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옥에 갇힘으로 예수께 던질 질문을 자기 제자 둘을 통해 하도록 만듭니다
자신이 사랑하며 섬긴 분이신데 어째 한 번도 심방하시지 않으실까?
답답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두 번째는 자기의 벗들을 보냈는데
요한은 예수께 제자 둘을 보냅니다
제자와 벗은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다를까요?
제자는 선악간에 옳고 그름이란 이치의 틀속에 만들어진다면
벗은 그런 것을 초월하여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선생과 제자는 참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허나 선생과 벗을 대단히 힘든 조합니다
벗은 선생된 자가 먼저 자기 죽음을 담보로 맺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벗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죽음을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제자들을 벗이라 불러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내가 그분의 벗이라 하기엔 너무나 가당치 않는 것입니다
뭣 하나 내가 그분께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요?
설령 내가 가난하다쳐도 그분만큼 가난할까요?
설령 내가 고독하다해도 그분만큼 고독할까요?
설령 내가 쓴 잔을 앞에 두었다해도 그분께서 마신 쓴잔만큼 쓸까요?
설령 내가 육체를 입었고 그분께서도 육체를 입었다쳐도
그분의 육체만큼 연하고 순결하고 깨끗하여 숱한 강한 것들에게 찔림을 당하며 살까요?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과 어울릴 수 있는 조합이 될 수 있도록 유일한 한 가지 길을 터주고 가셨습니다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기쁘기도 하고 숨 막히기도 하고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온갖 욕과 저주와 부인을 하고 싶기도 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독생자라함은 딱히 하나님의 외아들이라서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이 유일하게(모노게네스, 하나) 아버지께로 가는 진리요 생명이요 십자가의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진리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디모데에게 경고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내게도 늘상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말씀입니다
어제 먹었는데도,
아니 이자 금방 먹었는데도 돌아서면 배고픕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면 그러할까요?
한 걸음 겨우 겨우 떼는데 먹은 양식이 다 소모되는 현상은 곧 다시 또 목이 마르고 주려지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비록 진리와 은혜인 복음을 청중들 앞에서 증거하지 않았다해도
성경을 펼쳐 늘 배우고 익혔기에 "아무리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바울의 말씀은 대단히 내게 충격적입니다
황송하게도,
무량하게도,
언감생심, 도무지 품어서는 아니 됨에도 나를 벗이라고 불러주신 그분께 바늘구멍만큼만이라도
어울릴려면 필연코 진리가 실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실체가 된다함은 나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분께서 먼저 날 벗이라 불러주시기 위해 그분께서 먼저 날 위해 죽으신 형상이 내 속에 살아 있으면
그리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엔 니가 그르니 내가 옳으니,
혹은 내가 그르고 네가 옳으니라는 탁상진리,협상진리,협상섬김이라는 것은 끼어 들 수 없습니다
그저 바울처럼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죽음의 길을 갈뿐입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길은 나를 단한번도 이 길 밖으로 내치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씀대로 코에 십자가 갈코리가 꿰어져 갈뿐입니다
진리가 너를 자유케하리라는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힘을 근거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니 십자가가 나를 너무 너무 사랑하여
진리에 이르도록 나를 못박아 실체(진리)가 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이러할 때 십자가안에서 진리의 자유함을 적용한 바울이였기에
그는 오고 오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 자유는 진리가 주는 자유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벗은 자유일뿐입니다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자유일뿐입니다
제자들은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벗이라 불러 준 예수와의 벗됨에 응답하여 하나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인 십자가에 자신들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울 시모님께서는 십팔년전 며느리인 나와 친구처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를 듣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하면 좋은 기도지만 생각하면 얼마나 나를 결박하는 기도입니까?
며느리가 시모님을 벗으로 여기며 산다는게 가능합니까?
물론 가끔씩 울 시모님 친구 같아요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게 같이 살아가는 일상으로 녹아질 수 있겠느냐?입니다
더구나 장남인 남편을 여위시고 남편보다 더 깊이 사랑하며 정신적인 남편으로 의지하며 살아 온 시어머님을
어찌 며느리가 도덕 윤리라는 옳고 그름의 틀을 초월할 때만이 가능한 벗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울 시모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나를 죽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없이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나입니다
일하며 살림하며 남은 시간들을 모아 묵상하고 시 쓰고 여러가지 글로 성도들과 동기들과 사귐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이 말은 거의 접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접었다는 말입니다
다 접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는 자아를 못박으라합니다
이 때 내가 사랑하는 자아는 얼마든지 옳고 선하며 가한 것입니다
허나 모든 것이 가할지라도 바울은 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바울!하며 그를 따릅니다
그러나 그 따름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백부장이 자기 벗들을 보냈다는 것은 그 벗들 역시 가이사 황제를 대적하고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백부장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임을 암묵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것들을 세밀히 살펴가며 기록한 자입니다
벗이 아닌 제자 둘을 통해 예수께 던지는
세례요한의 질문은 아무나 던질 수 없는 대단한 질문입니다
한 평생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새 시대를 열 메시야"에게 올인했던 자가 아니면 질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과연 오실 자가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만일에 내가 믿는 예수가 메시야인줄 알고 섬겼는데
문득 내가 섬기는 그리스도가 진짜일까? 예수께 진지하게 질문해 보지 않았다면
요한처럼 그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영적코너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는게 좋을 것입니다
단 한번도 예수를 대적하여 섬겨본 적이 없는데도
갈수록 협소해지는 예수께서 나를 협소한 코너로 내몰때
바로 그 때가 예수께 진지하게 물어 볼 때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대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정말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가 있는 것일까?
질문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주되신 분과 예전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질문하는 자에게 답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비록 질문은 내가 했지만 답은 그분께서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내게 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신뢰감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됨에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세례요한도 이제 그리스도를 자기가 생각으로 기대했던 바를 부인할 때가 온 것을 봅니다
예수는 나면서도부터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나아가 주님이셨습니다
허나 허나 그는 실제로 행동함으로서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을
우리들 심령속에 심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혜(그)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가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분은 충분히 옳다 함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허나 그는 성경에 기록된 것들을 문자에 머물지 않도록 실제로 일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들리도록 하셨고 죄인들과 부정한 자들과 진 밖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자들과 적극적으로 연합한 몸이 되여 그들의 몸이 되여 죽었다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사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사 온 세상에 일곱 영을 보내시는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성경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의 씨앗으로서 그분께서는 오늘도 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십자가를 능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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