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의가 믿음생활의 최대 적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롬 10:3)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성도는 가능성이 있는 성도다. 왜냐하면 ‘자기 의’의 심각성을 알아야 십자가 앞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서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았다고 했다. “힘써”라는 단어를 주의해서 보아야한다. 그냥 하나님의 의와 멀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세우려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멀리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의로움’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의도적으로 멀리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의’는 십자가와 멀어지게 된다. 그러면 구원과 멀어지는 것이요 천국과 멀어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진다. 절대 평가냐 상대평가냐 이 세상은 절대 평가보다는 상대평가를 좋아 한다. 학교에서 시험을 봐도 상대평가를 해서 1등부터 꼴등까지 점수가 나온다. 운동시합을 해도 상대평가를 해서 우승과 준우승을 가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친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상대평가 하는 것을 좋아할까? ‘자기의 의’가 우리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등을 해야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내가 잘 해야 행복해 한다. 내 자식이 잘 돼야 좋다. 남의 자식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이것이 ‘자기의 의’이다. 즉 아주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기 의’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뿌리가 박혀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남들보다 기도를 조금 더하면 다른 성도를 판단 한다. 저 집사는 나보다 기도 안한다고 판단하면서 내가 더 신앙이 좋고 의롭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성경을 많이 읽으면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를 보면 은근히 무시하고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는 더 의롭다고 여긴다. 자기는 술 담배를 않고 다른 성도가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면 정죄 판단하면서 자기는 저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을 한다. 이것이 상대평가다. 상대평가를 해서 자기의 의로움을 더욱더 드러내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TV나 영상매체를 보면서 나쁜 사람이 나오면 죽일 놈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의로운 존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위안을 삼는다. 절대 평가는 그렇지 않다. 절대 평가는 1등부터 꼴등까지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절대 평가는 우승과 준우승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절대 평가는 재미가 없다. 상대평가를 해야 ‘내 의’가 나타나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가 이겨야 기쁘다. 우리나라가 지면 힘이 빠진다. 우리나라가 이기면 기쁜 이유는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나의 의’가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지면 ‘나의 의’가 손상이 되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한국선수가 이겨줘야 ‘내 의’가 인정을 받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절대평가를 해야 나의 의로움이 없어진다. 신앙생활에서 절대 평가는 하나님이 하신다. 성도가 상대를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자기 의로움에 빠진다. 내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나중에는 왕 바리새인이 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더욱더 멀어진다. 점점 대왕 바리새화 된다.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함정에 빠진다. 성도가 절대평가를 하면 점점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을 보지 않고 절대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나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의 빛이 내게 임함으로 내 속에 어두움이 드러난다. 어두움이 드러나니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인지 알게 된다. 내 죄가 다 드러나는데 언제 남을 판단할 시간이 있고 정죄할 시간이 있겠는가? 아니 내가 더 큰 죄인인데 어떻게 남을 판단할 수 있는가? 내 눈에 들보가 보이는데 언제 형제의 티를 볼 시간이 있는가? ‘하나님의 의’로 들어가려면 절대 평가자인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한다. 바리새인은 상대 평가를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세리는 절대평가를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0-눅 18:14) 당신은 혹 바리새인처럼 상대평가하지 않는가? 세리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가슴을 치며 회개를 했다. 예수님은 세리를 의롭다고 했다. 성경의 악인의 모습을 보고 내 모습임을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 성경을 읽을 때에 악인이 나올 때에 “저 악인이 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가능성이 있고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의로 충만해 질 수 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내 모습임을 고백할 때에 내 의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다가 온다. 가인보다 더 악하다고 고백하면 하나님의 의가 더 빨리 내 안에 들어온다. 사실 가인보다 악하다는 것이 깨달아 져야한다. 가인은 아벨 한 사람을 죽였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가능성이 충분하다. 애굽의 바로 왕을 보고 내가 완악한 바로 왕 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완악한 정도가 아니라 악독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정확하게 정죄를 하는데 내가 죄를 지으면 최대로 관용을 베푼다. 남의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난폭운전이요 내가 갑자기 끼어들면 차선변경이라고 하는 거와 같다. 이것이 나의 완악함이다. 일일이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없다. 사울왕이 나요,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가 나요, 욥을 책망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나요, 아합왕과 이세벨이 나요, 헤롯왕이 나요, 가룟 유다가 나요,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가 나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이 나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짐승이 나요 등등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임하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에 악인이 등장하면 ‘저 악인이 납니다’고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이 기뻐하신다.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아직도 자기의 의로 사는 불쌍한 존재가 된다. 착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의 의가 더욱더 강해질 수 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성도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한다. 