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지나며 -히즈윌 (feat.김동욱) Hiswill
2021 다니엘 기도회 2일차 전체실황] #이은상선교사| 2021-11-02
https://youtu.be/Pz_UIOvF6yA
2021 다니엘기도회 5일차] #차길영대표 | 2021-11-05
2021 다니엘기도회 8일차] #김윤상뉴스| 2021-11-08
2021년 다니엘기도회 3일차☆
(온전한 치유와 변화가 있는 회복!)
*성경:히11:6
*제목:"믿음이 없이는"
*강사:장진숙작곡가
나는 히스윌의 작곡가이다. 히즈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인도 되어 왔다"는 뜻이다. 나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혈루병 여인의 믿음,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놀라셨듯이 내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놀라시도록 살자고 결단했다.
내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믿음, 꿈을 꿀 수 없는 상황 꿈을 꾸는 믿음을 소망했다.
주님을 만나게 된 배경은 언제 부터인가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때이다. 중학교때 아빠가 폐암이 걸리셨고 간암 말기가 오면서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
아빠가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내 마음에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대학생이 될때 아빠는 돌아가셨고 나는 엄마에게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 20살에독립을 하게 되었다.이제 손 벌리지 말고
성공하여 자리 잡자고 결심했다.
집안이 어려운데 왜 음악을 하느냐는 가까운 이들의 시선들 때문에 나는 꼭 성공해야 된다는 억눌림이 있었다.
내가 버는 돈으로는 차비와 식사를 하기에도 빠듯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받은 10만원이 나의 생활비의 전부였다. 차비는 잔돈을 세어가며 살아야 했다.
어느날 잔돈을 세던 차비 마져도 없었다. 그날 따라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분노의 기도를드렸다. '하나님이 내 아빠가 맞다면 먹는 것과 차비는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
'한달에 20만원 필요한데 그거 주시면 하나님 예배 할께요'라고 솔직한 마음을 기도로 내 보였다. 그때가 내 삶에서 처음으로 믿음의 실험을 한것 같다.
그 이후 내가 레슨 자리를 알아본 것이 아닌데 딱 20만원 짜리 레슨 자리가 왔다. 나는 기도한 것은 잊어 버리고 한달에 40만원짜리 학원 강사 자리를 찾아 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찾아 다녔는데 번번히 떨어졌다.
다시 기도해야 겠다는 마음이 왔고 '주님, 나 40만원 필요해요' 라고 기도했다. 주님은 내게 "너는 아빠인 나한테 구하지 않고 네 힘으로 아둥바둥사느냐!" 라고 하시는 듯 했다.
하나님이 내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CCC 활동 할때는 아이들이 모일때 맛있는거 사주고 싶은데 돈이 여의치 않았고 또 돈을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아이들 밥을 먹였다. 그때는 80만원을 주셨다.
돈은 부모님이 주시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이걸 깨달으니 내 마음의 분노가 사라지고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없어 졌다.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 복이었다. 주님과 같이 동행해야 하는데 내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은 내려 놓으라고 하셨다. 그것이 내 주도권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자원해서 깨닫고 내려 놓을때까지 기다리셨다.
매번 똑같은 데서 넘어지다 보니 통과하지 않고는 제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내려 놓겠다고 하나님께 약속드린 것은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시간이었다. "네 시간 네것 아니다"라고 하셨다. 내가 정해 놓은 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것 이라는 인정을 했고 주께서 필요하다고 하실때 언제든 드리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내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써 주시도록 기도했다. 놀라운 것은 일상의 동기가 변했다. 모든 일상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으로 바꼈다.
둘째, 내려놓게 된 것은 음악이었다.
내 마음에 은근한 불안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게 음악을 못하게 하고 선교사로 보내면 어떡하지!'란 것이었다.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음악 안하면 어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올려 드린 내 손에 다시 음악을 돌려 주셨다.
음악의 재능으로 음악을 한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성공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음악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쓰는
가사가 음악을 넘어서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 주의하면서 가다보니 지금껏 곡을 주시고 있다.
곡을 쓰게 된 배경은 일기 쓰기를 좋아해서 였던것 같다. 일기는 내 마음의 힐링이었다. 일기는 기도였고, 시였고, 위로였다.
어느날 시 위에 음을 붙여 보고 싶어졌다. 5분도 안 되어서 멜로디가 나왔다. 한달 동안 30곡을 썼다.
주님을 만나는 것 같은 기쁨! 하늘 사다리가 연결된 것 같았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깊은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주님이 나를 위로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로 하도록 곡을 많은 이들과 나누기를 원하셨다.
복사해서 친구들과 교회 식구들과 나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라는마음이 왔을때 '주님 어떻게 해요?'라고 물을때 음반을 내라는 마음을 주셨다.
음반을 낼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여 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유학가려고 준비했다. 곡을 나누라는 강한 마음을 주셔서 목회자님들께 음반을 내겠다고 예기 하니 내 형편을 아시기에 의아해 하시는 것 같았다.
음반을 위해 유학 자금으로 모아 놓은 돈을 내어 놓으라고 하셨다. 돈에 쫒기고 힘들었기에 유학 자금을 2년 동안 모았었다.
돈을 모으면서 안정감이 들었는데 그것을 내어 놓으라고 하니 안정감이 깨졌다.
새벽 예배를 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음반을 내도록 기도했는데 기도하면 할수록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받기 원하셨고생각해 보니 받기만 했고 주님께 드린게 없어서 주님 손에 유학자금을 올려 드렸다.
히즈윌1집 음반을 10개월 만에 받는 날이었다. 엄마가 갑상선이 있으셔서 모시고 갑상선 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가족력이 있으니 나에게도 검사를해 보라고 하셨다.
검사를 하시더니 혹이 만져지는데 딱딱하고 크다고 했다. 암의 확률이 있으니 조직 검사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히즈윌 음반이 집으로 배송되는 날인데 어떻게 이런 있느냐고 불평도 나왔다.
주님은 내게 "네 건강도 네 호흡도 다 네거 아니고 내거란다"라고 하셨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니 분노가 일어난 것이었다.기도 하면서 내려 놓는 과정을 가졌다.
