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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의『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비판
-정이철의 책은 비성경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주장의 집합체이다-
어지간하면 넘어가려 했다. 누구나 비판의 자유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순수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미명 아래, 한물간 엉터리 신학으로 ‘백호주의자’나 ‘나치’처럼, 성령운동이 말하는 모든 성령체험을 사탄의 소행으로 몰고 가는 정이철 같은 극단주의자가 한국 교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 책에 대해 골수 중지론자인 서철원 박사와 이승구 교수가 우호적인 서평을 썼다는 자체도 문제가 많다.
서철원 박사는 오늘날 신자들이 사도행전적 성령충만을 받아 사역하는 것을 “비성경적 성령세례는 접신체험”라고 폄하한다.1) 이승구 교수는 “개혁파적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중생이 성령세례이다’”라는 전통적 견해를 고수한다.2)
존 맥아더는 얼마 전 『다른 불』(Strange Fire)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은사운동은 사탄의 소행이므로 이에 대해 전면전을 치르자’는 광기(狂氣)를 발했는데3) 정이철이 그 본을 닮아가는 것 같다. 정이철도 은사주의자들을 사탄 숭배자들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과연 정이철이 말하는 대로 사도행전적 성령충만을 받아 사역하는 교회가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이고, 서철원 박사의 말처럼 이런 체험이 “비성경적 접신체험”이고,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개혁파적”이란 수식어만 붙이면 모두 성경적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 셋의 주장이야 말로 “비성경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엉터리 주장”이다. 개혁주의자들 중에서도 웨인 그루뎀, 존 파이퍼, 새무얼 스톰즈 등은 물론 한국의 차영배 박사, 김명혁 박사 및 이한수 교수 등과 같은 기적계속론적 개혁주의자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구원성령세례와 능력성령세례를 다른 것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정이철의 잘못된 주장
정이철의 잘못된 주장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1. 신자는 모두 중생하여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다(고전 12:13). 그러므로 성령을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
→아니다. 정이철은 ‘구원의 성령’과 능력의 ‘성령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2.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 사건이므로 성령이 다시 오시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오순절 성령강림 단회론).
→아니다. ‘오순절 이후에도 하나님은 계속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주장은 성경에도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증거한다.
3. 성령은 인격체이시지 에너지나 기운이 아니다.
→아니다. 성경은 ‘인격적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을 동시에 기록한다. 서선서는 주로 구원의 성령, 사도행전은 주로 일하시는 성령에 대해 기록한다.
4. 성령은 조용히 역사하시므로 요란스럽게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아니다. 성령은 조용하게도 역사하시지만(요 3:8), 요란스럽게도 역사하신다(행 2:4; 4: 31 등).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은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에 의해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때문이다.”
이후 기적중지론자들은 요란스럽게 야단스러운 현상이 나타나면 모두 가짜 이거나 마귀의 소행으로 간주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후자에 관한 기록은 성경 도처에 많다(행 2:4; 4:31 등).
더군다나 조지 휫필드, 요한 웨슬리, 조나선 에드워즈가 주도한 부흥기는 물론 요즈음에도 성령 사역 현장에는 이런 현상들이 자주 일어난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성령의 임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독특한 영적, 신체적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지지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오른쪽 배너 : 쓰러지는 현상 변호,” 『글로리아타임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22&view_type=sm
5.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아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독특한 길을 걸어갔지만 동시에 우리의 본보기이다. 그러므로 안수를 통해 은사를 임파테이션(나누는 것) 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구원의 성령’과 ‘능력의 성령’의 구별을 부인하는 정이철
『미국·캐나다 교회 연감 1990-96』에 보면 의미 있는 통계가 나온다. 이 연감은 지난 30년간 여러 교단의 교세 증감을 기록한 책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요한의 물세례는 상징이고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는 동일하게 구원을 받는 성령세례라고 해석하는 기적중지론적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등은 교세가 감소했다.
그러나 두 가지 성령세례를 구분하여 비록 구원받는 성령세례를 받았더라도 능력받는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해석한 남침례교단의 일부, 오순절계통이나 은사주의 계통의 교단은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후자의 해석을 따르는 은사주의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지만 전자의 해석을 따르는 교회들은 쇠퇴 일로에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성장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후자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물론 정이철은 전자의 입장이다.
그는 ‘구원의 성령’과 ‘능력의 성령’의 차이를 모르고 모르니까 부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중생할 때 구원의 성령을 한 번 받으면 되는 것이므로(고전 12:13). ‘능력의 성령’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탄 숭배자들로 몰고 있다.4)
(인용)(*모바일 독자를 위해 직접 인용의 경우, '인용' 및 '인용 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 진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보다 기독교 신앙에 더 심각하게 해를 미치는 것은 그릇된 성령사상이다. 성령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더 신비하게 이야기하고. 더 진지하게 사모하고, 더 많이 체험하고 있으나, 사실은 성경의 하나님을 모조하는 사탄에게 깊이 붙들리게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것이 바로 비성경적 성령세례 이론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령 재세례 사상이라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을 받고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성전’(고전3:16)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이 또 반복적으로 들어오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영혼이 거듭난 일반 신자들이 ‘구원의 성령’을 받은 상태라고 하고, 이후에는 ‘능력의 성령’을 또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주시는 성령이 들어오시고 난 후 능력과 부흥을 주시는 성령이 또 오시고 반복된다는 것이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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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세례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앙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빗나가면 결국 하나님으로 위장하는 사탄과 접속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인가? 하나님으로 가장하는 마귀인가? "의 갈림길로 우리를 인도하게 된다. 마귀는 하나님의 진리의 인치심을 받지 못하는 허술한 영혼에게 교묘하게 다가가서 마치 자신이 진짜 하나님인 것처럼 위장하여 침투해 들어간다. 그래서 거짓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을 모셨다고 하나 사탄의 영을 받고서 비극적인 사탄숭배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저주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인용 끝)
이런 주장의 근간에는 정이철의 신학적 사부인 서철원 박사의 잘못된 주장이 깔려있다. 서철원 박사는 다음과 같이 잘못 주장한다.
