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이사야 58장 6절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하는 말씀이다. 경건 생활이나 병 고침을 위하여 금식을 권하며,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한다.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식 기도원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 문맥의 전후를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금식을 장려하거나 금식을 격려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 생활은 금식보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사회에서 압제 당하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체, 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식보다 사회 정의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오히려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그의 복음 사역 중에 금식을 하시지 않으므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의 비난을 받으셨다(막2:18-22).
그렇다고 성경에서는 금식을 근본적으로 금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건강상 할 수도 있고 또한 경건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경건은 은밀한 가운데 그의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는 금식을 하되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라"(마6:18)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보다 중요한 핵심 질문은 우리가 금식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굶주려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으로 만족하는가? 그래서 그 분을 따라 좁고 험한 길을 갈 수 있는가? 우리는 금식하지 않고도 경건과 올곧은 삶을 유지하며 지켜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는 자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가? 삶의 순간 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을 외면하며 세상의 더 좋은 것들을 좇아 현실의 우상을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금식은 우리로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서 내 마음을 엉뚱한 애착과 반항적 욕구로부터 보호한다. 금식의 공복을 통해 나의 결핍은 극명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깨닫게 된다. 물론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기도하며 그리고 금식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하지만 가장 교묘한 적수들에 맞서 그 기쁨을 유지하는 것은 평생의 씨름이다. 이 씨름에 금식은 우리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라는 고백으로 돌아오게 한다.
하나님은 왜 음식을 지으셨고 음식이 있어야만 인간의 목숨이 부지되게 하셨을까? 왜 배고픔과 목마름인가? 그것은 "나는 생명의 떡"(요6:35)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갈증과 해갈의 리듬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음식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배고픔과 목마름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금식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래서 금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하나는 선하신 그 분께 감사하며 음식을 먹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자신께 굶주려 음식을 끊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 인기 없는 이유는 그 분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것으로 배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먹을 때나 금식 할 때나 우리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다. 둘 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주신 분을 바라보게 한다. 먹는 일의 위험은 선물 자체에 취하는 것이고, 금식의 위험은 선물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의 의지력을 내세우는 것이다. 진정한 금식의 의미는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형식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는다. 참된 금식은 철저한 회개를 중심에 두고, 자기 자신의 뜻과 정욕을 억누르며, 하나님께서 집중하는 온전함을 요구한다.
(참고)
손석태(개신대학원대학교 명예 총장)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 마소라 사본은 기뻐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모든 영역 본은 "the fast that I choose"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 ESV. NIV. NASB. RSV. JPS 등 거의 모든 영역 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TNK 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 성경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금식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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