"내려놓음"과 "순종"의 찬양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짜가 되지 못하기에 가사 같은 삶으로 나를 내려 놓도록 이끌어 가셨다.
히즈윌을 홍보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가끔 사람들을 통해 히즈윌 앨범을 듣고 잠을 잘수 없는 자매가 잠을 자고, 죽고 싶은 절망의 위기에 있던 사람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히즈월을 듣고 교회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했다.
내가 유학을 갔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사람들이 살아 나니 사역에 대한 소원과 열정이 생겼다.
1집이 나오니 돈이 좀 생겨서 2집을 냈고 2집을 내고 나니 돈이 또 생겨서 교회에 그랜드 피아노를 사놓고 싶었다. 교회 사모님께서 그 돈이 내게 꼭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셨다.
생긴 돈으로 대학원을 갔다. 서울로 가면서 나는 내 인생의 두번째 광야를 맞이했다. 돈이 부족해서 먹는 것을 줄이기 시작했다. 햇반 하나를 아침에 절반, 저녁에 절반을 먹을 때였다. 어느날 눈이 뿌해찌고 숨도 차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영양실조라고 했다.
4년을 교제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쪽 부모님이 심한 반대를 하셨다. 나는 위장 장애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내야 했다. 남자 친구는 집안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헤어지자고 했다.
외로운 서울 생활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떠난 후 너무 외로웠다. 몸이 좋지 않아 건강 검진을 했는데 혹이 많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내게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혹을 떼어낼 때 암일 확률이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혼자였고 내 곁에는 가족이 없었다.
전신마취를 할 때도 보호자 없이 내가 동의서를 쓰고 수술대에 누웠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수술 후 눈을 떴는데 서러움의 눈물이 줄줄 흘렀다.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며 다급하게 "많이 아팠지! 내가 다 알아" 라고 하며 경상도 말로 "뭐 주꼬" 라는 마음을 주셨다. 정신이 없는 데도 두가지를 달라고 했다.
하나는 저를 사랑할 남편 주시고 나를 완전히 좋아해 주는 시부모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또 하나는 영감을 주셔서 찬양의 곡을 많이 쓰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짧은 시간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 회복을 경험했다. 나는 병문안 오는 친구들을 유심히 살폈고 두번 온 친구들을 체크했다. 남편감을 찾기 위해서다. 많은 친구들이 다녀갔다.
퇴원후 남은 보험금으로 괜찮은 키보드를 사고자 중고나라를 보았다. 적당한게 있다는 연락을 받고 차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가겠다고 했더니 가는 길에 집이 가깝다고 악기를 갖다 주겠다고 했다.
악기를 주시고는 살펴 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며 음악에 대해 예기를 했는데 3시간을 그분과 대화했다. 이후로 그분이 나의 남편이 되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으로 남편을 집으로 배송해 주신 것이다.
남편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음악을 좋아해서 히즈윌의 아트디렉터로 섬기고 있다. 일을 행하시는게 너무 놀랍다.
시아버님은 내게 꿈에 그리던 며느리라고 하셨고 시어머니는 나를 복덩이라고 했다. 나와 나의 엄마는 너무 놀랐다. 엄마가 나의 결혼식때 환하게 웃으시는 걸 보면서 엄마의 마음까지 만져 주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님은 "이 집에 있는거 다 네꺼다"라고 하셨다. 내가 병상에서 드린 기도를 들어 주신것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묻지 말고 주님께 물으라고 하셔서 주님께 물으며 가라고 해서 순종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나님은 내가 세운 틀을 하나하나 깨셨고 현장 사역을 하기 원하셨다.
일본 앨범을 함께 만들자고 해서 번역을 4분을 거쳐서 했다. 일본 앨범을 내면서 일본 사역이 열렸다.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 찬양을 나누고 싶었다. 주께서 역사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했는데 바이올린으로 연주 앨범을 만들라는 마음을 주셨다.
연주 앨범을 만들어 예수님 안 믿는 형님 드렸더니 너무 좋아서 가사를 찾아 보았다고 하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하시며 얼마 후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었다. 주님께서 믿음의 걸음을 걸어 보라고 하셔서 순종하여 오늘 여기에 나와 나누게 되었다. 모두 믿음의 걸음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Be the proud witnesses of God!"
"하나님의 자랑스런 증인이 되라!"
*기록자:
커넥션교회/HOC선교회 조은경선교사
2021년 다니엘기도회 4일차☆
(온전한 치유와 변화가 있는 회복)
*성경:삼하8:3-6절
*제목:"나의 힘줄이 끊어질 때"
*강사:류응렬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세계 열방의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늘문 여시고 하늘 것으로 채우실 것을 믿는다.생명의 말씀으로 일생에 남을 말씀을 주실것을 믿는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코로나 이전인 BC와 코로나 이후의 AC로 나누었다.이전과 이후 더 나은 일상으로 돌아 가자. 이것은 성경적 일상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니엘 기도회가 시작된 BD와 다니엘 기도회가 끝날 AD의 시기에 있다. 다니엘 기도 이후의 삶이 선명하게 차이 나기를 기대한다
나는 두가지 변화를 기대 한다.
첫째는 신앙의 변화를 기대하고 둘째는
삶의 변화를 기대한다.
우상을 섬겼던 왕들이 다니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체험한 예수를 믿는 삶을 살아 내기를 축복한다.
지금 미국교회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이후 30%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것이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있지만 청교도의 열정이 사라지고 있는 미국이다.
목사가 바이든을 위한 기도에서 마지막으로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아멘으로 마쳤다. 하원 의원회에서도 목사가 또한 그렇게 기도했다.
목사가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대가 이 시대이다. 내가 하원 국회 앞에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고 나오는데 칭찬을 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지금 시대는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사가 박수를 받는 시대이다.
의원기도회 에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니 모든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했다.
왜 수많은 목사님들이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기피하는가? 세상은 예수의 이름을 들려 달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믿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
성경은 다윗의 삶을 두고 반복하는 단어는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특별히 좋아 하셨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면 끝나는 것이다.
다윗은 1,700마리 말 중에 1,600마리의 말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다윗이 왜 그렇게 했을까?
