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소중한 책 "변하는 사상 불변하는 진리"라는 책에서 진심과 진리를 논하고 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진심과 진리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예민한 부분이다. 그것이 예민한 부분이 되기 쉬운 것은 진심과 진리에 대해서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저자는 진심이라는 단어에 목을 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의미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진심은 그 자체로서 삶의 태도일 뿐이다. 진심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남을 해할 수도 있다. 결과가 예상이나 기대보다는 훨씬 더 악할 수 있다. 진심이나 진지함, 열심이 없이는 진리도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삶의 태도일 뿐이다. 열심과 진지성은 옳을 수도 있고 그릇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지함에 인생의 통제권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이 만족시켜야 하는 수준은 하나님의 거룩한 높이이다(히12:14).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참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의 열심과 진지함은 헛되고 무익하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한다.'는 말과 '진리대로 행한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진심으로 행하기만 하면 그것은 곧 옳고 정당한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의 결과를 놓고 그것이 얼마나 진리대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따지는 사람은 드물다. 단지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따져 보고 그런 요소들이 있었다면 주어진 결과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진심이나 진지함이 진리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심, 열심, 최선이라는 말은 의외로 자기 주관적인 아집과 교만으로 진리가 들어설 공간마저 수용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심과 성실과 최선에 대한 실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으려면 당연히 남자를 만나 결혼을 통해 사랑을 나눌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성실해도 남자 없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돌이지 보석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최선을 다하고 자력의 끝에도 사물의 질 자체를 변하게 할 수는 없다. 성실한 간첩은 목적이 다를 때 최선을 다하여 조국을 위해 파괴활동을 일삼을 수 있고, 의학 지식이 결여된 성실한 돌팔이는 언제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술에 결함을 초래할 수 있으며, 성실할 뿐만 아니라 충성되고 특심한 이단에 빠진 자들도 그것이 진리라고 우기며 평생을 헌신할 수 있다. 진심과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모독이요, 진리를 파괴하는 폭력이요, 자기 자신을 소진케 하는 무지이다.
인간의 사고와 삶의 옳고 그름은 진지함이나 열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 진리를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였다. 그보다 더한 열심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기 위해 그의 열심과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행동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옳다고 생각한 정도가 아니라 그 점을 아주 확신하였고, 특심하여 그것이 자신을 바쳐야할 바른 삶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다. 어떻게 인간이 이처럼 진지하게, 진심으로. 그리고 열심을 다해 인간을 핍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진심과 진지함에만 충실했을 뿐, 진리라는 절대적 푯대와 방향과 대상은 없었다.
베드로 역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며 호언장담했건만,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도망치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베드로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행한 것은, 그에게 진심이나 진지성 혹은 열심히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에게 진지함이나 진심이 없었던들, 어찌 자신의 직업과 처자를 등지고 주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 열심이 없었던들, 어찌 하루 이틀도 아닌 만 3년씩이나 주님을 좇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누구 못지않은 진지함과 열심이 있었지만 진리 안에서의 바른 성찰에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오늘날과는 무관한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지성과 진심으로, 그리고 열심과 최선을 다해 사람과 진리를 짓밟는 일들은 오늘도 비일비재하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오직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불법을 저지르며, 얼마나 진심으로 불의와 타협하고, 얼마나 열심히 탈법을 자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진심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진리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리대로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옳고 바른 길, 영원한 길 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절대적 푯대로 삼아 진리대로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지명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각각 개별적으로 불러 인도해 주시기에 우리는 진리를 바라보고, 진리를 따르며, 진리대로 나아갈 수 있다. 자기중심으로부터 주님 중심으로 일대 방향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지성과 열심은 옛날 그대로지만, 더 이상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진지성과 열성만을 의지한 결과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시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옛 이름이었다. 네가 너 자신의 진지성이나 열심보다도 진리인 나를 더 의지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 부르심 속에서 베드로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로 인하여 비로소 진리를 따라가는 진리의 사도가 되었다.
범죄 한 아담이 숲 속에 숨어 수치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어김없이 찾아오시어 불러 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화려한 이집트 왕자의 자리를 잃고 미디안 광야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모세를 먼저 찾으신 분도 주님이셨다.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불의한 돈으로 치부하며 사회로부터 지탄받던 탐관오리 삭개오를 찾으신 주님께서 예외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
주님의 이 개별적인 부르심 속에서 그들이 모두 진심으로, 진리를 따라 살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담을, 모세를, 베드로를, 바울을, 삭개오를 각각 개별적으로 부르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이름 또한 각각 개별적으로 불러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원한 진리에 기대지 않는 인생이란 모두 소모품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모되어버린 인생은 그 대가로 얻은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소모된 인생은 진리 안에서만 회복되고 부활된다. 오직 진리만 영원하기 때문이다. 진심이 진리를 앞설 수 없다. 인간의 사랑과 진심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세상의 논리는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이라는 진리를 앞설 수 없다.
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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