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on the way to heaven

**천국지옥 에대해**

[스크랩] 김영원 선교사의 놀라운 천국과 지옥체험/주님께서 현 지구 전역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되었으나 단 한 곳 만이 선교되지...

샤론의 수선화 2011. 9. 19. 10:25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믿음에 의해서만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김영원 선교사의  놀라운 천국과 지옥체험

 

 

 

 

죽도록 충성하라

“북파공작원 출신 형때문에…” 3형제가 모두 해외선교사

우리가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주 중요해요.

 

만약 제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폭력배 보스가 됐을 거예요.”(아르헨티나 김태원 선교사)“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이곳이 좋사오니’라면서 선데이 크리스천처럼 살았겠지요.”

(사할린 김영원,덕원 선교사)김태원(71) 영원(61) 덕원(54) 선교사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한 사람은 아르헨티나,두 사람은 사할린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삼형제가 한번 만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하지만 이들은 그동안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개인의 삶을 포기한 형과 동생들을 떠올리면서 새 힘을 얻곤 했다고 고백했다. #북파공작원 주먹 출신의 선교사아르헨티나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김태원 선교사는 색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북파공작원,잘나가는 건달,파독 광부 훈련소장,남자 보조간호사 등을 거쳐 1988년부터 미국 은혜한인교회(한기홍 목사) 파송 선교사로 유럽과 남미 선교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용해해낸 간증집 ‘북파공작원에서 선교사’는 소설 같은 이야기,3막 4장의 연극을 보는 듯한 칠십 평생을 담고 있다. “1년5개월간 특수훈련을 받은 뒤 동해안 속초 오호리 파견대에 배속되고 1958년 3월 인민군 수색부대 중대장을 납치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갔어요.

 당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때 ‘하늘님,날 한번 살려주이소. 내 하늘님,은혜 꼭 갚아드릴 게요’라며 매달렸다. 그러나 죽은 H상사의 시신을 둘러메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뒤 그같은 고백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수십차례 위험한 작전에 차출돼 사선을 넘으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했다. 오직 애국자라는 자긍심만 가졌었다. 그는 영화 ‘실미도’ 684부대 교육대장 김순웅(안성기 분) 상사와 함께 낙하산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마흔이 넘도록 자신의 주먹만 믿었다. 심지어 아내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던 걸림돌이었다. 파독 간호사였던 아내 김성녀씨에 이어 독일로 이주했을 때만 해도 교회란 세상의 실패자들의 도피처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교회에 출석하면서 180도 변화된 삶을 살게 됐다. 어느날 우레와 같은 음성에 화들짝 놀라게 됐다. “하루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기도원 기도실로 들어가는데 ‘너 이놈,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려고 하느냐’는 음성이 들렸어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과거 북파공작원이었을 때도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섭게 변했다. 신학교를 거쳐 선교사로 변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는 남미 전역을 대상으로 목회자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키고 있다. #모든 재산 팔고 선교사로 헌신김영원?덕원 선교사는 러시아 사할린에서 지역사회개발 및 교회 개척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여동생 태녀(51)는 미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 모두 김태원 목사로 인해 선교사로 헌신한 경우다. 특히 김영원 선교사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덟살 때부터 형제중 가장 먼저 신앙생활을 했던 그는 “‘예수 믿으라고? 웃기지 마. 내 주먹을 믿어’라고 했던 형님이 하나님 앞에 순한 양이 됐지만 저는 오히려 더 완악했었다”고 털어놓았다. 만나감리교회 권사였던 그는 요란하게 하나님을 믿는 형이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형을 통해 우연히 교회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부터 변했다.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96년에는 아예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가방 1개만 달랑 들고 선교지로 떠났다. 주위에서 무모한 짓이라며 눈을 흘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하나님께 내놓았어요. 돌아올 수 있는 기반이 고국에 있으면 사역하다가 어려우면 철수할 수 있잖아요. 일종의 안전장치죠.” 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나갔다. 은혜한인교회 등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으로 신광농업학교를 세워서 젊은이들을 신앙과 직업훈련을 시켰다.  스메르느이 중범자교도소 교회를 개척한데 이어 포르나이스크 및 네웰스카이 지역 교회까지 후원하고 있다.

 

29년간 직업군인과 군사무관으로 재직했던 동생(덕원)이 1999년 사할린 선교사로 합류하면서 그의 사역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재작년 11월 현지인 목회자 1명,전도사 3명과 함께 교도소 사역센터를 만들어 교도소 5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이미 죄수 78명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천국의 백성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이다.

  이밖에 미국의 신학교 2년과정을 도입,현지인들에게 질높은 신학강의도 전수하고 있다.

 1기생 9명이 졸업,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현재 2기생 8명이 ‘제2의 김영원,덕원 선교사’를 꿈꾸고 있다. 이들 3형제는 요즘 누가 더 많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지 선한 경주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것만으로 산다는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이들에게서 새로운 사도행전을 써내려가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출처 : 회복교회!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
글쓴이 : 여호와 닛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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