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부활의 권능과 부활 신앙은 우리 몸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며 몸의 구원을 함께 견인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몸이 다시 사는 것", 즉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과 그것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고 말한다(고전15:12-19).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가장 흔한 치명적인 오해는 부활을 영생으로 가는 관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은 죽었지만 껍질인 몸을 떠나 영혼이 천국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구원으로 여기는 자들 말이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거나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을 보면 그들은 영적 현상과 기적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이유는 몸을 다시 살린다는 개념 때문이었다.
당시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여기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던 그들은 죽음 이후에 몸이 다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이미 영적인 천상의 존재가 되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죽을 때 벗어버릴 몸이야말로 궁극적 영성의 방해물이라고 생각했기에 현재의 몸의 의미를 부정하고 그것이 미래에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며 몸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와 근거를 설명한다(15:34-58).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영혼만의 구원, 혹은 영혼 불멸이 아니라 영육의 영원한 부활 생명임을 고백한다. 몸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의미, 그리고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물질세계만 창조하신 것은 아니지만, 분명 물질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좋아하신 세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위 영계나 초자연적인 세계보다 열등한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의 소중한 몸과 물질세계를 긍정하는 창조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썩고 불타버릴 물질세계에서 우리를 구출하셔서 영원한 영적 세계에 피하게 하신 구원이 아니라, 참된 영적 세계로 변화된 물질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만끽하며 살게 하는 것이다.
모든 진지한 영성의 핵심은 삶이다. '영'은 삶(생명)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다. 삶으로 충만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 창조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 것,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속에 공유하여 계신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삶을 경험한다.
그래서 몸의 세계와 영적 세계는 이원론적 의미에서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몸이 땅에서의 한 생이 끝날 때 버리는 (영혼을 담았던) 일회용 그릇이 아닌 것처럼, 지금 우리 머리위에 펼쳐진 하늘과 발을 딛고 있는 땅도 주가 재림하시는 세상 끝 날에 불타버릴 땔감이 아니다. 주가 다시 오실 때 몸이 변화되어 썩지 않을 것과 죽지 않은 것을 입듯이, 이 세상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된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부활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가 가진 궁극의 소망이다. 그리고 이러한 궁극적 종말에 대한 소망은 지금 여기의 일상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몸의 부활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결정한다. 몸의 부활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기둥이다.
몸이 다시 산다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관련짓지 않고는 무의미하다.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의 고난으로 죄와 죽음을 감당한 그 상흔의 그 몸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이 싹터 나오는 거룩한 터전이다. 예수의 고난과 관계없는 몸의 부활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키우는 자궁임을 가리키고 있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간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 일이며, 오늘도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고백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몸 전체로 해야 한다. 삶으로도 번역되지 않은 신앙고백은 무의미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늘 고백하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에 대한 바른 고백이다. (김기석 목사)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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