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찬미예수
기독교 신앙에는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증명해 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체험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
누군가 이에 대해 심리적인 착각이나 합리화라고 비난하더라도 어차피 개인의 체험의 영역이니 논쟁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개인적 회심'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는 일은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신의 음성, 즉 '계시'(Revelation)가 '성경'을 통해 지금도 신앙인들에게 임하고 있고,
그 계시를 통한 교제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도 신의 계시인 성경의 교리적, 신학적 해석의 범주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체험의 영역으로만 기준을 세우면 정통과 이단은 구분할 길이 모호해지고
사사로운 체험이나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바람'과 '기원'은 진정한 기독교가 될 수 없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신앙이 독실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계시 의존적'이라기보다 '체험적'이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맹목적'이고, '지성적'이라기보다 '반 지성주의 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원래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계시를 분별하는 합리적인 이성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은 잘하지만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가거나 난해한 구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그건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 일단 믿어봐. 믿으면 다 이해가 가!' 라고 답변한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추앙받는 것은 바로 '순종'이다.
그것도 '지성'이 차단된 '순종'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관한 것이든, 교리와 신학에 관한 것이든, 교회의 문화와 제도에 관한 것이든
어떤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문화가 있다.
조금이라도 꼬치꼬치 캐묻거나 따져 물으면 바로 '불온한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로 찍히거나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소통과 교제를 믿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하는 것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을 매주 마다 외우는 교회가 가장 소통하기 어려운 불통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런 교회와 기독교 문화의 원인에 뿌리 깊은 '반 지성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주의 지성 존 스토트가 사역 절정기에 던진 핵심 메시지는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영적 천박함이란 죄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냉랭하고 기쁨 없는 지성에 갇힌 기독교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지성주의'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체험은 교리보다 정말 중요한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성의 역할은 공부할 때 외에 거의 혹은 조금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코 그런 생각이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그리스도인에게 지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는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질문들로서 우리 신앙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끼친다.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때, 복음을 전할 때, 믿음을 소유하는 일이 순전히 비합리적인 것인지 묻고 싶다.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에 대해 바울이 한 말이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매우 두렵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실제로 많은 사람이 지식 없는 열심, 계몽 없는 열정에 빠져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심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다만 열심 없는 지식이 지식 없는 열심을 대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지식에 근거한 열심과 뜨거운 지식 모두를 원하신다.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이었던 존 맥케이(John MacKay)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찰 없는 헌신은 광신적인 행동을 낳고, 헌신 없는 성찰은 모든 행동을 마비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유한 이성과 감성과 의지는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
건전한 이성과 감성에 의하지 않고 온통 뜬 구름 같은 일방적인 믿음 처방 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상식적이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다.
몰상식과 반 지성과 반이성과 불합리야말로 참된 신앙의 적이다.
지성과 이성의 통일성 없이 수없는 자기 관점들로 분열되어 성찰 없는 반목은 언제나 신앙의 병폐를 가져온다.
이러한 주관에 머무르면 정상적이고 객관적인 사유가 안 된다.
성경의 경전이나 경전의 텍스트는 그 자체가 숭배할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그것이 지시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은택을 누리는 것이다. 그 혜택에 참여하려면 그에 합당한 지성이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존의 신앙이 아닌 믿음 자체를 위한 신앙은 끝없는 '자기 세뇌'와 '헛된 경건과 신비주의'에 몰입하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우심 가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평화와 안전함에 거하고 싶다면,
그 믿음이 최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온전한 지성과 이해력이다.
그러니 자꾸 뜬구름 같은 영성의 신비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지성을 계발해야 한다.
또한 지성을 계발하는 공부에 주력하지 않고 믿으면 다 된다는 식의 사이비 영성은 천박하고도 왜곡된 우상의 종교로 추락한다.
오늘날 반 지성주의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현대 세계는 어떤 사상에 대해 '그것이 진리인가?'를 묻기보다 '그것이 효과적인가?'를 먼저 묻는 실용주의 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지성과 이성을 언급하면 금 새, 반 지성, 반이성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거듭난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날마다 결단하고 선택하는 토대가 된다.
우리는 창조, 계시, 구속, 심판의 위대한 교리를 통해 우리가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고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으로 소통하심으로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대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mind)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지식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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