다윗은 여호와가 그의 힘줄이 된 사람이다. 왕이 의존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했다.
사람은 환경을 의지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라고 결심해야 한다.
그 이름이 영광이 되고 삶이 되고 실제가 되는 사람이 되자. 여호와가 나의 힘줄이 되면 세계 열방이 일어나고 코로나를 뚫고 비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힘줄이다!'를 고백하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줄을 끊어냈다.
아브라함의 삶에 힘줄이 되는 것은 이삭이었다. 그는 이삭을 끊었다. 이삭이 살아 났을 뿐만아니라 이삭을 돌려 받았다.
사도바울 만큼 강력한 힘줄을 가진이가 없었다. 그가 예수를 만났을때 그의 힘줄을 끊어 내고 예수의 십자가를 힘줄로 삼았다.
진정한 힘줄을 만났기에 자신의 것을 끊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그 힘줄을 이용해서 복음 전하면 되는데 왜 끊어 내느냐고 한다.
바울은 예수의 힘줄이면 충분했다. 지중해의 영적 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람이 바울이다.
베스도 왕은 바울에게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 고 했다.
예수의 복음으로 힘줄을 삼은 새무열 오스틴 모펫은 "내가 첫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조선 땅에서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리라"라고 했다.
한국 땅의 변화는 일제의 고통 뚫고 예수의 힘줄을 의지하여 일어선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6.25때도 예수의 힘줄이 우리를 이기게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 무엇이 힘줄인가?
한국 교회가 세상이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는데 여전히 유일한 힘줄이 예수그리스도인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진다고 하니 안된다고 했다.예수의 진짜 힘줄을 만나니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었다.
예수의 이름이 있어야 한국교회가 일어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힘줄이 되어 있는가? 목사안수 받을 때 세상 모든것이 사라진다해도 예수그리스도만 전하겠다고 했던 힘줄이 지금도 있는가?
영혼을 향한 목자의 눈물이 새겨 져야 한다. 무엇이 있어야 안정감을 누리고 행복한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힘줄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힘이다.
부모들은 그 힘줄이 자녀들이 되고 있다. 가정이 자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목회 하면서 가슴 아픈 일들이 있다. 심방하면 꼭 묻 는것은 자녀들이 예수님 잘 믿느냐고 묻는 것인데, 안타까운 답은 예수를 떠난 자녀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신앙을 이탈했다고 하는 말을 들을때 가장 가슴 아프다.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는 다녔지만 그들이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예배의 자리로 보내라. 식당은 다니고 지하철은 다니면서 교회는 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우리 부모님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것 같지 않다고 하는 불신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인생의 광야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 가를 보고 있다. 자녀들의 신앙의 방해자가 부모가 아닌가? 부모의 고난의 세월을 보면서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줄이 안되면 다른 것이 힘줄이 된다. 하나님은 배경으로 우리를 결정 짓지 않는다. 예배자의 삶을 가르치라. 고난을 뚫고 승리하는 믿음을 보여주자. 하나님의 기대만큼 꿈을 꾸는 자녀들이 되게 하자.
인생의 지휘봉을 누구에게 맡기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해 드는 지휘봉이 되기를 축복 한다.
나의 고향을 농촌이었다. 어린시절 초가지붕에서 살았고, 창호지 문으로 찬바람을 막고 살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호롱불 켜고 살면서 촛불 켜는 것이 소원이었다. 전기가 들어오니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남의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들키면 주인이 리어카를 빵꾸내 버린다. 빵꾸난 리어카 끌고 다니며 나무를 해야 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늘 열등 의식과 비참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 힘쓰며 살았다.
무엇을 하든지 잘하는 것이 나를 견디게 하는 힘이었고 부모님께 쌀밥을 잡수시도록 성공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주님은 내게 "너는 소중한 아이다" "그렇게 뛰어 다니지 않아도 돼! 너 하나로 족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후부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로워진 인생이 되었다.
자녀들의 가슴에, 인생에, 예수그리스도를 심어주고 채워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힘줄로 삼았던 다윗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인구수를 세는 것이었다. 다윗의 힘줄이 하나님에서 군사력으로 옮겨 졌을때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로 인해 7만명이 죽었다.
다윗같은 사람이 무너질 수 있다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박사 공부를 신속하게 마쳤다. 빨리 공부를 했던 이유는 선교지에서 삶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선교지 가보니 풀 타임이 아닌것 같아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공부를 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늘 공부에 메달린 나를 하나님은 제속에 오셔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면서 해야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소홀히 하고 공부를 마친 후에 친밀하게 보자고 말씀드렸다. 바쁜 와중에 인도 친구가 아파서 약국을 갔다와야 해서 자동차 시동을 걸으니 기름이 거의 떨어진 터인지 시동이 안걸렸다. 급하게 기도하니 응답이 되었는지 시동이 걸려서 약국을 다녀왔다
주일이 되어서 교회 가려는데 시동이 안 걸걸렸다. 또 기도하는데 시동이 걸렸다.
가끔 이런 응답이 있더라...웃음
가다보니 설교 하려고 하는 설교 원문이 지난 주 거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가 원고를 가지고 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데 안 걸렸다. 또 다시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는데 시동이 걸렸다.
신호등을 지키면 시동이 꺼질까봐 모든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렸다. 2천명 되는 미국교회서 설교하고 나오니 차가 시동이 아예걸리지 않았다.
기름이 떨어진 차가 마치 내 모습인것 같았다. 겉으로는 멀쩡한 차인데 기름이 없어서 나가지 못하는차!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게 아닌데 논문때문에 밤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지 못하는 것이 죄송해서 학교로 가서 한참을 기도했다.
월요일 도서관에 가서 노트북을 열었는데 노트북이 죽어버린 것이다.그동안 써 놓은 논문이 날아가 버렸다. 아예 복구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그때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생각하니 하늘의 평강이 왔다.
기도실로 가서 '빨리 마치려고 뛰어 왔는데 하나님 죄송해요.' 라고 기도하며 평강을 찾았다. 남은 2틀 만에 새로 논문을 썼는데 그렇게 빨리 끝내게 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논문을 제출하고 돌아 왔는데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논문으로 장학금을 주는 단체에 내 논문을 내니 천만원이 넘는 상금을 주었다. 내것을 지우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쓰신 논문이었다.