(인용)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예수 믿는 자들은 다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이런 근본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오순절파는 사도들과 제자들 백이십명이 오순절에 성령 받은 것에서 중생 후 성령세례의 도식을 행 2:1-4에 근거시키고, 또 이 본문이 이 신학을 증명해 준다고 한다……… 2) 삼천 명과 오천 명의 첫 그리스도인들(행2 : 3 7-42 : 4: 1-4). 예수 믿으면 동시에 성령을 받음이 바른 구원 과정이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정하게 하사 곧 중생케 하시고 그들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5)---------------------------------------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들의 개종, 로마인들의 개종, 요한의 제자들의 개종 사건에서 오순절의 반복을 주장한다 (James DG Dunn, Jesus and the Spirit 19782, pp 136-146참조) . 또 현금 오순절파의 부흥운동에서 성령 받음을 오순절의 반복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은 성령이나 지금 우리가 받는 성령이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한번 파송되어 온 후 교회와 함께 영구히 계시지 (요14:16), 하늘로 가셨다가 청구하면 또 오시는 것이 아니다. 또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도 한번 오시면 영구히 계시지 떠나가셨다가 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방신들의 세계에나 있는 것이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
오순절에 강렴하신 성령이 3천명에게로 거처를 확대하실 때 (행2:41) 하늘에서 다시 파송받아 오신 것이 아니다. 당일에 오셨던 성령이 많은 무리가 예수 믿어 성령 받을 때 다시 하늘에서 내려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액체에 비유하는 오순절파의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고,현대 신학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정신 혹은 감화력으로 말하는 데서나 가능하다. 성령이 감화력 있는 액체나 공기이면 그렇게 계속적으로 하늘로부터 반복해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방식으로 인류에게 오시지 않는다.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사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6)
(인용 끝)
과연 그런가?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이미 중생했다(요 15:3).
-베드로는 오순절(행 2:4), 이후 여러 번 하나님의 주권적으로(행 4:8), 또는 간구하여서 성령충만을 받았다(행 4:31).
-바울도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충만을 받고(행 9:17; 13:9), 이후에 또 받았다(행 13:9).
또한, 사마리아나 고넬료 가정에서는 성령이 내려오시고 부어졌다(행 10:44-45).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4-17).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 10:44-45).
이처럼 명백한 성경 기록에도 불구하고 서철원 박사는 “성령도 한번 오시면 영구히 계시지 떠나가셨다가 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어디로 가셨다가 또 내려오셨고, 한번 부어진 성령이 어떻게 또 다시 부어졌는가?
서철원 박사의 주장대로 라면 성경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서철원 박사의 주장대로 하면 사도들은 거짓 성령세례를 통해 접신체험을 한 사람들이고, 정이철의 주장대로 성령을 구하여서 반복적으로 받았으므로 사탄 숭배자들인가?
-경험적 해석과 논리적 해석
서철원 박사와 정이철은 자신들이 성령 세례의 의미를 서신서의 구원의 성령의 의미로 잘못 해석해 놓고 은사주의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것을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도리어 나무람을 이르는 말’ 즉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뭐라고 변명하는가?
“아, 그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도들에게만 일어난 독특한 사건들이지 교회 시대의 신자들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기적을 행한 것은 성경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기적으로 증거된 완성된 성경이 있으므로 더 이상의 기적은 필요가 없다.”
서철원과 정이철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왜 이런 핑계를 대고 오류를 범하는가?
건전한 성령 체험, 기적 체험이 없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성령과 능력의 성령, 서신서의 성령과 사도행전의 성령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성경을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고 반문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기록이고, 성경의 기적은 전설이나 신화이며, 예수는 ‘구세주’가 아니라 공자나 석가와 같은 ‘도덕적 모범’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기적중지론적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은 인정하고 예수는 구세주라고 인정하지만 교회 시대의 기적은 부인한다.
이처럼 건전한 영적 경험이나 기적 경험이 없으면 자신의 인간적인 경험이나 인간적인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수백 년에 걸쳐서 자신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교한(?) 기적중지론을 개발해 왔다. 정이철이 주장하는 가짜 성령 세례 주장도 그런 주장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라 표적과 기사는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주장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이 급조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자기들의 무경험을 바탕으로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잘못 결론지은 후, 성경의 기적 관련 구절들을 무시하거나 영해(靈解)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내용을 졸저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에서 기적중지론자들의 잘못된 신학이나 논리를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참조하기 바란다.
-제임스 던과 존 스토트의 아류들
정이철은 왜 그런 틀린 주장을 할까?
사도행전의 ‘성령세례’와 서신서의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는 제임스 던7)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는 서철원 박사8)의 주장 및 존 스토트9)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제임스 던의 주장은 한때 기적중지론적 개혁파들을 매혹시켰다. 상당수의 기적중지론적 개혁파들이 아직도 제임스 던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제임스 던의 주장은 심각한 반론을 받아서 지금은 거의 사장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철원, 이승구와 같은 골수 기적중지론자들이 아직도 용도 폐기된 제임스 던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고 정이철이 행동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던의 구체적 오류가 무엇인가?
