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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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의 이야기

메시야의 표적

샤론의 수선화 2015. 12. 17. 15:05

 

샬롬! 찬미예수

 

예수께서 세상에 탄생하시던 처음 장소와 운명하시던 마지막 장소는 아주 인상 깊게 참 메시야 식별의 표징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복음서에서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장과 끝장에 그 비밀을 숨겨놓고 있다.

첫 장은 베들레헴 구유라는 장소요, 마지막장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죄수 사형집행의 골고다 언덕이다.

떡집이라 일컬어지는 베들레헴에서의 예수 탄생 고지와 구유에 누이심이 메시야의 표징이었듯이

골고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표징은 더더욱 오묘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베들레헴, 그리고 골고다 이 두 현장은 너무나 우리들 상식과 기대에 어긋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종교라고 하면 최소한 갖추어야 할 성스럽고 기적능력이 나타나는 일과도 무관하게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스칸달론(scandal)이 되는 곳이다.  

하나님은 감추이면서 드러내시는 분이요, 자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계시하는 사건 속에 가장 깊게 은폐하시는 분이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그곳, 울부짖으며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죽음 같은 침묵만이 심연을 파고드는 거절당함이 있는 그곳,

거룩하고 아름답고 고상함이란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거칠고 야만스럽고 폭력과 무지가 난무하는 형집행장에서

성경은 이방인 로마군인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생명의 젖줄이 되는 증언을 담고 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6:39).

 

예수 탄생과 관련한 메시아 식별의 비밀을 누가복음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라고(눅2:12) 또렷하게 표시한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는 크리스마스카드에 등장하는 포근하고 평화로운 동화적 이야기를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서 안에는 특별히 유대교 정통신앙을 강조하고 뽐내는 사람들을 제쳐두고, 복음은 이방인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창녀들과 사회적 성공과 실패의 눈으로 볼 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졌음을 증언하는 복음서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시 사회적 약자로 억압을 받고 있었던 가난한 자들, 여자들, 그리고 종교적 우등생으로 자처하는 교만한 의인들이 아닌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특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의 찬가 중에서 비천한 자는 높아지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부름을 얻는다고 언급한다(눅1:52-53).

예수님 탄생 기사에서 마태는 남자 요셉을 초점으로 기록하고, 누가는 여자 마리아를 초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구유에 나신 예수를 경배하러 온 자들이 부와 지위를 가진 동방 박사를 언급을 하고 있지만,

누가는 천사들로부터 구세주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에 온 자들이 당시 도둑이라 일컬어지는

목자들에 대하여 언급한 것과 분명히 대조된다(눅2:8-20, 마2:1-12).

 

이 외에도 부자에게 설움 받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로마세금징수원이 된 삭개오의 이야기,

자기의 생계수단이었던 것을 당당히 노출시키는 옥합을 깨는, 이름도 남기지 않는 죄에 팔린 창녀 같은 어느 여인 이야기 등등,

누가 기자의 이야기는 복음을 그들이 더 바르게 빨리 받더라고, 하나님나라 비밀이 그들의 눈에 먼저 보였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참 메시야의 표징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뉘인 아기"라고 말하려는 메시야의 비밀은 무엇일까?

잘살게 해준다고 위세부리는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탄생 때부터 고급스런 저택에서, 온갖 고급 향유로 아기 목욕을 시키고,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란다는 통설을 깨는 것이다.

그런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허술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라고 아주 또렷하게 말하는 것이다.

 

요즘 세간에 자조적으로 떠도는 금 수저, 은수저, 동 수저, 흙 수저 등 일명 '수저 계급론'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 간 이동이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는 신조어다.

개인의 능력에 상관없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따라 더 갖게 되는 불평등을 꼬집은 부와 지위의 세습에 대한 논란인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주로 부모의 후광에 기댄 결과물에 대한 사회적 거부와 좌절을 반영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오늘날 교회를 세습하는 종교적 타락상은 우리를 더욱 슬프고 절망스럽게 한다.

금, 은, 동은 어느 정도 온도를 견뎌내면 또 다른 금이빨, 은 이빨, 동 이빨 등으로 변이와 변신이 용이해진다.

그러나 흙은 어쩌다 고귀한 도자기로 빚어질 수 있었다 해도 다시 다른 그만큼의 것으로 해체하거나 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회적 특권구조 속에서, 영웅들과 왕세자들이 누리는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그들은

참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기를 뉘여도 구유에 뉘어놓았다는 묘사도 낭만적 모습이라기보다는 아주 의도적인 상징적 묘사인 것이다.

가축들의 쉼터인 시간과 장소를 통해 아기 예수는 만인의 생명을 살리려고 오시는 '거룩한 밥'이 되실 분이라는 상징이 그 안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다름 아니라, 축생들처럼 노동과 돈 버는 일에 지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의지할 것 없는 소외된 사람들,

노동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아기 예수로 오신 예수 생명을 먹고 마심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의 영광을 얻는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주님의 탄생은 십자가로의 죽으심과 부활에 맞닿아있다.

만약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당한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의 탄생을 기리고 축하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의 주님의 탄생을 묵상할 때, 골고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도

생명도 없는 죽은 교리이며 죽은 종교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너희는 예수를 누구라 하느냐?

 

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