인생의 최고의 힘줄이라도 그것은 연약한 것이다. 모든 힘줄이 끊어질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힘줄이 되어 주신다.
기도할때 고난을 이겨낼 힘을 주실것이다.
힘줄이 끊어진 분들이 있는가? 인생을 전부 드려서 목회를 했는데 결과가 없는 분이 있지 않는가?
한 명의 영혼을 귀하게 여긴다면 괜찮다. 힘의 원천이 하나님 이라고 믿는다면 희망이 있다. 하나님이 하신다.
목회자란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목사님! 하나님이 아십니다! 다시 일어나십시오. 우리도 목사님과 함께 있습니다'
모든 힘줄이 끊어졌다고 할때 하나님을 봐야 한다. 9,600개의 교회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사회 현상적 위기를 뚫고 진짜 힘줄이신 하나님께만 엎드려야 한다.
교회가 살아날 줄 믿느냐? 기도가 힘줄 임을 믿는 다면 땀 흘리며 구해야 한다. 그냥되는 일이 아니기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모세가 든 지팡이, 다윗이 든 물맷돌의 힘은 모두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었다.
베드로는 어부 였지만 성령을체험하고 드렸을때 그를 통해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십자가의 복음은 강단에서 쏟아져 나와야 한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5만3천개의 미국 교회 가운데 역경을 뚫고 성장한 우리 교회가 13번째 교회가 되었다. 이전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이원상 목사님이시다.
이 목사님은 기도하는 목사님이셨고,
매주 수요일 마다 금식으로 기도 하셨고, 매월1.2.3일은 금식으로 기도 하셨다.
목사님은 두가지를 놓고 늘 기도하셨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도와 달라는 기도였고, 영광의 낯빛을 비춰 내도록 기도하셨다. 두번째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였다.
사람들이 보면 성공한 목사님인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인공호흡기로 연명하셨는데 병문안 갔더니 손에 무언가를 써 주셨는데 그사람 이름이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쓰셨는데 Spirit 이 아닌 "Sprite" 를 쓰시고는 사이다 마시고 싶다고 하셨다. 돌아가시기 2틀전에 사이다 마시고 싶다고 하셨다.
그분도 연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눈물이 났다. 목사님을 세우신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다. 미천한 나를 통해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 달라고 기도했다.
미국에서 목회할 생각이 없는 나에게 후임으로 와 달라고 하셨다. 나는 교수로 있는게 좋았기에 기도 한번 해 보라고 하셔도 별 신경을 안썼다.
두주나 석주 지나면 또 전화가 왔다. 기도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아니라고 하는데 계속 전화가 왔다. 나는 금식에 들어갔고 배만 고프지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교수 생활을 내려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내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것이 내 인생의 모토였다. 어떤 말씀하시든지 순종하겠다고 하니 주님은 내게 "네가 목자가 아니냐"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최고이다.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열심히 뛰어 다녔다. 목회를 하면서 늘 목회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나에게 주님이 찾아 오셔서 "누구의 힘으로 목회를 하는가?"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후로 매주 목요일은 기도원으로 올라간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목회를 하리라.'
나의 힘줄을 끊고 하나님의 힘줄을 받으라. 하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땅의 화려한 것을 찾아 다니지 않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줄을 우리 때문에 끊어 내셨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를 통해 구원의 역사 이루셨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는 33살에 나를 위해 십자가 지셨다.
예수님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면 덤으로, 은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아직 33살 이전의 젊은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품고 달려나가라.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주님의 심장을 주신 것이다. 주님의 피가 내 피가 되는 것이다. 기도할때 주님이 일하심을 믿는 다면 기도하라.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기 전에 복음으로 시대를 깨우는 자가 되라. 맡겨 주신 영혼을,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이 맡기셨음을 알라.
구령의 열정으로 살아낼때 수 많은 이웃교회를 깨워낼 것이다.
한국교회가 비상하게 되면 오대양 육대주에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십자가의 증인이 되라. 그때에 주님께서
"너는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다.네가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리라. 잘했다. 충성된 종아! 내가 외치고 싶은 복음을 네가 전해 주어서 고맙다 종아!" 라고 하실것이다.
"Be the proud witnesses of God!"
"하나님의 자랑스런 증인이 되라!"
*기록자:
커넥션교회/HOC선교회 조은경선교사
2021년 다니엘기도회 6일차☆
(온전한 치유와 변화가 있는 회복)
*성경:롬9:1-3절
*제목:"인민군 선전원에서 하나님의 선전원으로"
*강사:이옥선교사(유니티미션선교회)
☆손풍금 연주(예수사랑하심은♡)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나는 20여년 전 현역으로 탈영하여
총신대학을 졸업했다.
현재는 미국에서 남편과 함께 콜링을 받아서 탈북자들을 섬기고 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연결시키는 UMI선교회의 일을 하고 있다.
북한의 2천5백만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되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나는 1998년 북한에서 탈영하여 남한으로 왔다. 나는 북한에서 선전동원으로 일했다. 김일성의 명령을 군인들과 장병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김일성에 대한 새 노래를 보급하고 동계나하계 훈련을 할때 "그대들의 안녕은, 그대들의 건강은, 조국의 건강이다"라고 외치며 동원하는 일을 했다.
부모님은 두분 다 열성당원 공산당이었다.
어려서 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김일성 초상화 닦는 일을 떨면서 했고 밥먹을때 감사 기도를 김일성의 이름으로 했다.
학교를 갈때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라는 말을 외치며 길을 걸었다.
학교에서는 김일성 따라 배우기를 매일 공부하며 날마다 칼날같은 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사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살았다.
1994.7.8 김일성이 죽은날이다. 나는 총을 메고 현장에 있었다. 소대장 사모들이 맨발로 나와서 오열을 했다.
나는 설마 하다가 김일성의 죽음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절도하고 말았다.