첫째, 제임스 던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위한 예비적 준비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제임스 던은 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자라도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받아야 중생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박영돈 교수10)가 이런 주장을 따른다. 그러나, D. A. 카슨11)이나 차영배 박사12)는 요한의 물세례를 통해서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둘째, 제임스 던은 서신서가 말하는 성령 세례와 사도행전의 성령 체험을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다. 제임스 던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성령 세례를 ‘회심·입문’(Conversion·Initiation)으로 해석한 후, 이런 의미를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와 성령 받는 것에 대입시킨다.
던은 오순절의 경험은(행 2장) 물론 사마리아인(행 8장), 고넬료 집안(행 10장) 및 에베소교회의 성령 경험을(행 19장) 모두 회심·입문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그들이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하고(행 2장),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고(행 8장), 방언을 하고(행 10장),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장)고 기록하는데, 던은 이런 것은 언급도 하지 않고 그들이 성령을 받아서-성령세례를 받아서-회심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만 강조한다.
성령 체험이 없으니까 구원성령세례와 능력성령세례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른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저 사람 미쳤다’고 할 때, 문자적으로 미친 사람일 수도 있고 무엇에 열심인 사람일 수도 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또한, 영혼 구원, 칭의, 영생은 단어는 다르지만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제임스 던은 성령 체험이 없으니까 성령 세례를 구원의 성령이란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하여 다른 의미인 능력의 성령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서철원, 이승구, 정이철도 동일한 오류를 범한다.
다음의 두 구절들만 비교해 봐도 성경은 성령세례를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0:15-17).
고전 12:13의 성령세례는 분명히 ‘구원의 성령’을 말한다.
그러나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은 베드로가 성령세례라고 표현했는데 이때는 구원+능력의 성령세례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순절 이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베드로와 120문도에게 임한 성령은 능력성령세례이자(행 1:5), 동시에 능력성령충만이다(행 2:4).
누가의 성령(능력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구원의 성령)의 차이
사도행전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야전전투교범이고 서신서는 내무생활규범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외적 능력을 받은 사도와 동역자들이 방언을 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교회성장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도모하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서신서는 이런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신학적, 관계적, 윤리적 문제를 다룬 책이다.
성령의 사역을 구분할 때, 사도행전은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Ministerial and Experiential)을 다루고 서신서는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을 다룬다.
전자는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 , 후자는 인격적인 성령(Holy Spirit as Person), 전자는 사역과 관련된 성령의 외적 능력, 후자는 구원과 관련된 성령의 내적 능력을 다룬다.
그런데 제임스 던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실제적 성령체험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 인격적인 성령으로만 이해한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여 성경 시대의 특수한 인물이나 사도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간주하고 교회시대 신자의 본보기가 아니라고 잘못 해석한다.
그러므로 정이철 같은 중지론자들에게는 서신서나 요한복음의 성령 개념만 있을 뿐, 구약이나 사도행전이 말하는 체험적 성령, 일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알 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바울의 성령, 요한의 성령 및 누가의 성령의 독특성과 차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백석대의 최갑종 교수는, 공관복음서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지만 저자의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듯, 성령도 바울의 관점만이 아니라 요한과 누가의 관점별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인용)
그 이유는 저자의 개성이 다르고,독자도 다를 뿐만 아니라 작품이 강조하는 의도와 목적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마태의 입장에서,마가는 마가의 입장에서, 누가는 누가의 입장에서 보고 그들의 강조점과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론과 관련하여 신약성경 전체의 통일된 체계를 붙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령론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누가, 바울, 요한 등 각 저자들의 입장을 그들 자신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주경학적으로 파악한 다음 그 위에서 교의학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 자신들의 역사적 상황에 돌아가서 왜 그들이 성령론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지, 그들의 성령이해와 그들 작품의 구성과 강조점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 독자들과의 관련성은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선입관이나 전 이해를 성경본문으로 가져가 채색하는 위험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을 것이며,성령론 문제와 관련된 현금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인용 끝)
총신대의 이한수 교수도 ‘바울의 성령’과 ‘누가의 성령’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14)
(인용 )
바울의 성령세례 개념은 이미 우리가 지적한 대로 누가의 개념과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누가의 성령세례 개념은(행 1 : 5) 오순절날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충만의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들이 받은 성령세례는 그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구원론적 경험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계속 실현시키게 하는 성령의 능력의 경험, 즉 요엘이 약속한 예언의 영의 경험이다. 반면에 바울이 말하는 성령세례는 처음 회심/구원 경험과 관련이 있다.
결론적으로 쓰인 용어가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누가의 언어와 바울의 언어가 의미론적으로 동일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바른 주석학적 접근이 아니다.
바울서신에서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중생 이후에 존재하는 제 2의 성령 경험이 있다는 시사가 없다.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충만의 경험일 것이다(엡 5 :18). 그러나 그것은 제 2의 축복이 아니고 신자가 회심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생활에서도 계속 경험해야 할 경험이다.
(인용 끝)
이처럼 일반적으로 바울의 성령은 ‘구원의 성령’이고 누가의 성령은 ‘능력의 성령’이다.
은사운동의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기적중지론자들이 선호하는 ‘바울의 성령론’에서 이제는 ‘누가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다.15) 이전에는 누가를 단순한 ‘역사의 기록자’로 간주했지만 이제는 바울과는 구분되는 ‘성령 신학자’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서철원과 정이철은 아직도 케케묵은 골동품 신학에 고착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의미
정이철과 같은 중지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2:13가 말하는 성령세례를 중생으로 해석한 후, 신자는 믿을 때 모두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으므로(갈 3:2), 더 이상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순절파들은 중생한 신자라도 능력 받고 방언하는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눅 11:13; 행 1:5; 2:4)고 주장한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중생을 성령세례, 중생과 동시에 또는 그 이후에 받는 성령체험을 성령충만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성령충만도 사도행전(행 2:4; 4:8,31 등)에도 있고 서신서(엡 5:18)에도 있다.
