 context를 초월한 text의 모습을 보여준다.
'삶의 정황 속에 갇힌 세속인'이
아닌, '복음으로 삶의 정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쇼생크 탈출에서의 Andy는
단순히 삶의 정황(context)을 견뎌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Andy가 시도한 도서관 설립,
죄수들에 대한 교육 등은 폭력이 나무했던 교도소(context)에서의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불법을 통해
교도소장의 잇속을 챙겨주는 융통성(?)도 발휘한다.
결정적으로 Andy는 교도소장이
자신을 증언해줄 Tommy를 탈옥으로 꾸며 살해하자, 교도소를 탈출해버린다.
그리고 교도소장의 범죄 사실을
언론에 넘겨, 교도소장과 간수로 상징되는 쇼생크 교도소의 기존 context를 와해시켜버린다.
게다가 이 탈출은 단순히 비밀을
누설한 Tommy의 죽음에 따른 충동적인 돌발 행위만도 아니었다.
Andy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탈출에 필요한 통로를 파고 있었다.
그렇다고 Andy는 단순히 현실에
직면한 상황(context)을 감내하고 초월하는 모습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일상 속에서 text(자유,
희망)를 바탕으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context(교도소, 죄수 신분)를 감내하고
초월하였을 뿐 아니라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래서 자기 삶의 context를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려하는 Andy가 '희망'을 이야기하자,
일상 속에서 context를
감내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던 Red가 말한다.
"희망?......
한 가지 얘기해줄까?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어.
이 안에선 아무 쓸모도 없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Andy는 "희망은 좋은
거죠. 가장 소중한 것이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라며
쇼생크 교도소를 탈출하여 자신의
삶의 정황(context)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놓치지 말고
짚어내야 할 지점
성도들이 text와 context를 혼돈하거나, text(복음)에 기반 하여 자기 삶을
성찰하기보다는,
context에만 몰두하여 정부와
환경만을 탓하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예수님이 유대(context)를
독립시키는 정치적인 메시아이길 원했던 제자들이나,
조국 독립이라는 context의
변화에만 몰두하는(열심당) 것을 주님은 원하시지 않았다.
예쁜 컵(context)에
집착하여 조그만 흠이 있다는 이유로 컵을 바꿔대느라 컵의 존재이유인 포도주(text)를 쏟아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컵이 녹슬어 포도주를
변질시키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영화에서 Andy가
텍스트로 삼은 '자유, 희망'과 같은 인문학적 가치들은 콘텍스트를 넓히는 수단이 될 뿐,
본질적인 텍스트가 될 수 없으며,
본질적인 텍스트는 오직 '복음'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텍스트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일 뿐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자유와 희망'
조차도 텍스트인 복음으로 인해 콘텍스트
속에서 구현된 상황(context)의 일부일 뿐이다.
영화에서 이러한 가치들이 텍스트의
역할을 수행했다하여 이것 자체를 텍스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두 번에 걸친 글은 총신대
구약학 김정우 교수의 '시삭의 구원'이라는 인사이트에서 박영선 목사의 강의가
도출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얼마간 나의
표현들로 재구성한 글이다.)
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