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인가, 대언인가? (벧후 1:20-21)
(벧후 1:20-21, 개역)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킹흠정)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벧후 1:20-21, KJV) [20] Knowing this first, that no prophecy of the script-x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21]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여러 성경 번역들이 prophet 을 예언자, 선지자 등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이들 prophet이 미래 일을 알아맞힐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prophet의 원래 의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언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베레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탐구해 보시기 바랍니다(행 17:11).
(행 17:11, 킹흠정)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1. 선지자(예언자)인가, 대언자인가?
(1) 첫 대언자 아브라함
성경에서 prophet 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이며, 가장 먼저 등장하는 prophet은 아브라함입니다(창 20:7)
(창 20:7, 킹흠정)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시니라.
(창 20:7, KJV) Now therefore restore the man his wife; for he is a prophet, and he shall pray for thee, and thou shalt live: and if thou restore her not, know thou that thou shalt surely die, thou, and all that are thine.
아브라함이 만약 선지자나 예언자였다면, 그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거나(선지자)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능력(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아브라함이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고,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다가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아브라함을 prophet 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prophet 이라고 칭하신 것이 그에게 선지자나 예언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그가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약속을 온 세상에, 그 다음 세대에 전달할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대언자"이지,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능력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창 12:2-3, 킹흠정) [2]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3]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
(2) 대언자의 개념을 잘 보여주는 아론
성경에 두번째로 등장하는 대언자는 모세의 형 아론입니다. 이 구절은 특히 prophet의 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구절이니 주의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출 7:1,2, 개역)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출 7:1,2, 킹흠정) [1]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파라오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대언자가 되리니 [2]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너는 말하고 또 네 형 아론은 파라오에게 말하여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출 7:1,2, KJV) [1]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See, I have made thee a god to Pharaoh: and Aaron thy brother shall be thy prophet. [2] Thou shalt speak all that I command thee: and Aaron thy brother shall speak unto Pharaoh, that he send the children of Israel out of his land.
이 구절은 출 6:30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라오가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론을 붙여주시면서 아론이 그의 대언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을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면, 아론은 그의 대언자가 되어서 그 말씀을 파라오에게 대신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7:1,2 말씀을 읽어보면 prophet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자", 즉 대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개역도 어쩔 수 없이 이 구절을 "대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prophet(히, 나비)이라는 말이 대언자라는 것이 이처럼 분명한데, 왜 똑같은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선지자로, 다른 곳에서는 예언자로 번역되어야 합니까?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일관성있게 "대언자"로 번역했습니다.
(3) 예언과 대언의 차이
예언자는 자기가 직관이나 추리, 예지 능력, 환상 등을 통해서 본 것을 스스로 정리하여 앞날을 내다보고, 자기 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내용에는 개인의 사적인 판단과 표현방법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대언자는 주께서 그 입에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를 말하며, 처음에 전달받은 내용에 대해 전달자가 그 내용을 사사로이 변개하는 것은 금지됩니다. 만약 최초에 받은 말씀에서 덧붙이거나 빼거나 내용을 변개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전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와 대언자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감록과 같은 책을 예언서라고 하지만 대언서라고 하지는 않으며, 노스트라다무스를 예언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를 대언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유의하여 신약성경 베드로후서 1:20-21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벧후 1:20-21, 개역)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킹흠정)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벧후 1:20-21, KJV) [20] Knowing this first, that no prophecy of the script-x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21]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개역은 prophecy를 예언이라고 번역했고, 킹제임스흠정역은 대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벧후 1:20에 의하면, 성경 기록의 prophecy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즉, 성경의 기록을 전달하는 사람이 자의적인 해석을 붙이거나 전달자가 자기 나름대로 풀이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21절에서는 그 prophecy는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prophecy는 개인이 자기 머리 속에서 지어낸 내용이 아니며, 또한 성경 기록 내용에 사사로이 개입하여 자기 말을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대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후서 1:20-21에 나오는 prophecy는 예언일까요, 대언일까요? 이 말씀에서 prophecy가 미래 일에 대한 기록(예언)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개인이 통찰력과 예지력을 사용하여 미래를 전망한 것을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기술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prophecy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대로 말한 것, 곧 주께서 그 입에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성경 말씀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prophet은 대언자이며 prophecy란 대언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인 대언자를 선지자나, 예언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개념에 혼란을 일으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언과 대언자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는 다음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삼하 23:2, 킹흠정)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신 18:18, 킹흠정)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
2. 선견자에서 대언자로
성경 기록에 의하면, 대언자(prophet)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 이스라엘에는 선견자(se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상 9:9, 개역)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삼상 9:9, 킹흠정)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여쭈려 할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더라. 지금 대언자라 부르는 사람을 예전에는 선견자라 불렀더라.)
(삼상 9:9, KJV) (Beforetime in Israel, when a man went to enquire of God, thus he spake, Come, and let us go to the seer: for he that is now called a Prophet was beforetime called a Seer.)