사도행전의 성령충만은 과거형으로서 방언하고 외적 능력을 받는 능력성령충만을 말하고, 서신서의 성령충만은 현재(진행형)으로서 삶의 열매를 말하는 성화(생활)성령충만을 말한다.
그래서 두 가지 성령 세례와 두 가지 성령충만을 잘 분석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도 문맥 중심의 성경 해석을 강조하고, 원어 분석을 좋아하는 기적중지론자들이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해석을 하지 않는다.
둘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잠시만 앉아서 원어 분석과 문맥 중심의 해석을 해 보면 두 가지 성령 세례와 두 가지 성령 충만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용어 정리 :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참조 : 기적중지론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기적중지론과 성령세례 논쟁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82
그런데 정이철은 건전한 성령 체험이 없기 때문에 바울의 성령과 누가의 성령의 차이점을 모른다. 정이철은, 능력성령세례와 능력성령충만은 모르고 구원성령세례와 성화성령충만만 언급하면서, 능력성령세례(오순절파)나 능력성령충만(은사주의자)을 받아서 방언하고 능력행하는 것을 사탄의 소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한때,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중생 이후에 오는 제2의 축복 체험이며, 성령세례의 초기의 신체적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여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성령운동이 기존의 교단에 퍼지면서-이를 은사운동이라고 한다-이 교리가 다소 수정되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체험은 중생과 동시에 또는 이후에 할 수 있으며 (구원)성령세례-중생-이후 능력의 성령을 반복하여 다시 받는 것을 (능력)성령충만이라고 불렀다. 성령 체험의 초기 증거도 방언은 물론 여러 가지 다른 현상도 나타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구속사적 성경해석, ‘성경완성 중의 임시적 현상’이라는 기적관의 오류
정이철은, 또한, 사도행전이나 구약에 기록된 선지자나 사도들의 능력 행함은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여 ‘계시 사건,’ ‘독특한 사건’이니 하면서 교회시대 신자들의 본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중지론자들은 걸핏하면 ‘구속사적 해석’을 들먹이면서 자기들에게 은사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하고, 오히려 성경 대로 능력을 받아서 사역하는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되었다고 그릇되게 비판한다.16)
(인용)
그러나 특별계시가 진행되고 있었던 사도행전의 시대와 완성된 특별계시인 신구약 성경으로 신앙생활하는 지금 이 시대의 신앙 방식이 같을 수 있겠는가? 특별계시의 수납자였던 바울 사도와 다른 사도행전의 인물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특별한 방법이 어찌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대입될 수 있겠는가?
(인용 끝)
사도들에게 나타난 기적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주장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약방 감초처럼 애용하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자기들의 전통을 성경과 동격에 두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과 일부 극단론자들의 직통 계시를 부인하기 위한 신학-성경의 충분성, 계시 종료론-인데 요즈음에 와서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성경 완성과 기적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이 조작해 낸 신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목적이나 동기
하나님은 성경 기록과는 상관이 없이 다양한 동기와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출 14:4; 요 11:4; 행 3:12-13 등),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요 3:2; 9:32-33 등),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고전 2:4; 고후 12:12; 히 2:4; 롬 15:18),
-복음 전하는 자에게 따른 표적으로(막 16:17-18),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마 12:28 등),
-불쌍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마 4:14; 15:32 등),
-믿게 하기 위해서(출 14:31; 왕상 18:39; 요 2;11; 7:31 등),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마 8;5-10; 9:1-2,22,27-29; 행 14:8-10),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왕상 17:1-16; 17-24; 18:41-46 등),
-기도의 응답으로(약 4:2하; 5:14-16).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목적이나 동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성경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서 사도들과 관련자들을 통해서만 특별히 기적을 행하셨다’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 주장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자신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기적의 은사를 구하지 않는 핑계나 변명에 불과하다.
‘구원의 성령’과 ‘능력의 성령’
결국 정이철은 '성령 세례는 구원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17)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구원 사역만이 진짜 성령의 사역이고, 구약이나 사도행전에서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외적 능력을 받아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에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는 것은 가짜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한다.
물론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눈에 보이고 체험 가능한 능력으로 그것을 증거하신다.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이것의 차이를 모른다.
서철원이 이러한 전통적인 기적중지론적 성령론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정이철이 인용한 서철원의 잘못된 주장을 보자.18)
(인용 )
이미 알려진 불건전하고 참 신앙을 오도하는 그릇된 성령세례 주장대로 구원 받은 자에게 다시 능력을 주시기 위해 임하는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다, 죄인이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그 믿음에 근거하여 죄를 사해주시고, 더불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을 따라 성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요 14: 16)이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의 목적과 결과는 죽은 영혼의 다시 살아남이다. ………성경적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왜곡하는 여러 종류의 신비적 잡설이 널리 퍼졌다. 성령세례를 바르게 이해하고서 믿는 사람들은 늘 얌전한데.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옛말처럽 성령세례에 대한 그릇된 잡설을 믿고 그런 종류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늘 떠들면서 요란하다. 불행히도 교회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요란한 사람들이 많고, 또한 목회자들이 신학적으로 무장되지 못해 그런 불건전한 자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성경적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거짓된 물결과 사상이 현대의 교회들을 쉽게 농락하는 것이다. 거짓된 성령세례 사상을 가지고 장난하는 마귀의 역사가 보통이 아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그릇된 일들이 ‘성령’, ‘성령세례’. ‘성령체험’이라는 개념으로 얼버무려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령의 세례가 무엇인지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 더욱더 바르게 가르쳐야 할 필요는 언제나 넘친다.
