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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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의 이야기

[스크랩] 순교를 하루 앞두고도 숙면하는 비결

샤론의 수선화 2018. 4. 12. 00:08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5~6)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3~14)


현대 병원에서 내시경등의 검사를 할때 편안하게 검사하게 하기 위해 수면마취를 통해 사람들을 깊이 잠들게 한 이후 각종 검사를 실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면마취를 하기전에 두려워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수면마취가 끝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금 일어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이들은 성경의 말씀을 믿고 있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 보좌 우편에 이미 앉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지 않고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에 죽은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까지는 단 한 사람도 부활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목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인간과 똑같은 혈과 육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친히 죽음을 맛보보신 이후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죽고 부활하신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죽기를 무서워하며 한평생 죽음에 공포에 휩싸여 있는 자들을 놓아 해방시켜 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2:14~15)


본문의 말씀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시범 케이스로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잡아다 사형시켰고 이에 유대인들이 기뻐하자 더욱 힘을 얻은 헤롯은 사도 베드로마저 잡아서 사형시키기 위해 옥에 가두어둔 장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형을 바로 하루 앞두고 감옥에 갇혀있다고 가정한다면 과연 편안하게 잠을 이룰수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기를 두려워하며 공포에 휩싸여 단 일분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베드로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두 군인들 사이에서 천사가 일으켜 깨워야 할정도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앞에서 주님의 제자라고 했다가 함께 죽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휩싸인채로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로도 여유가 있는 그의 모습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록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베드로는 한 번이 아닌 수차례에 걸쳐 부활하신 모습을 친히 목격하였던 사람입니다.이제 자신은 바로 앞서 사형 당한 사도 야고보와 같이 죽음 이후에 오는 주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히려 기쁨과 설레임으로 편안하게 잠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마치 한 겨울 외출 후 편안한 집으로 돌아와 두꺼운 외투를 벗고 안락한 침대에 눕는 것과 같이 성도의 죽음도 이와 같이 한 때는 유용하게 사용한 외투지만 집에 돌아오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외투를 벗는 과정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옥중에서 사형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안위따위는 관심하지 않고 오직 이 땅에 남아 있을 성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그의 삶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라는 고백과도 같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기는 성도의 삶을 사탄 마귀는 가장 두려워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도무지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설명하고 있습니다.(히11:38)

오늘 우리의 삶 역시도 사도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우리 자신의 강한 의지나 자기 최면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오직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가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오늘날 주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느꼈던 평강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유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도의 부활을 보증하여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강력하게 믿었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믿고 있기에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가 오히려 더 크게 칭찬 받을 줄로 믿습니다.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페드로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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