절도한 이유는
첫째,수령은 이렇게 죽는 분이 아니다. 해와 달이 바껴도 존재하는 분이 수령인데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절도한 두번째 이유는 수령이 죽으면 우리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배급은 수령이 준다고 외쳤는데 수령님이 죽으니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릴것인가?
내가 절도하자 충성심으로 알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최고 사령관 김정일의 표창장을 받았다.
김일성이 죽고서 300만의 아사자들이 생겼다. 북한은 선군정치, 군 제일주의 였기에 다 죽어도 군인은 살수 있도록 배급했다.
군인들은 강냉이 밥이라도 먹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굶어 죽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1998년 2월 중순에 군부대로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언니 세 식구가 죽은지 4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와서 사인을 확인해야 뭍는 다고 했다.
상황파악이 안되었다. 부모님 뵈러 간 현장이 탈영이 되었다. 시신들이 하나 같이 거의 똑 같았다. 그런 시신은 처음 보았다.22살 나이에 시신이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다.
부모 시신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집단 매장을 시켰다. 이제 묻히면 부모를 볼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숨통이 막혔다.
굶어 죽었다는 것이 적어도 보름, 20일 동안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판 뜯어먹고 풀을 뜯어 먹고 돌아 가셨다고 전해 들었다.
식구들 죽어 가는 것도 모르고, 내 가족을 굶어 죽게 한 것이 나 자신인것만 같았다.
충성스런 내 부모를 이렇게 죽게한 당과 수령을 위해 더 이상 일할 수 없었고 배신감이 들었다.
그나마 살아 있는 16살 남동생은 먹지 못한 결과 앉아서 걷지도 못했다. 내 책임
덩이로 느껴져 동생을 들쳐 업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가다가 죽자고 생각하고 탈영을 했다.
아버지 고향인 중국 도문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동생을 메고 아무것도 안먹고 3박4일을 걸으니 바닥이 났다.
삶을 포기하려고 할때마다 산물을 내셔서 살려 주시고 웅덩이 때문에 군 보급차가 식량을 싣고 가다가 떨어뜨린 것을 주워
먹고 살아났다.
2월 중순에 떠난 것이 3월 초순에 두만강 앞까지 왔다. 3월초 얼음을 깨고 넓고 깊은 대로 뛰어 들었다.
숨을 쉬겠다고 허부적 거린것 밖에는 기억이 안난다. 물에 젖은 군복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업고 왔던 동생이 없어져 버렸다. 살겠다고 허부적 거리다보니 동생이 등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두만강에 동생을 떠내려 보내고 나니 동생이 목적이었는데 그 목적이 없어지니 살고 싶지 않았다. 물가에서 정신없이 동생을 찾다가 그만 실신을 했다.
눈을 떠 보니 조선족이 나를 데려다가 링거를 꼽아 살려냈다. 친척을 찾아 왔는데 누구 누구라고 예기하니 친척들을 찾아 주었다.
진수성찬으로 대접해 준 친척들이 고마웠다. 정신이 몽롱했고 넋이 나간듯 하니 삼촌이 아코디언을 가져와서 쳐보라고 하며 잘 치니까 이것으로 돈을 벌며 살라고 했다.
다른데 정신을 집중하니 살아졌고 슬픔과눈물을 꿀꺽 삼키며 살았다.
어느날 멀쩡하고 매끈한 남자가 나타나 "자매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남한에서 온 목사님이셨다.
남북을 갈라 놓은 것이 김일성이라고 하며 김일성 부자는 6.25를 일으킨 악한자라고 했다.
나는 군에서 때려 잡아야 할 것들이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군단 그리고 기독교도 들이라고 배웠다.
나는 목사님께 내 손에 죽지 않은 려면 가라고 하며 소리쳤다. 목사님은 "정신차리세요. 자매님! 지나날에는 김일성을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사십시요. 예수를 영접하십시요" 하면서 기도하면서 김일성을 섬긴 죄를 용서 해달라고 하며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로(방언기도)
한참을 기도했다.
물리적 행사를 해서 그분을 쫒아 버렸다. 다음날 그분은 또 오셨다. 그때부터 다섯달 내내 나타나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소리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나 죄인아니라요. 도둑질 한번 해 본적 없어요.'
목사님은 "예수께서 자매님의 죄를 위해 옆구리에 창을, (머리에 가시면류관을)쓰셨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시며 찬양 테이프를 많이 가져다 주셨다.
찬양 테이프중 윤영순 테이프가 내 18번이 되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 발" 가사 보다는 멜로디가 좋았다. 그 멜로디가 북한에서 유명한 영화 주제곡이었다.
잊을수 없는 날은, 어느날 중 무장한 경찰이 나타났다. 차에 싣고서 나를 끌고 갔다. 동네 사람이 나를 밀고 한 것이다.
듣자 하니 곧 북송 된다고 했다. 북송 되면 나는 죽는 것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 믿지 않았지만 삼촌 고모들이 나를 구해줄 것을 믿었다.
삼촌 고모는 점심 시간까지 기다리는데 안 나타났다. 나를 꺼내려면 돈이 많이 드니 아빠의 친동생들 이었지만 안 나타났다.
삼존 고모가 이제 이놈들이 되어 버렸다. 복수심과 분노에 너 죽고 나 죽자가 되어버렸다.
끌려 가기 전에 그들을 죽이겠다고 소리치며 철문을 박으니 피투성이가 되었다. 피를 보고 나니 갑자기 힘이 다 빠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가 결심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할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니 맘대로 하셔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얼마나 아프셨나 라는 멜로디를 읊조리고 있었다. 가사에 관심은 없었는데 가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매님, 예수님이 자매님을 사랑하세요. 예수님은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고 죽으시며 자매님을 사랑하셨습니다" 라고 했던 목사님의 얼굴이 왔다 갔다 했다.
찬양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 좁은 공간 안에 복수심은 사라지고 공간 안에 무언가 꽉 찬 것 같았다.
나 말고 또 다른 인격이 그 안에 있었다. "두려워 떨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며 안아 주셨다.