(인용 끝)
이런 주장이야 말로 기적중지론자들의 전형적인 오류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중생-칭의-양자됨-성화-견인-부활과 같은 '구원의 서정'을 경험하고 이루어가지만 동시에 외적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구원사역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자가 위에서 잠깐 밝혔듯이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이 야전전투교범(사도행전)과 내무생활규범(서신서)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3가지 방법으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3가지 존재 방식/역사 방식
피조물은 동일한 시간에 한 장소밖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3가지 방식으로 존재하고 역사하신다.
• 편재 또는 무소부재(Omni presence).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렘 23:24; 시 139편 등). 이 때문에 신자는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
• 내주(Indwelling presence). 믿는 자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 부드럽고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이다. 기도를 도우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찬양할 때 마음을 적시고 따스한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11, 15; 고전 6:19; 요 14:20; 요일 3:24; 4:3). 이런 성령은 신자 안에 영원히 거주하시면 신자의 구원을 도우신다(요 14:16-17, 26; 고전 6;19; 갈 4:6; 약 4:5 등)
대부분의 전통적 교인들은 하나님의 편재와 내주에 대해서는 알지만 또 다른 양식인 임재 또는 현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성경에는 있지만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지도 않고 체험도 드물기 때문이다.
• 임재 또는 하나님의 현재(Manifest presence). 경험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고전 2:4; 12:7).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처럼 나타나시기도 하고(출 3:2),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지만(출 3:2; 수 5:13-15), 많은 경우 지진, 뇌우, 번개, 폭풍과 같은 현상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한다(출 13:21). 오순절 성령강림 때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행 2:2-3).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현재’(顯在) 또는 현현(顯現)(manifestation of God 즉 theophany)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 체험은 하나님의 현재 체험 또는 임재 체험이기도 하다.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임하여 하나님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육체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중지론자들은 자신들의 무경험으 바탕으로 하여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부인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성령의 임파테이션
정이철은 “성령 세례를 유도하는 안수”19)에서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비판한다.
정이철은 성경이 말하는 안수는,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고(행 19:6; 8:17), 선교사와 집사를 세우고(행 6:6; 13:3; 딤전 4;14) ,특별계시의 방편으로 안수했다고 주장한다(행 9:18,; 28:8-10; 예수님의 안수 등).
물론 이중에서 직분자를 세우는 안수는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행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증한다’거나 ‘특별계시의 방편으로 안수했다’는 해석은 구속사적으로 사도들만이 이렇게 안수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물론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 본 받을 수 없는 독특한 길을 걸어갔지만 동시에 교회 시대 신자들의 인격과 사역의 본보기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기적중지론자들은 전자의 해석에 치중하고 기적계속론자들은 전자는 물론 후자의 해석도 수용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안수를 통해 기적을 행하고 성령을 받게 한 것처럼 교회 시대의 신자들도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름부음 사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보기 바란다.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93☞왜 쓰러지는가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9☞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40
정이철의 변태 방언관 비판
정이철은 또한 이창모의 ‘변태 방언관’을 성경적 방언관인 것처럼 착각하고 인용하고 있다.
이창모의 엉터리 방언관에 대한 비판은 『글로리아타임스』의 “방언이란 무엇인가?”20) “방언기도의 비밀”21)이나 졸저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를 참조하기 바란다.
‘인격적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
정이철은 인격적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을 구분하지 못한다.22)
(인용 )
중생과 더불어서 성령의 세례가 임하고,이후 성령의 세례가 더 반복되어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성경 이해가 꼭 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성령 이해의 심각한 문제는 성령 하나님의 인격성을 크게 훼손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어떤 힘,에너지 기운이나 되는 것처럼 오해되게 한다. 성령이 양적으로 더 많아져 신자의 의지와 마음을 압도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이라는 설명은 호흡을 통해 우주의 기를 더 많이 받아들인다는 동양사상과 같은 내용이다. 불행히도 로이드 존스가 성령충만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그런 요소가 발견된다.
(인용 끝)
이런 잘못된 주장은 서철원 박사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서철원 박사는 이렇게 잘못 주장한다.23)
(인용)
성령은 한번 파송되어 온 후 교회와 함께 영구히 계시지 (요14:16), 하늘로 가셨다가 청구하면 또 오시는 것이 아니다. 또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도 한번 오시면 영구히 계시지 떠나가셨다가 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방신들의 세계에나 있는 것이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3천명 에게로 거처를 확대하실 때 (행 2:41) 하늘에서 다시 파송받아 오신 것이 아니다. 당일에 오셨던 성령이 많은 무리가 예수 믿어 성령 받을 때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액체에 비유하는 오순절파의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고,현대 신학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정신 혹은 감화력으로 말하는데서나 가능하다. 성령이 감화력 있는 액체나 공기이면 그렇게 계속적으로 하늘로부터 반복해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방식으로 인류에게 오시지 않는다.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사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
(인용 끝)
성령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시지만 성경에서 실제로 사용될 때는 인격적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으로 구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고든 피는 성령을 인격이나 사역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24)
즉 인격적 성령(The Holy Spirit as Person),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 as God’s Presence) 및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의 성령(The Holy Spirit God’s Empowering Presence)이다.
인격적인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임재로서의 성령은 ‘내주하시는 성령’이고, 성령의 임재로서의 능력은 ‘일하시는 성령’이다.
