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 그러면 그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말하라"겔 23:36
"네가 심판하려느냐?"는 여호와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이전에도 몇 번 들었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예전처럼 들려오지 않음은 왜일까요?
똑같은 말씀인데도 다르게 들리는 이 순간은 어디로부터 온 시간일까요?
왜냐면 저는 이 순간 감히 여호와의 질문에 "NO!"라고 답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당시 이미 형 오홀라 (사마리아)는 심판 받았고 아우 오홀리바 (남유다 예루살렘)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을뿐인데 왜 여호와께서는굳이 심판받아 물 건너간 오홀라란 이름을 오홀리바와 함께 부르며 네가 심판하려느냐?고 묻는 걸까요?
이것은 에스겔 600여년 이후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대변혁이 나타날 것을 아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질문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시공속에서 일하시면서도 시공에 갇힌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묵시의 영원속에서 모든 걸 다 아시는 전능하신 구속자만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새 언약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새언약의 일꾼들에게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고 얼마든지 물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제 주은평선교사님께서 어디를 가나 오홀라와 오호리바들은 있기 마련이라는 글을 보았는데 실로 우리 모두는 날 위하여 내 멋대로 장막 (회막 성소)종교를 만드는 오홀라이면서도 동시에 여호와의 식양(출애굽 광야회막)대로 지은 솔로몬 성전이 있는 오홀리바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오홀리바에게 나의 장막을 두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한 성경,즉 신약과 구약의 두 유방으로 양육해주시는 자유한 여자요 주님의 신부된 몸으로서의 한 교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오홀라처럼 각자 지 멋대로 섬기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어머니가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리브가의 한 태속에 야곱과 에서가 서로 다투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하나임에도 끊임없이 갈등하며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분리와 분열 증세를 호되게 뚫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속에서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모든 진리는 무엇일까요?
이 지겨운 분리와 분열을 끊임없이 갈라내고 갈라내는게 저주와 사망의 율법이라면 이 숙명적인 불협화음을 하나로 연결시켜 평화로 살려내는게 생령과 사랑의 법인 성령인 것입니다
이 성령의 법을 훼방하는 자는 자비와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 질문은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통해 이미 오홀리바에게 심판을 선언한 후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 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네가 그 잔을 다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겔23:21~35
에스겔 말씀대로 심판 받은 오홀리바가
말씀대로 남은 자들이 돌아 오는 스알야숩이 되여 재건된 예루살렘성과 스룹바벨 성전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장엄 웅장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건축한 그 시대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시며 하신 말씀안에 머무는 자들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누19:41~44
왜 이 성과 이 성전은 전무후무한 심판을 기원전 586년도에 받았음에도 또 AD 70년도에 재현되는 것일까요?
그분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꿰뚫어 보시며 장차당할 심판을 예언하시게 되는데 이 때 주님도 에스겔처럼 대성통곡하십니다
헬라어 "에클라우센(우시며)" 이라는 말은 심히 통곡하며 펑펑 운다는 말이라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오홀리바(남유다 예루살렘)가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주요인이 하나님을 잊었고 등 뒤로 버린 결과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요인을 "평화에 관한 일에 무지함"으로 밝히십니다
하다면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다는 것과 평화에 관한 일이 서로 밀접한 상호관계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화에 관한 일이 저들 눈에는 숨기워졌다하십니다
여기서 숨기워졌다는 말은 누군가에 의해 못보도록 감추임 당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시나요?
하나님의 전적 은혜없이는 내 눈꺼플이 열려 질 수 없다는 구제불능을 확인하게 되지 않습니다
죄의 유무를 논하기 이전부터 나는 철저히 누군가에 의해서만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게 되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100%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나는 도무지 심판 아니라 구원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자각속에 철저히 심판주이시며 구원주이신 아버지와 아들로 인해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심판과 구원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였습니다
아버지 집에 그득 그득 채워 놓아야 할 진리와 은혜,즉 긍휼과 인애의 생명 양식들은 온통 분리와 분열을 일삼는 율법 세력들에게 강탈당한채 숭고한 도덕과 윤리적인 의와 종교적인 경건으로 가득찬 제사업자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강도들로 득실거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공존하는 나를 꿰뚫어 보시며 통곡속에서 진단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정녕 내 안에 아버지 집에는 썩지 않을 생명 양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으면 똥일뿐인 썩어질 배설물로 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썩은 말들을 쏟아 놓는게 바로 나이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뱀대가리들이 토해놓는 물들이 홍수를 이루니 여인이 낳은 아들을 삼키고도 남지 않습니까?
오늘날 제도적으로 승인된 율법의 자리에 앉아 자기도 못들어가고 남들도 못들어 가게 만드는 영적 현상은 수많은 현대판 오홀리바와 오홀라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실제로 이스라엘은 성전에 우상을 놓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상 못지 않게 신랄한 말로 경고한 대상들이 있었는데 그 대상들이 하나같이 성경과 율법과 성전에 뿌리 박고 사는 자들이였다는 것입니다
내게도 들려지는 경고인 것입니다
아버지!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 물으시니 답하나이다
나는 다만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살아가겠사오니 오늘날의 오홀라와 오홀리바들에게도 무겁게 짓눌려 뜨지 못하는 눈들을 뜨게 하옵소서
저들의 눈들도 열어서 평화에 관한 일들을 알게 하시옵소서
말씀에 눈 먼자들을 아버지께서 부르사 고쳐주시겠다 하셨나이다
이런 치유의 역사를 두고 메시야 시대라 하셨사온즉 말씀대로 우리를 고치소서!