5개월 동안 내내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영접하지 았았던 그 이름을 불렀다. '예수님 살려주세요~ 예수님 살려주세요~ 나를 살리실 분이 예수님 밖에 없어요'라며 흐느꼈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불가학력적인 목소리에 '맞습니다.내가 죄인입니다.'를 고백 했다.
놀라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다. '목사님 잘 못했어요. 목사님 보고 싶어요'라며 한참을 울었다.
김일성 부자를 위해 일했던 모든 시간들을 회개하고 방언의 은사까지 선물로 받았다.
2시가 되자 나를 끌고 갔다. 탈북자들이 살려 달라는 소리에 때리고 묶고 짐승 취급을 하며 끌고 갔다. 도적질도 한게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가서 죽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억울했다.탈북자도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마음껏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게 아니라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이송차에 탔는데 연락병이 와서 국장님이 한마디만 더 물어보고 따라 보낸다고 하며 나를 남으라고 했다.내가 현역군인 이어서 국장 방으로 끌려 온 것이었다.
국장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위 아래를 쳐다보는데 이상했다. 국장의 얼굴을 보니 눈알이 빨개지면서 생김이 자기 딸과 똑 같다고 했다.
나이도 22살 똑 같다고 하더니 국장이 나를 끌어 안더니 어쩌다가 이런 일을 당했냐고 하며 아빠가 가슴 아파 죽겠다고 했다. 뭔지모를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철장 안으로 들어가 잠을 깊이 자고 맑은 정신에 눈을 떠 보니 그림자가 나타 나더니 내 족쇠를 끌러 주고 데리고 나갔다.
천사를 통해 베드로의 옥문을 연 사건이 똑같이 재연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국장이었다. 너도 살고 나도 살려면 여기다가 전화를 해라. 전화해서 가보니 그곳에 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선교사님의 보호를 받으며 훈련받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었다.
"누나~
하나님이 살려주셨어~
누나 만날 때까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했어~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나와 동생에게 영육의 구원함을 주셨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72년 동안 남.북한은 분단되어 있다. 한반도 복음 통일을 완성해야 할 책임이 한국교회에 있다.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가지고 제2.3의 다니엘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Be the proud witnesses of God!"
"하나님의 자랑스런 증인이 되라!"
*기록자:
커넥션교회/HOC선교회 조은경선교사
2021년 다니엘기도회 7일차☆
(온전한 치유와 변화가 있는 회복)
*성경:히브리서 4:14-16절
*제목:"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양하며 가리라"
*강사:지선전도사
(건신대학원 대학교 교수)
☆찬양~주의 은혜라
"주의 은혜라 ~
내 평생 살아온길 주의 은혜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주의 은혜라 다함이 없는 사랑~
나는 공로 전혀 없도다~
오직 주의 은혜라~"
찬양하고 간증할 때에 아픈곳들이 치료될줄 믿는다. 어지럽히던 모든 문제들이 감사로 바뀌는 회복의 시간이 되게 하실 줄 믿는다.
나는 9년 전에 찬양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지금은 다양한 기독교 방송에서 일도 하고, 찬양 인도학과 주임 교수로도 일하고 있고, 넌크리스챤을 위해서도 일하고 있고, 클래식 해설도 하고 있다. 뮤지컬 음악 감독도 하고 있다. TV 미스터 트롯에도 나왔다. 다양한 음악 장르의 일을 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이렇게 살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삶이 시작이 되었다.
15살부터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20여년 전 15살때 서울에서 살고 있다가 아빠께서 풀루티스트 였고 KBS관현악 단의 수석 단원으로 계시다가 다혈질의 성향으로 그곳에서 나오셔서 혼자서 3개의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계셨다.
아빠의 일을 위해 엄마는 공장을 다녀야 했다. 어느날 자고 있는데 너무 시끄럽다가 조용해 져서 깼는데 엄마가 피투성이 되어서 눈 코 입이 다 들러 붙어서 숨을 몰아 쉬며 변기 위에 앉아 계셨다.
그때부터 아빠를 미워했다. 엄마는 아빠의 의처증 때문에 3일 이상 너무 많이 맞으셨다.
엄마가 집에서 나가는게 내 소망이었다.
내가 보지 않을때 집을 나가도록 말씀을 드렸더니 진짜 내가 안볼때 집을 나가셨다.
나는15살 때부터 엄마 없이 자라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부자인 친척집으로 동생과 함께 보내 졌다.
큰 집이 잘 사는 곳이라 먹고 살수는 있겠지 했다. 큰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 뭐가 없어지면 나에게 모두 훔쳐 갔다고 하셨다. 안그래도 슬프고 외로웠는데 도둑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너무 억울했다.
대전 학교에서는 서울에서 전학 왔다고 왕따를 시켰다. 집에 오면 큰 아버지 아들이 "나가" 라고 써 놓았다. 교복만 빨려고 하면 불을 꺼버렸다.
자주 맞았고 그곳은 지옥 같았다. 밥을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그때 맞은 것이 1년 동안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이질 장티푸스에 걸렀고 그때 후유증으로 너무 심해서 난청이 왔다. ^^고개 한번 숙이면 피가 거꾸로 차오르니 걱정할 건 없다.^^
맞고 못 먹고 사랑을 못 받고 병원에도 못가고 배고픈 때였다.
고등학교를 겨우 들어 갔는데 한분이 나를 발견하셨다. 바로 음악선생님 이셨다. 나를 작은 교회로 데리고 가셨는데 친구분이 교회 사모님이 셨는데 어려운 학생 있으면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큰 집 몰래 교회 사모님께 성악을 배우게 되었고 대학교에 붙었다. 왜 붙었나 봤더니 선생님은 나를 위해 일천 번제를 드리며 기도해 주셨고 무료로 레슨을 해 주셨다.내 하나님은 없지만 선생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엄마 없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늘 웃고 다녔다.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나는 바나나 우유를 사먹으려고 카드를 만들어서 현금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큰 아빠 등본아래서 내 이름을 파내는것이 소원이라 방 한칸을 얻어서 그렇게도 소원인 큰 집에서 나가서 살았다. 생활비를 대출 받다 보니 건강의 문제 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돈이었다. 돈이 목을 조여오니 감옥 갈것 같았다.