E.W. Bullinger는, 신약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모든 단어를 분석하였다.25)
특히 그는 성경에 프뉴마가 ‘정관사+프뉴마’(호 프뉴마)와 ‘무관사 프뉴마’(프뉴마)로 사용된 경우를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전자는 인격적 성령, 후자는 일하시는 성령,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도행전(행 1:5; 2:4 등)이나 고린도전서(고전 12:7-11; 14:12)에서는 ‘무관사 프뉴마’가 ‘일하시는 성령’으로 사용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리하면, 성경도 ‘인격적인 성령’과 ‘일하시는 성령’, 즉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을 ‘인격적인 성령’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인간적이고 신학적인 편견이지 성경의 기록이 아니다.
정이철이 예로 든 다윗에 임한 성령과 에베소서 5:18이 말하는 성령은 다르다.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다윗에게 임한 성령은 능력과 사역을 위한 ‘일하시는 성령’이고 에베소서 5:18이 말하는 성령은 ‘인격적이고 성화를 위한 성령’이다. 전자는 사람의 외부에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으로 임하여 소기의 사역을 한 후 떠나는 성령이지만 후자는 사람 안에 내주하면서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령을 말한다. 26)
그런데 정이철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니까 ‘이게 저런 기능을 하고 저게 이런 기능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만 제기한다.
물론 은사주의자들이 성화성령충만을 소홀히 한 점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적중지론자들이 성화성령충만을 더 많이 받아서 신앙생활에서 더 나은 본을 보이고 있는가? 성화성령충만을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별개이다.
한국에서 대형 사고를 치는 목회자 중에는 은사주의자들 보다 기적중지론을 주창하는 예장 계열에서 더 많다. 가을 총회장 부정선거, 예장 노회에 만연한 교회 강탈, 논문 표절 목사, 성 추행 목사, 공금 횡령 목사들 중에는 정이철의 친정 교단 목회자들이 훨씬 더 많다. 입으로만 바른 교리를 주창하면 뭐 하나. 제대로 살지 못하면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은가?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에 대한 정이철의 잘못된 비판
정이철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부흥 현상을 변호하고, 부흥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다시 반복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27)
(인용 )
로이드 존스가 오순절 신학으로 무장하고서 성령운동을 벌이는 불건전한 자들에게 만만히 여겨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중생한 신자들에게 능력과 부흥을 주시는 성령의 세례가 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부흥을 성령의 부어짐,즉 성령의 추가적인 강림이 곧 부흥이라고 설명하였고,쓰러짐 등의 신체적인 반응이 성령의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고, 거짓 방언과 거짓 예언에 대해 길을 열어주는 모호한 노선을 취했고,특히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지주 언급하고 강조하여 비성경적인 성령의 기름부음 사상을 핵심으로 삼고 등장한 빈야드-신사도 운동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되었다.----------------------------------
성령의 부흥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이런 사상은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다시 반복된다고 가르치는 오순절 운동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오순절 운동 신학은 빈 물동이에 바가지로 물을 자꾸 퍼부어서 물이 채워지고 흘러넘치게 되는 것처럼,이미 중생케하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더 성령을 부으시므로 부흥과 성령충만이 나타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부흥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더 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던 로이드 존스의 부흥 사상은 오순절 운동 신학과 노선을 같이 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부흥 이론은 성경적이지 못하며, 특히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달라서 개혁교회에서는 수용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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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더 받아서 부흥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신자에게 오신 성령이 더욱 풍성하게 다스리시고 인격적으로 지배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부흥을 이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성령을 더 부어주심으로 부흥이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무력해진 장난감 로봇에게 더 강한 새 배터리 (battery)가 장착하여 활력을 주는 이치,즉 물질세계의 에너지 법칙과 같은 수준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격하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오순절 운동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식인데, 로이드 존스도 같은 방식으로 성령의 부흥을 설명하였다.
(인용 끝)
성령은 오순절을 통해 한 번 강림한 것이고 그 이후는 그 성령이 활성화 된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저수지 이론과 기적중지론자들의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정이철은 이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서철원 박사의 잘못된 주장을 인용하는 것이다. 서철원 박사는 정이철 책의 서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28)
(인용)
적당한 조건들을 이행하여 성령세례를 다시 받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로이드 존스 목사가 같은 주장을 하여 한국교회가 그릇된 성령세례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크게 도왔습니다.
(인용 끝)
과연 그런가?
서철원 박사는 신자들이 성경 기록에 순종하여 ‘사역의 성령’, ‘능력의 성령’을 구하여서 받는 것을 “적당한 조건들을 이행하여 성령세례를 다시 받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29)(눅 11:13).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은사)을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이처럼 성경은 능력의 성령, 성령의 은사들을 간절히 구하라고 명령한다.
은사주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과 은사를 구하고 받아서 사역을 잘 하고 있다.
그런데 서철원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이런 성령을 구하는 것은 적당한 조건들을 이행하는 것이고, 이런 성령의 능력을 구하여서 사역하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계속 성장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사역을 위한 능력의 성령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의 서정'과 관련된 성령만 알고 있으니가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차영배 박사의 비판들
총신대 신대원장·학장을 역임한 차영배 박사는, 아브라함 카이퍼, 제임스 던, 리차드 개핀, 존 스토트, 서철원, 이승구 및 정이철 등으로 이어지는 ‘저수지 이론’과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성’에 대해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30) 차영배 박사 저서에 실린 논문 제목만 훑어봐도 서철원이나 정이철의 주장을 반대하고 비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안은 페이지
“II.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A. Kuyper(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와 그 문제점”(29).
“XI. 성령 강림을 위한 기도의 타당성을 부인한 A. Kuyper의 견해 비평”(같은 책, 283)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여 교회라는 ‘저수지’에 고여 있으므로 더 이상 성령 강림은 필요 없다는 카이퍼의 주장에 대해, 차영배 박사는 저수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계속하여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주장한다.