"네가 심판하려느냐?"는 여호와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이전에도 몇 번 들었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예전처럼 들려오지 않음은 왜일까요?
똑같은 말씀인데도 다르게 들리는 이 순간은 어디로부터 온 시간일까요?
왜냐면 저는 이 순간 감히 여호와의 질문에 "NO!"라고 답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당시 이미 형 오홀라 (사마리아)는 심판 받았고 아우 오홀리바 (남유다 예루살렘)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을뿐인데 왜 여호와께서는굳이 심판받아 물 건너간 오홀라란 이름을 오홀리바와 함께 부르며 네가 심판하려느냐?고 묻는 걸까요?
이것은 에스겔 600여년 이후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대변혁이 나타날 것을 아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질문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시공속에서 일하시면서도 시공에 갇힌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묵시의 영원속에서 모든 걸 다 아시는 전능하신 구속자만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새 언약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새언약의 일꾼들에게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고 얼마든지 물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제 주은평선교사님께서 어디를 가나 오홀라와 오호리바들은 있기 마련이라는 글을 보았는데 실로 우리 모두는 날 위하여 내 멋대로 장막 (회막 성소)종교를 만드는 오홀라이면서도 동시에 여호와의 식양(출애굽 광야회막)대로 지은 솔로몬 성전이 있는 오홀리바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오홀리바에게 나의 장막을 두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한 성경,즉 신약과 구약의 두 유방으로 양육해주시는 자유한 여자요 주님의 신부된 몸으로서의 한 교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오홀라처럼 각자 지 멋대로 섬기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어머니가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리브가의 한 태속에 야곱과 에서가 서로 다투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하나임에도 끊임없이 갈등하며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분리와 분열 증세를 호되게 뚫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속에서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모든 진리는 무엇일까요?
이 지겨운 분리와 분열을 끊임없이 갈라내고 갈라내는게 저주와 사망의 율법이라면 이 숙명적인 불협화음을 하나로 연결시켜 평화로 살려내는게 생령과 사랑의 법인 성령인 것입니다
이 성령의 법을 훼방하는 자는 자비와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 질문은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통해 이미 오홀리바에게 심판을 선언한 후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 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네가 그 잔을 다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겔23:21~35
에스겔 말씀대로 심판 받은 오홀리바가
말씀대로 남은 자들이 돌아 오는 스알야숩이 되여 재건된 예루살렘성과 스룹바벨 성전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장엄 웅장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건축한 그 시대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시며 하신 말씀안에 머무는 자들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누19:41~44
왜 이 성과 이 성전은 전무후무한 심판을 기원전 586년도에 받았음에도 또 AD 70년도에 재현되는 것일까요?
그분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꿰뚫어 보시며 장차당할 심판을 예언하시게 되는데 이 때 주님도 에스겔처럼 대성통곡하십니다
헬라어 "에클라우센(우시며)" 이라는 말은 심히 통곡하며 펑펑 운다는 말이라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오홀리바(남유다 예루살렘)가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주요인이 하나님을 잊었고 등 뒤로 버린 결과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요인을 "평화에 관한 일에 무지함"으로 밝히십니다
하다면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다는 것과 평화에 관한 일이 서로 밀접한 상호관계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화에 관한 일이 저들 눈에는 숨기워졌다하십니다
여기서 숨기워졌다는 말은 누군가에 의해 못보도록 감추임 당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시나요?
하나님의 전적 은혜없이는 내 눈꺼플이 열려 질 수 없다는 구제불능을 확인하게 되지 않습니다
죄의 유무를 논하기 이전부터 나는 철저히 누군가에 의해서만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게 되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100%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나는 도무지 심판 아니라 구원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자각속에 철저히 심판주이시며 구원주이신 아버지와 아들로 인해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심판과 구원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였습니다
아버지 집에 그득 그득 채워 놓아야 할 진리와 은혜,즉 긍휼과 인애의 생명 양식들은 온통 분리와 분열을 일삼는 율법 세력들에게 강탈당한채 숭고한 도덕과 윤리적인 의와 종교적인 경건으로 가득찬 제사업자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강도들로 득실거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공존하는 나를 꿰뚫어 보시며 통곡속에서 진단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정녕 내 안에 아버지 집에는 썩지 않을 생명 양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으면 똥일뿐인 썩어질 배설물로 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썩은 말들을 쏟아 놓는게 바로 나이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뱀대가리들이 토해놓는 물들이 홍수를 이루니 여인이 낳은 아들을 삼키고도 남지 않습니까?
오늘날 제도적으로 승인된 율법의 자리에 앉아 자기도 못들어가고 남들도 못들어 가게 만드는 영적 현상은 수많은 현대판 오홀리바와 오홀라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실제로 이스라엘은 성전에 우상을 놓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상 못지 않게 신랄한 말로 경고한 대상들이 있었는데 그 대상들이 하나같이 성경과 율법과 성전에 뿌리 박고 사는 자들이였다는 것입니다
내게도 들려지는 경고인 것입니다
아버지!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 물으시니 답하나이다
나는 다만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살아가겠사오니 오늘날의 오홀라와 오홀리바들에게도 무겁게 짓눌려 뜨지 못하는 눈들을 뜨게 하옵소서
저들의 눈들도 열어서 평화에 관한 일들을 알게 하시옵소서
말씀에 눈 먼자들을 아버지께서 부르사 고쳐주시겠다 하셨나이다
이런 치유의 역사를 두고 메시야 시대라 하셨사온즉 말씀대로 우리를 고치소서!
출처 : 토론토아름다운장로교회
글쓴이 : 안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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