학교를 휴학 하려던 차에 성적표를 받았는데 4.5가 나왔다. 감리교 대학이라 신학까지 있었는데 교수님들이 모두 A+를 주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교수님 앞에 앉아 있다 보니 성실하다고 보고 점수를 주신것 같다.
한 교수님이 성실해 보인다며 방세를 물으시더니 몇달치 주셨다. 한 교수님은 베를린에서 성악을 하도록 기숙사에 연락을 해주시고 한 교수님은 유학준비를 위한 진로의 과정을 밟아 주셨다.
티켓을 받아 들고 큰집 앞을 지나 가다가 처음으로 인생의 뒤를 돌아보았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사실 한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 관계가 끊어졌고 나는한국에서 살면 안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생의 뒤를 돌아보니 어느날 부터인가 코피가 안 나오고 있고 늘 위와 장이 꼬여 응급실을 갔는데 언제 부터인가 병원을 안가고 있었다.
대전역에서 자고 엄마를 찾아서 서울 갔다가 거짓말하고 몰래 만나고 돌아오곤 했는데, 내 손에 비행기 티켓을 들고 있는데 처음으로 기적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은혜라는 글자가 남의 것이 아닌 내것이 되었다. 내가 은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선생님의 하나님, 목사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가? 라는 마음이 왔고 은혜를 주셨음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새벽예배를 가서 한번은 뜨겁게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하고 싶었다. 새벽예배를 가서야 하나님은 진짜 나의 보호자 이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도 내가 잘못하면 떠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가지 마세요라며 7일 작정으로 하다가. 20일,40일,100일,365일이 되었다. 그때 알게 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은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셨다.
1년의 작정을 마치고 나오는데 장로님이 유학 안갔으니까 시립 합창단에 와서 접수를 받으라고 하셨다.
월급을 받으면서 노래를 하는 곳이 시립합창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로님이 원서를 써보라고 권유 하셔서 썼더니 1차에서 붙었다.
새벽예배를 계속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시험봐야 할 시간은 다가 오는데 시험곡이 나오지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악보 두장이 뚝 떨어졌다. 이걸로 시험을 보라고 하나보다 하고 하이 소프라노를 불렀다. 하이소프라노가 어찌나 부드럽게 잘 나오는지..합격을 했다.
시립 합창단은 9급 공무원이었다. 적금을 넣고 내집을 내돈으로 월세집을 마련했다. 가스렌지와 냉장고를 사고 기름진 음식을 샀다. 내 맘대로 꺼내 먹고 추우면 보일러를 트는데 눈치를 안보고 트는 내집,
더우면 선풍기를 강약으로 내 맘대로 조절하는 집이 있었다.
처음으로 감옥에서 쇠사슬을 풀고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다.
27살에 교회에서 영적인 분을 만났다.
교회 드럼치는 오빠가 나한테 결혼을 하자고 했다. 3개월 연애 끝에 그분과 결혼을 했다. 오빠는 유명한 사람들의 드럼을 치고 있었다.
오빠에게 세상에서 드럼치는 것을 그만 두고 하나님을 위해 드럼 치면 어떻겠냐고 하니 감사하게도 그렇게 하자고했다.
합창단 월급으로 4식구가 사는 가난한 신혼 생활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을 보시고 엄청난 선물들을 주셨다.
2011년에 아이들이 5살, 2살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들고 유학을 가려고 뒤를 돌아 봤던 똑같은 느낌이 드는 상황이 일어났다.
그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솟아났는데 하나님이 보고 싶었다. 2011.6월에 하나님을 좋아하는 방법이 무얼까? 하나님을 볼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하고 믿음의 선배들을 보니 손에 성경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말씀 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성경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창세기를 쓰다가 태초에 하나님이 먼지 같은 나를 위해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필사를 하다가 까만 글씨로는 필사를 하고 파란 글씨로는 아이들에게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데 하나님은 엄청난 분이지!' 필사를 하면서 40일 작정기도를 했다.
진짜 축복을 주시라고 필사하면서 기도제목을 쓰고 매일 헌금을 준비했다.
성경을 필사하다가 안보이던 글자가 눈에 들어 왔다. 예전에는 고난이라는 이야기를 설교에서 들으면 닫아 버렸다. 축복만 받고 싶어 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성경을 필사하다가 진짜 축복이 무엇잇지 알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그때 만나는 고난을 나에게도 달라고 했다. '고난을 주세요' 라고 기도하며 40일 작정을 또했다.
사람의 언어로 쓰는 것이 진짜 축복의 단어로 '고난을 주세요' 라고 했던 것이다.
아프면 만져 주셨고, 성전문 앞에 불이 있었는데 그 불이 이글거리며 타더니 내게 돌진해 온 것을 보았다.(환상)
수많은 일들이 계속 있었고 두명의 아이들이 감기로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병원에서 자고 씻고 출근을 해야했다. 이게 고난을 만나고 축복이 오는 줄 알았다.
이제 아이들이 퇴원하는 날 엄마에게 전화해서 와 달라고 했다. 엄마가 내려와 주셨다. 첫째를 씻기고 둘째를 씻기고 있는데 설겆이를 하던 엄마가 비명을 지르셨다.
아이가 있는 방이 시꺼먼 연기로 가득했고 아이는 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이는 온 몸을 젖은 상태로 젓가락 두개를 한꺼번에 220v에 집어 넣어서 감전사가 되어 버렸다.
아이를 두들기며 깨웠는데 안 일어나더니 까맣게 변해갔고 빵 터지는 소리와 함께 대소변이 쏟아져 나오면서 눈을 떴는데 신경을 건드리고 갔는지 웃었다가 울었다가 수십가지의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119에 전화해서 아이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신고를 했다. 220볼트에 젓가락 두개를 꼽아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라고 하셨다. 가슴에 스크러치가 나 있고 혈관이 다 터져 있었다.
소독만 하는데도 아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간호사들도 울었다. 대전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서울로 왔다.
하나님 이게 뭐예요? 라고 물어도 아무 답이 없었다.