사무엘상 9:9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에 선견자(seer)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후에는 prophet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견자란 seer, "앞을 내다보는 자"를 말합니다. 원래 선견자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부르는 용어를 선견자(seer)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선견자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진 능력자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집안 문제를 가지고 오고, 길흉화복을 묻고, 장래 진로상담을 받으러 오는 부작용이 생긴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선견자가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개인의 미래나 알아봐주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찾아주고 있으니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삼상 9:9 앞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9:6, 킹흠정) 그가 그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존귀한 사람이니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니 이제 우리가 거기로 가사이다. 혹시 그가 우리가 가야 할 우리의 길을 보여 줄까 하나이다, 하므로
사울이 자기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으려고 종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자 그의 종이 선견자(사무엘)에게 가서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선견자를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고, 개인의 앞길을 가르쳐 주는 자"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내다본다"는 선견자(seer)라는 용어 대신에 prophe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seer 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자 이를 prophet 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과 같이 선견자를 선지자로 바꾸었다면 이게 하나님께서 용어를 바꾸신 목적에 맞을까요? 선견자는 "앞을 내다보는 자", 선지자는 "미리 아는 자", 둘 다 같은 뜻인데 무엇이 달라졌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라는 말을 듣고서는 "장래 일을 미리 아는 자"라고 여기고, 다들 장래 문제에 대해 상담을 받으러 올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견자(seer)라는 용어의 부작용을 아시고, 이것 때문에 선견자 대신 다른 용어로 바꾸셨다면, 새로운 용어에는 선견자처럼 미래를 내다보거나 앞날을 미리 아는 자라는 개념이 들어가지 않게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종들이 본래의 임무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prophe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그렇다면 prophet이라는 단어는 주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라고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3. 환영받는 예언자, 미움받는 대언자
(1)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예언자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나는 누구랑 결혼하게 될 지, 내일은 내가 산 주식이 오를 지 내릴 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지 안 좋을 지 등...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자기의 장래 일을 미리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잠 27:1, 킹흠정)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전 7:14, 킹흠정) 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하되 역경을 당하는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또한 이것과 저것을 마주보게 두신 것은 사람이 자기 뒤에 일어날 일을 찾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전 8:7, 킹흠정)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느니라. 언제 그 일이 있을지 누가 그에게 말하겠느냐?
(전 10:14, 킹흠정) 또한 어리석은 자는 말도 많으니라.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나니 그가 있은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그에게 알려 주겠느냐?
사람에게는 자기의 미래를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미래의 일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욕망을 비집고 들어가 마귀가 틈을 타서 점술이나 마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신 18:10,14, 킹흠정) [10]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찰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마녀나 [14] 네가 소유할 이 민족들은 때를 관찰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너에 관하여는 주 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지만, 신명기 18:10,14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복술을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술은 모두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서 마귀에게 영이 지배당한 자들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 21:21, 킹흠정) 바빌론 왕이 두 길의 머리 곧 길이 나뉘는 곳에 서서 점을 치고 자기 화살들을 빛나게 하며 형상들에게 묻고 간을 들여다보았느니라.
(행 16:16, 킹흠정) 우리가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어떤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점치는 것으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더라.
(사 8:19, 킹흠정)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슬쩍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술사들에게 구하라, 할 때에 백성이 마땅히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개인의 길흉화복이나 미래 일을 점치는 것을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출산, 입시, 취업, 승진, 이사, 선거 등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에게 물으러 갑니다. 불신자들 뿐만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점집 대신에 기도원을 찾아가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무당들에게 길흉화복을 묻거나 사업문제, 자녀문제, 진로문제를 상담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성경에서 엘리야가 아합의 손금을 봐 줬다거나 사도 바울이 베스도의 앞날을 예언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지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처럼 개인의 운세나 미래를 진단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의 장래 일을 알 수 없으며, 또한 그에게 미래를 알려줄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전 10:14). 하지만,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욕망 때문에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무당들은 그들로부터 열렬히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대언은 사람들의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왕상 22:7,8, 킹흠정) [7]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주께 여쭙고자 하니 이들 말고 여기에 그분의 대언자가 없나이까? 하매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가 그를 통해 주께 여쭐 수 있으나 그는 나에 관하여 좋게 대언하지 아니하고 나쁘게 대언하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하지 마소서, 하니
위 말씀을 읽어보면 대언이 장래의 길흉을 알려주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미가야라는 대언자를 미워했습니다. 만약 미가야가 예언을 했다면 아합이 그를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언이란 단순히 "미래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왕이 그를 미워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미가야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하면 이렇게 될 것이고, 순종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아합은 주께 불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 것입니다.
미가야를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대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쪽으로 가면 불길하다"든가, "오뉴월에는 물을 조심하라"거나, "네 아들이 이번 수능시험에 합격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신 전달했을 뿐입니다.
물론, 성경의 대언 중에는 미래에 대한 예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빌론 군대가 유대 왕국에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주의 집을 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갈 것이라고 한 예레미야의 대언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신 예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어떻게 경영하고 다스릴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경영 방침을 대언한 것이지 미래 일을 알아맞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대언 중에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언자들과 사도들이 전달한 성경 말씀이 모두 예언은 아닙니다.
4. 예언의 은사인가, 대언의 은사인가?
(고전 14:24,25, 킹흠정) [24] 그러나 모두가 대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자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므로 그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또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전하리라.
고린도전서 14:24,25에 기록된 것은 예언일까요, 대언일까요? 만약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을 했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미래 일을 신기하게 알아맞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어보니 prophecy 를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죄를 깨달으며", "판단을 받고", "자기 마음에 있는 은밀한 것들이 드러나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고백하게 된다고 합니다.
왜 그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판단을 받고,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예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언하는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마음 속에 숨은 죄가 드러나게 되어,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전 14:24.25의 prophecy란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 대언의 은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런 대언자나 대언의 은사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대언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더 이상 계시나 대언이나 대언자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거나 대언의 말씀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미 모든 성도들에게 완전한 성경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 성경 말씀 이외에 새로운 계시나 대언이 더 있다고 주장하면서 덧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계 22:18,19 킹흠정) [18]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글쓴이 - 김문수
출처 : 회복교회!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
글쓴이 : 무심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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