III.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에 관한 R. B. Gaffin(리차드 개핀) 교수의 견해와 그 문제점”(59).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이며, 이후의 사마리아나 고넬료 집안에 내린 성령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확장이나 연장이라는 주장에 대해, 차영배 박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단회적이라는 주장은 120문도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VII.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관한 J. Stott(존 스토트) 견해와 그 문제점”(같은 책, 201).
신자는 중생과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은 자이므로(고전 12:13),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와(행 8장) 에베소 교인들이(행 19장) 중생과 시차를 두고 성령을 받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존 스토트의 잘못된 성령관을 비판한다.
이처럼 서철원이나 정이철의 주장은 동일한 총신대 교수들로부터도 비판 받는 주장들이다.
물론 총신대 출신들 중에서도 성령 사역을 적극적으로 펼쳐가는 목회자들도 많이 있는 반면 정이철처럼 죽기살기로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대세는 기적계속론 쪽이고 서철원과 정이철의 무리들은 소수자로 전락한 것 같다.
합신대 교장을 역임한 김명혁 박사도 한 번 채워진 성령은 계속 오셔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31)
(인용)
한국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오순절적 성령운동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보수주의 또는 개혁주의적 성령론이 함께 존재해왔는데, 이와 같은 성령론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현재적인 체험적 요소를 지나치게 위험시해왔다. 그러나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이 절대적 표준으로 말씀을 강조한 것은 크게 공헌한 일이다. 물론 거기에도 문제점이 내포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개혁주의 성령론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강조했는데,단회성 보다는 오히려 독특성을 강조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그리스도 오심의 단회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한 번 오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더 충만히 오신 것처럼, 한번 오신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오시고 더 충만히 오신다.
우리는 성령의 존재와 사역이 어떠한 하나의 신학적 체계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체험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바울은 평생 그리스도를 더 충만히 알기를 소원하며 기도했다. 성령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 여야 할 것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충만히 채우시옵소서!
(인용 끝)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D.A 카슨은 성령 세례를 지나치게 ‘전문 술어화’ 하여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자들의 편협함을 책망한다.32)
(인용)
“성령 세례”라는 말은 어떤가? 은사주의자들은 경험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회심 후 일어나는 성령의 넘쳐흐름(effusion of Spirit)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한편, 일부 반(反)은사주의자들은 고전 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을 묵상한 후에는, 은사주의자들과 동일한 잘못을 저질러서, 이 말을 신약성경에서 모든 신자들이 회심 당시에 받는 성령의 넘쳐 흐름으로 간주한다.
불확실한 고전 12:13의 구문구조(syntax)로 인해 문제가 복잡해지지만, 최악의 문제는 양측이 (그 단어를)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진 전문용어로 취급하는 가정 때문이다. 그러한 견해들을 지지할 증거가 불충분하며, 이러한 가정들 때문에, 구속의 전진에 있어서의 한 단계에 대한 참조들로써 조심스럽고 공평하게 취급되어야 할 긴박한 필요성이 있는 다섯 인용절들(passages)(사복음서에 각각 하나 및 사도행전에 하나씩 인용되어 있는 “예수는 성령 세례”를 주신다는 말)을 취급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청교도들은 어떠한 극단적인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라는 구(phrase)를 일관성 있는 전문용어로 택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며, 그들은 그 말이 “성령이 넘쳐흐름(effusion in Spirit”, 또는 “성령에 잠김 (inundation in Spirit)”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부흥을 위해서, “오, 우리에게 새롭게 성령 세례를 주옵소서!”라는 의미로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인용 끝)
이처럼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중생하면 받는 성령 세례(구원의 성령)와 능력 받는 성령 세례(능력의 성령)를 구분하며, 성령은 위에서 계속 임하여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서철원의 주장대로 하면 이들 모두가 비성경적 접신체험을 강조하며, 이미 받은 성령을 또 받으라고 주장하는 사탄의 하수인들인가?
예수를 주로 시인한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았으므로 성령을 다시 받거나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실존적인 경험과 모순된다. 이들의 주장대로 신자는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왜 성경에 기록된 것과 다른가?
성령 세례를 받은 초대 교인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였으며,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기쁨과 활기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오늘의 신자들은 과연 그런가? 오히려 초대교회보다 더 완전한 성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분이 분명히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인가?
차영배 박사는 성령 세례란 말의 오해와 혼용으로 인한 실천적인 결함을 예리하게 지적한다.33)
(인용)
만약 성령의 세례를 중생(좁은 의미)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되면, 겉 잡을 수 없는 불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 교인들은 순진하여 성령의 세례를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아직 중생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용 끝)
정이철과 같은 중지론자들은 이미 성령이 임하셔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활성화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성경에는 위에서 새롭게 임하거나 부어주신다는 표현이 더 많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지금도 성령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차영배 박사는 서철원이나 정이철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도 예수님이 계속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강조한다.34)
(인용)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라는 말씀도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름부음을 주시는 분이다(요1:33).
그는 언제나 항상 기름을 부으신다. 이것은 명령보다도 더 강한 말씀이다. 기름부으심 곧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무이다……… 보좌 우편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에 선성의 충만이 넘치고, 일곱 눈 곧 일곱 영이 그에게 있어, 이 영을 온 세계에 보내시며, 누구든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쏟아 부으셔서,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신다. 믿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값없이 생수를 마시면, 그 배에서 기쁨의 강물이 넘쳐 흐른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곧 성령이 충만하게 넘친다.
(인용 끝)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차영배 박사는 기적중지론자들이 말하는 저수지는 교회나 성령 받은 신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한다.35)
(인용)
저수지는 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따라서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 내리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놀랐다. 이것은 자기가 다만 말씀을 증거한 것뿐임을 보인다. 성령이 자기 몸을 통해 고넬료 가정에 흘러 내려갔다면 그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자신은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다만 놀랄 뿐이었다.
