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세상적인 의, 예수님의 의(마6:1-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세상적인 의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기도와 금식과 구제 이 세 가지 경우를 가지고 확인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을 구제라고 했을 때, 어려움을 돕는다는 것이 세상적인 의에 강조점이라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강조점은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다. 세상적인 구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면 신앙적인 하나님의 의는 어려움 속에 있는 한 인간의 존귀함을 인정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세상은 이를 돕는다는 표현으로 대표되고 성경적으로는 이를 '섬긴다.' 혹은 '나눈다.'는 개념으로 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시점에서 "더불어 나눈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눈다는 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개념이 아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내가 가진 것을 서로 공유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나눌 것은 한 가지 이상이 있다고 하는 입장이다.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동정해야 할 대상은 없는 것이며, 다만 나누어야 할 이웃만 있다고 하는 사상이다. 그럴 때 비로소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과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고,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자도 없다.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사람도 없고, 또한 너무 부유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사람도 없다.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은 주는 것뿐 아니라 받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 구제(섬김과 나눔)의 본질
봉사와 섬김의 삶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테레사 수녀는 봉사와 섬김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눈에 보이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집안 청소를 해주며 그 사람을 씻기고 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초점은 이것이다. "무력하고 무지하고 가난하고 병든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해도 한 영혼과 인격의 존중함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요 행동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배고픈 것을 면하게 하고 병든 것을 낫게 하는 것 못지않게 그 모든 상황 속에 있고, 가난 속에 있고 남들의 멸시 속에 있어도 한 영혼과 한 인격은 대접을 받을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섬김과 봉사는 제 삼자에게 보이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전체 목적과 관심이 대접해야 되는 한 영혼에게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제는 한마디로 한 영혼의 존귀함과 소중함을 훼손하지 않도록 돌아보고 섬기는 일이다.
세상적인 의는 제 삼자에게 보이려고 이 일을 행함으로서 구제를 받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우월함과 자신의 어떤 종교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려움에 처한 자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악함은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의 인격과 소중함을 놓칠 수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심리적 인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현실 속에서 구제를 하고 문제를 돕기 위한 일에 치중하다가 한 인격의 영혼에 본의 아니게 깊은 상처를 주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주는 자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교만과 자기의 의
주는 자가 얼마든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신의 의를 행할 수 있으며, 더욱이 남에게 무엇을 베풀고자 할 때 어떤 불순한 목적과 의도와 동기가 내포되어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베풂과 나눔은 될 수 없다. 주는 것이라 할 때는 중요한 것이 결여될 수 있다. '준다.'라고 하는 것은 "나는 주는 자", "너는 받는 자" 라는 갑을 관계가 성립된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주는 자와 받는 자를 나누어 차등을 두는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즉 갑과 을로 나누는, 마치 상주와 노예로 전락케 하는 심각한 심리적 결손이 발생한다. 그래서 누구는 줄 것이 있는 "가진 자"와 누구는 줄 것이 없는 "못 가진 자"가로 자리매김 되어 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상을 거절하고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지 않고 선행을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지금 산상설교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이에 대답은 명확하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또는 예수 때문에 라는 말로 구제의 동기와 목적을 확인하게 된다.
3.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고백
그렇다면 예수 때문에 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말함일까? 그것은 바로 갈라디아 6:14절의 말씀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와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나 근거가 될 수 없듯이 내가 예전 세상에 속했을 때는 세상의 원리, 세상의 힘이라는 것으로 살았다면 지금 예수 안에서는 세상적인 법칙이나 세상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세상 속에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허락된 세상이다. 여기서는 힘으로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의와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에 대조 점은 분명해졌다.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느냐 섬기는 것으로 작용하느냐, 권력이냐 희생이냐 그렇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구제의 문제가 그 어려움과 난관을 해결하려는 것으로만 작용하면 그건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난 속에 있고 무력함 속에 있고 난처함 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힘이 될 수는 없다. 문제 자체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문제 속에 있는 자를 진심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세워주는 일은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겉으로 드러나거나 눈에 보이게 표시가 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구제라는 이 신앙 실천에서 이 구제의 문제를 해결하고 돕는 일이 하나의 신앙 실천의 행위와 구호로서 신앙인의 정당성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 영혼 그 자체를 귀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며 그의 영혼에 집중하는 일이다. 로마서 5: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구제에 나서는 기본 동기요 근거라면 그것이 어찌 구제에만 머물겠는가?
우리는 한 영혼을 만날 때 우리 이웃을 대할 때, 우리는 한 영혼을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마음에 기억하며 구제의 일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단코 그 사람을 놓고 나의 먼저 믿은 것을 그의 아직 믿지 않은 것, 혹은 나의 여유가 상대방의 부족을 인하여 그를 희생물로서 또는 구제라는 이름을 동원하여 나를 증명하지 않고 예수를 증명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사는 자의 다름,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사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문제가 구제라는 문제로 설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이것이 하나의 행위, 또는 명분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를 예로 드신 이유도 사람 앞에 보이려 외식(헬라어 탈렌트, 쇼, 연기)하지 말고 우리 이웃들 앞에 종교적 범위로, 종교화 되거나 형태적인 영역으로 도망가는 것을 예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이다.
4. 하나님만이 주심과 드림의 원형임을 잊지 말아야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베풂과 나눔 그리고 주는 것의 원인자요 시여 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사죄하심의 용서의 은총, 긍휼, 자비, 구원하심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가능했던 일들이다. 오로지 주고, 베풀고 드리는 것의 원형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이를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또한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롬8:3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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