그래서 술담배 끊고, 욕 안하고, 교통법규 잘 지키고,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집에서 자녀들에게 소리 지르지 않고,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고, 아내에게 큰소리치지 않고, 직장에서 저녁에 일찍 들어오고 등등으로 착하게 살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이정도면 착하게 산다’고 자부심을 갖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이 좋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누구를 위해서 착한 일을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거의 대부분이 자기를 위해서 착한 일을 한다. 나의 의를 인정 받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한다. 나의 의가 손상 받지 않기위해서 착한 일을 한다. 이것을 인정 하는가? 내가 이정도하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더 쌓아간다. 여기에 속는 사람이 한두 사람인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지 않으면 이 착한 행동이 나의 의로움이라는 옷에 더 내 의로움의 옷을 두껍게 입히는 것이 된다. 내 착함이 하나님의 의와 멀어지게 한다. 이것을 깨달으면 복있는 성도이다. 간증이 나의 의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간증은 주로 어려움을 당하다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했더니 복을 받았다 이다. 이런 간증은 나의 의로움을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에 간증이 내 의로움이 나타난다면 하지 말아야한다. 안하는 것이 복이다. 아마존에서 선교하시는 허00 선교사님의 말에 의하면 인디오 들이 앞에 나와서 간증할 때 이런 간증을 한다고 했다. 나는 닭을 몇 마리 훔쳤습니다. 나는 간음을 했습니다. 나는 수간을 했습니다. 나는 사람 몇 명을 죽였습니다. 간증이 이렇다는 것이다. 누가 옳은 간증을 했는가? 참된 간증을 자기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간증 할 때에 ‘자기의 의’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나의 신비한 체험과 은사들이 내 의가 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신비적인 것을 좋아 한다. 봤다! 들었다!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러워한다. 내가 환상을 봤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도움은 주지만 진정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고, 병고침의 은사를 받으면 난리가 난다. 그때부터 자기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로 생각을 한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은사자들을 코치 할 사람이 없다.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가 엄청나게 충만해진다. 그래서 은사자들을 하나님도 못 말리는 것이다. 또 내가 기도해서 병이 났다고 하자 그리고 집회에 참석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병이 낫다고 하자 혹은 신유의 은사를 가진 주의 종의 기도로 병이 나았다고 하자. 잘못하면 이것이 내 의가 될 수 있다. 나는 기도해서 나았는데 당신은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더 기도해야 겠습니다. 나는 기도 열심히 해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나의 의’다. 벌써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롭고 당신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도해서 병이 낫지 않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복이 될 수 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 금식 많이 하는 사람, 철야기도 작정기도 많이 하는 사람, 성경 많이 읽는 사람, 제자훈련 잘 받은 사람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다. 이글을 읽는 사람은 곧 바로 동의 할 것이다. 교회에서 이런 분들이 신앙이 대단하다고 다른 성도들이 인정한다. 그 인정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의’로 충만해진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못하는 금식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했고, 나는 성경을 많이 읽었고, 나는 제자훈련을 받았어! 성도들도 인정하잖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의를 높이 쌓고 있는 것이다. 전도, 선교, 구제, 봉사가 나의 의가 될 수 있다 선교 많이 하는 교회가 선교 많이 한다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다. 구제 많이 하는 교회가 구제 많이 한다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다. 성전건축을 해서 하나님께 봉헌을 하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다. 전도 많이 하고 설교 잘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다. 내가 사업을 해서 헌금 많이 하는 것이 내 의가 될 수 있다. ‘평생에 교회를 몇 개 짓겠습니다’고 서원하고 교회를 지으면 그것이 자기 의가 될 수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의’ 빠지게 됨을 조심해야한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앞에 가서 ‘[자기의 의’가 얼마나 강한 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과 나 천국에서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데 나는 땅에서 날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롬 8:34)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나는 날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내 의’로 충만해서 예수님도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는가? 예수님보다 내가 더 의로워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데 우리는 예수님보다 훨씬 의롭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의롭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알려고 노력을 하겠는가? '자기 의'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자기의 의'를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단지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 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의'인 예수를 죽일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날마다 죽이고 '나의 의'가 최고라고 하면서 군림할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약 4:11-약 4:12)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가? ‘자기의 의’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알아야한다. 또한 자기의 의가 마귀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도 알아야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의’가 얼마나 강한지 깨닫는 것은 중차대한 일이다. 이것을 발견하면 십자가 복음으로 ‘자기의 의’를 죽이고 ‘하나님의 의’로 충만해 질 수 있다. 자기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모든 것이 복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내가 높아지고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나의 유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내가 출세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신종 우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을 주는 우상이 된다. 불교의 석가나 다름이 없이 된다. 예수 앞에 나와 열심히 빌어서(기도) 복을 받으려고 정성껏 새벽기도하고 철야하고 금식한다. 기도 응답 안해주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원망 불평하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 안다닌다고 협박을 한다. 이렇게 ‘자기의 의’가 무섭다. ‘자기의 의’를 깊이 깨닫는 성도가 정말 복이 있는 성도이다. 자기의 의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알고 날마다 십자가에 ‘자기의 의’를 못 박으라 -예수님 사랑- |
출처: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온라인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시든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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