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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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의 이야기

이시대의 또 다른 순교적인삶

샤론의 수선화 2015. 8. 23. 01:32

 

샬롬! 찬미예수

 

젊음의 때 군에 입대하여 열심이 지나쳐 특심하게 신앙생활 하던 동지들이 거의 목회자가 되었고

각자의 사역를 하던 중, 35년 만에 변산 반도에서 만나 정담들을 나누며 1박을 지내고 돌아왔습니다.

세월에 습격으로 인한 흔적들, 관록들 60 고지에 모두 서있는 중후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이즈음 우리 모두에게는 건강이 화두가 되는 연령들입니다.

사모님께서도 소중한 건강 잘 챙기시고 늘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어느 날 이석(石)증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평생 기계체조를 통해 돌면서 살아왔는데 이건 격한 놀이기구를 타다 금 새 내린 것처럼 

속이 메스껍고 멀미가 나는 듯 사방이 빙빙 도는 현상이었습니다.    

협심증, 대상 포진, 그리고 이 석 증 등, 1년 주기로 한 차례씩 불청객이 찾아온 셈입니다.

 

이번 주에는 이런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박해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느냐 뺏기느냐 하는 일사각오의 신앙이 중요했다.

당시 민족적으로 처해있는 암울했던 시대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정체성을 확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로마 시대의 박해 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소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생사의 위협을 받으며 순교까지라도 각오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더럽히지 아니하고

살아남는 것이 주요 관건이 되고, 배고픔도 참고, 빈곤도 참고, 매 맞음도 참고, 헐벗음도 참아야 하는 신앙이 필요했다.

당연이 이때는 인내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자비한 총과 칼의 위협과 신사에 절을 하라는 강요와 입으로 예수를 배반하라는

생사의 위협 앞에 직면한 절대 절명의 순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와 같은 시대적 필연 속에서 결사각오의 신앙을 계승하려 했지만 점점 현실은 더 이상 순교를 요구하지 않았다.

죽을 각오는 돼있는데 죽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제 현실은 죽는 문제가 아니라 사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이제 순교를 각오하는 시대가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신앙이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이 다수를 이루고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책임져야 할 다수"로서 절제하며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양도하고

포기하며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더욱 필요하고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당시 순교적 신앙은 내세 지향적 신앙과 현실 도피적 삶을 양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교는 현실성이 부족하고, 순교의 신앙을 가졌으나 풍성한 신앙의 과정을 다루지 못했다.

한 개인이 기독교 신앙을 구원의 감격 정도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여 예수를 믿는 한 신앙인이 되는 일이

구원의 확신과 감격과 헌신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다양한 것들을 망라한 부요함과 지식과 충만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이 아무리 크더라도 결국은 내용으로서는 그것보다는 더 나아갈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된다고 한다.

 

참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박해 받는 소수"에서 "책임져야 할 다수"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을 쳐서 "또 다른 소수"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 경우에는 비 그리스도인들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다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질시와 박해를 받게 될 것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이미 다수를 이루었음에도 다수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비록 다수일지라도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득불 삶의 현장에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고 피할 수 없는 먹고 마시는 한날의 싸움을 싸워야한다.

우리는 자칫 이러한 일들을 하찮다고 여기거나 불필요한 일들이라 여기지 않아야한다. 

오히려 먹고 마시는 한날의 싸움을 성경에서 피하라고 하거나 그것들은 하찮은 미물들에게나 있을법한 일들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를 염려하며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들을 통해 수고하고 나누고 섬기며 살아가는

신앙적 삶의 모든 태도들이 바로 이 먹고 사는 일상의 영역에서 노출되고 결판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적 정체성은 현대의 자본주의와 풍요로운 삶의 패러다임 속에서 "또 다른 순교적인 삶"이 요구되고 있는 셈이다.  

추호도 이러한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삶의 현장을 떠나거나 비겁하게 피하려들지 말고 이 짐을 지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초월로 가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희노애락의 모든 인생사를 경험하시고

몸소 친히 체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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