전기가 관통했기에 뇌가 손상이 된줄 알았다. 뇌는 이상이 없지만 열 손가락 신경관절이 다 끊어진 것 같다고 했다. 이식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썼던 필사들이 하나로 뭉쳐진것 같았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자에게는 이것이 저주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마음이 왔다. 말씀은 어떤 상황과 환경이 와도 끝이라고 한적이 없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 말씀으로 응답을 받았다.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심병원에 머무르라는 응답으로 받았다. 은찬이 한테 고통이 있다면 반으로 줄여 달라고 기도했다.
은찬이의 손의 뼈가 부셔지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후~하고 부니까 뼈가 바스러졌다. 마른뼈는 생기가 없으니까 날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마른 뼈와 같이 느껴져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은찬이의 남아 있는 뼈 3%를 살리기 위해서 몸 이곳저곳에서 이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진을 다 찍었다. 필사를 하면서 감동을 받고 있었기에 질병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나도 성경의 사람들 처럼 단을 쌓고 싶었다.
사진을 찍어 그것을 계속 보게 하시고 일기를 쓰고 다녀간 사람들을 다 써 놓았다.
열이 안 떨어지고 링거를 꼽을데가 없었다. 병원안의 목사님이 찾아 오셔서 "세계방방곡곡을 다니는 찬양 사역자가 되리라"고 예연적 말씀을 하셨다. 화상 환자들 앞에서 찬양하라고 하셨다. 갑자기 이찬양이 떠 올랐다.
☆찬양~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가운데 주님 찾아 오셔서 그나라 꿈꾸게 하시네~"
찬양을 하고 눈을 떴는데 화상 환자들이 다 일어나서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찬양할 수 없는 가운데 찬양하면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나타나서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다.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보았다.
국장님께 전화해서 내가 영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국장님은 아이가 아프니 돌았냐고 하셨다. '저의 무대는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이 앉아 있는 곳인것 같으니 사직서를 받아 달라'고 했다.
나는 은찬이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독을 2틀에 한번 하는데 하루는 금식을 하고 하루는 전신마취를 해야했다.
10번째 전신마취제 놓을 때는 싸인을 하라고 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은찬이가 "엄마"라고 부를 때면 가슴이 두근 거렸다. 아이가 "엄마 나 혼자 수술실에 안 들어갔다. 예수님과 천사들 4명이 침대에 있었다"고 말했다.
은찬이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은찬이가 아니라 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환상) 자격지심에 외롭다고 예기 했는데 그때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던 말이 믿어졌다.
믿어지기 시작하면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내 안에 노래하는것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자신감이 생겼다.
은찬이 얼굴이 아빠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돈 없을때 돈달라고 하고 엄마 만나지 말라고 머리채를 흔들고 갔다. 그런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병원에서 나가면 아빠를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전신마취제를 또 맞았는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은찬이는 "엄마! 나는 소풍을 온것 같애. 금식하기 전에 하루종일 엄마와 함께 있잖아. 이게 소풍인데!"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것 같았다. 성령님과 함께 하면 인생은 소풍이구나! '은찬아! 소풍처럼 있다가 천국가자'
소풍같은 인생에서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도 소풍이고 존귀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해줄게 없다고 퇴원하라고 했다. 우리 은찬이는 늘 웃었다. 왜 웃느냐고 봤더니 내가 은찬이 앞에서 늘 웃고 있었다. 믿음의 선배가 울어 버리면 하나님의 존귀함이 물거품이 될까봐 웃었다.
의사 선생님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학교도 다니면 안된다고 계속 주시하라고 했다.
☆찬양~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새롭고도 놀라운 일이 지금 이시간 일어났네. 바로 이시간 일어났네.바로 이교회에 일어나네~" 아멘~
뼈가 보이는 채로 대전에 내려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핫바를 먹고 싶다고 했다.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이 까딱했다. 간지러워 하더니 핫바를 잡고 먹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놀래서 빨리 재활을 하자고 했다. 12월에 오른손을 찢어주는 수술을 하자고 했는데 엄청 심한 아트피를 주셔서 얼마나 긁었는지 손가락을 맞춤으로 찢어 주었다.
유황가루를 물에 풀어서 씻을 정도로 아토피가 심했는데 어느날 긁던 아이가 왼손까지 살아났다.
눈으로 봐야 응답이 아니었다. 붕대로 가려 졌을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고 응답임을 알았다.
은찬이의 연약한 네번째 손가락! 이게 뭐냐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이거 뭐예요?'
성찬식을 하는 가운데 알려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3일 만에 무덤에서 나오셔서 제자들에게성령의 시대가 올 것이고 주님 다시 오심을 알려 주신것과 같다는 감동을 주셨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주님은 내게 "걱정하지마. 나의 작품이야! 은찬이의 연약한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붙들면 은찬이는 강력해진다. 눈에 안보이는 상처, 눈에 보이는 상처는 크리스챤에게는 상처가 아니야!"
이것 때문에 십자가를 붙들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남편을 통해 음반을 만들게 되었다. 1집 음반이 나오기 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어떻게 나를 용서하냐?라고 하셨다. 울고 있는 아빠가 전화를 끊고 2시간을 울었다. 23년을 한번도 쉬지 않으시고 일하신 하나님 너무 감사했다.
광신도라고 하던 엄마와 아저씨도 교회를 나가셔서 영접기도를 하셨다. 주일에 복수가 차셔서 아저씨는 돌아가셨다. 천사들이 데리고 가는 것을 엄마가 봤다.
엄마와 아빠 우리가족이 23년만에 한상에서 밥을 먹었다.
고난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것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아빠를 만나고, 이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서 음반이 나오기 전에 가정에 회복을 주셨다.
언제나 문제는 터지지만 소풍처럼 살자.
인생은 성령님과 함께하고 있다.
결핍을 은혜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양~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https://youtu.be/K0O_jl7Lz7U
아무리 마른뼈 같더라도 인생을 회복시켜 주신다. 내가 가는 곳이 빛났으면 좋겠다.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소풍/ 찬양비디오 꼭 보세요.
https://youtu.be/LCWouAbaHfs
"Be the proud witnesses of God!"
"하나님의 자랑스런 증인이 되라!"
*기록자:
커넥션교회/HOC선교회 조은경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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