성령은 항상 성부와 성자에게서 오신다……………동서교회가 성령이 “성자를 통해서도”(Filioque. 필리오케)라는 한마디 때문에 나누어진 것을 우리는 안다……다만 우리가 확실히 또 강력하게 주장할 것은 성령이 성자 예수를 통해서 오신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의 목적이 바로 성령으로 세상을 충만케 하는데 있다고 성경은 확언한다(엡 4:10).
(인용 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3절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적으로 나오신다고 기록한다.
(인용)
“성부는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으시고, 나지도 않으시고, 나오지도 않으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적으로 나시며(요 1:14, 18, 요 17:24),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적으로 나오신다”(갈 4:6, 요 15:26).
(인용 끝)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단회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의 명백한 기록은 물론 자기들이 준수한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자체를 어기는 자들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지금도 하늘에서 성부와 성자를 통해 신자와 교회에 강림하신다. 물론 이런 성령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도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주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은사)을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은사주의자들이 능력을 받고 은사를 받는 것은 서철원이 잘못 주장하는 것처럼 무슨 조건을 충족시켜서 받는 것이 아니다.
기록된 말씀 대로 순종하여 사모하고 구하니까 받는 것이다.
이런 성령은 ‘구원의 성령’이 아니라 ‘능력의 성령’, ‘사역의 성령’이다. 서철원, 이승구 및 정이철은 이 차이를 똑 바로 인식하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정이철의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는 영적 침체에 빠진 한국 교회를 살리기 위한 대안도 아니요 윤리도덕적으로 나태해진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도 아니다.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살리시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행하시는 성령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일부의 기득권과 화석화된 교리를 고수하기 위한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인 광기를 담은 책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이런 함량 미달의 책에 절대로 현혹되지 말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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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
1) 정이철, 『가짜 성령에 빠진 교회』 (GNP BOOKS, 2015), 2-3.
2) ibid., 4-5.
3) John MacArthur, Strange Fire (Nelson Books, 2013), xvii.
4) 정이철, 『가짜 성령』 , 10-11.
5) 서철원, 『성령신학』(총신대학출판부, 1995), 91.
6) ibid., 83-84.
7) James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SCM Press, 1970).
8) 서철원, 『성령 신학』.
9) John R.W. Stott(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사역: 세례·충만·열매·은사』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10)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IVP, 2011), 199.
11) D. A. Carson, Matthew,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Zondervan, 1984).
12) 차영배, “요한의 세례와 중생 및 성령의 세례,”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도서출판 지민, 2008), 171-99.
13) 최갑종 ,『예수•교회•성령-누가와 바울의 성령론에 관한 연구』(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14-15.
14) 최근에 ‘누가의 성령’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William P. Atkinson, Baptism in the Spirit: Luke-Acts and the Dunn Debate (Pickwick Pub., 2011);
Darrel L. Bock, A Theology of Luke and Acts: God’s Promised program, Realized for All Nations (Zondervan, 2012);
Joel B. Green, The Gospel of Luke, NICNT Sixth Impression ed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7);
Howard M. Ervin, Spirit Baptism: A Biblical Investigation (Hendrickson Publishers , 1987).
_____________, Conversion-Initiation and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Hendrickson Pub., 1985).
I. Howard Marshall, Luke : Historian Theologian (New Testament Profiles) (IVP Academic, 1998);
-------, Witness to the Gospel: The Theology of Act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8);
Roger Stronstad,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 Luke (Baker Academic, 1984).
15) 정이철, 『가짜 성령세례』, 15.
16) ibid., 10-83.
17) ibid., 52-53.
18) ibid., 141-200.
19) “방언이란 무엇인가?” 『글로리아타임스』(2014.7.2).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7
20) “방언기도의 비밀,” 글로리아타임스』(2016.1.24).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206.
21) 정이철, 『가짜 성령세례』, 124.
22) 서철원, 『성령신학』, 83-84.
23)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Hendrickon Publishers, 1994), 5-9.
24) E.W. Bullinger, Word Studies on the Holy Spirit (8th ed.: Kregel Academic & Professional, 1979).
25) 정이철, 『가짜 성령세례』, 125-31.
26) ibid., 210-11, 12, 14-15.
27) 서철원, “서평: ‘비성경적 성령세례는 접신체험,’” 정이철 저, 『가짜 성령세례』, 2.
28) 어떤 사람은 누가복음 11:13(“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의 기록인데 어떻게 교회시대의 신자에게 해당되는가?’라고 반문한다.
물론 복음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체류 중이던 A.D. 61~63이다, 이때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지 30여 년이 지난 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강조하는 누가가 누가 복음을 읽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성령을 구하라’고 권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존 놀란드(John Nolland)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한다.
“오순절 강림 이후의 초대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성령이므로, 누가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선심은 (이미 주기도문에서 잘 보여진) 일상적인 필요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선물인 성령까지에도 미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석일 것이다”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5: Luke, Dallas, TX: Word Books, Publisher, 1998. CD-ROM).
29) 차영배, 『성령론-성령론 부교재』.
30) 이한수 교수·막스 터너, 『그리스도인과 성령』, 158.
31) 김명혁, “한국교회의 성령론,”『한국교회 쟁점 진단』(규장, 1998). 104.
32) 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2nd Ed.: Baker Academic, 1996), 46-47.
33) 차영배, “중생과 성령의 세례 및 성령의 충만, 『성령론-구원론 부교재』(경향문화사, 1987), 191.
34) 차영배, 『성령론-성령론 부교재』(도서출판 지민, 2008) , 41-42.
35) ibid., 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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