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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의 이야기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묵상(2

샤론의 수선화 2015. 11. 14. 14:11

 

 

샬롬! 찬미예수

 

한국 사람의 신앙 정서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적 관점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감성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네 가지 종교를 다 믿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충분히 그런 성향과 신앙적 감성이 자리하고 있다. 

 

첫째는 평소에는 유교적으로 산다.

모든 의식, 생각의 근저에는 의례적으로 유교적인 습성, 풍토, 기반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죽어야 할 공자가 눈을 부릅뜬 채 여전히 살아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말이나 생각, 행동이 너무나 그렇다.

 

둘째는 위기가 생기면 샤머니즘(shamanism) 으로 바뀐다.

문제와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지 않고,

그 위기만 해결해달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문제만을 피해갈 수 있기만을 위해 매달린다.

일천번제가 그것이다. 정성을 바치고 공을 들이면 응답받는다고 믿는 것은 샤머니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일천번제는, 차례 번(番)이 아니라 번제, 또는 태울 번(燔)으로서 일천 마리의 양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

(one thousand burnt offerings)을 말하는데, 한국 교회는 일천 번의 예배, 일천 번의 헌금, 일천 번의 기도 등으로

변칙 적용하기까지 하며 또한 특수화를 일반화시키며 시행하고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셋째는 토론을 하면 불교철학에 빠진다.

이런저런 토론이 지루하게 이어지다 보면, 결국 끝에 가서는, 다 소용없어,

다 쓸데없어, 마음 비워! 이처럼 없을 무(無)의 철학, 빌 공(空)의 철학에 빠지고 만다.

인보응보적인 생각과 운명론 내지는 팔자소관으로 다루며 불교적 사상에서 탈피를 못한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의 대화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신약성경의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에게서도 이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늘 원인만 추적한다. 과거에만 집착한다. 열린 미래에 대한 관점이 없다.

단편적이고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 갇혀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지혜를 얻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한 번씩 제정신이 들 때는 온전한 기독교를 믿는다.

마음을 비우고 성령의 임재, 교통, 교제하심을 간구한다.

항상 그래야 할 마음이 한 번씩 그런 때가 된다. 그럴 때는 잠시나마 온전한 크리스천이 된다.

살다보면 환난이 오고 풍파가 오기 마련이다. 한순간, 부분적, 현상적, 현실적인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전인적인 섭리의 경륜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을 얻어야 할 일이다.

 

주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품고 계신 구체적인 비밀계획인가?

그분은 우리가 몇 날, 몇 주, 몇 년이고 소비해가며 그 뜻을 찾아내기를 원하실까?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뜻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근실한 삶이다.

물론 성경 기자들도 미래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미래에 대한 시각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를 구속하셨고 장래에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현재 뿐이다.

 

야고보는 분명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그들에게 허영과 헛된 안정감을 심어준다.

우리는 주제넘게 미래를 속단하기보다는 현재 하나님의 뜻에 충실해야 한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일에 힘쓰라고 권하신다.

우리는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도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이 내일을 책임지시기에 우리는 오늘 일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25-36)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그분은 우리에게 현재의 상황이나 미래의 문제에 대해 불신자들처럼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대신 그분은 이렇게 명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바로 하여 첫째 것을 첫째에 놓을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쩌다 한 번씩 내려야하는 큰 결정들이 아니라 날마다 행해야하는 모든 작은 일들에 에너지를 쏟기 원하신다. 

우리는 작은 책임을 감당하함으로서 이후에 큰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로 준비된다(눅16:10-11).

사도바울도 비슷한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엡5:15-1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현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하나님이 미래를 쥐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이상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도 현 순간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다.

그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약 어디를 보아도 바울이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고민했다는 단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신을 현재에 내주었다. 성경의 신앙 인물들에게 고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고뇌가 아니라

그 뜻대로 살려는 고뇌이다. 바울이 자신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문제로 크게 씨름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내면에 열정과 두려움을 자아낸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행여 불순종할 것이 크게 두려워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9:16).

 

하나님의 뜻은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동기를 살핀다.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정보다 날마다 내리는 작은 결정을 중시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도록 우리에게 진정 주어진 유일한 시간은 현순간이다.

현재의 기본적인 삶에 충실한 삶이 우리의 책임이다.

내일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서 오늘 그분의 뜻대로 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놀라운 자유가 생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미래에 대해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우리가 취하여 따를 수 있는 길과 방향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하나님을 구하는 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그분의 뜻이 될 수 있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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