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찬송은 중심과 주변 모든 역할을 한다. 중심인 까닭은 예배의 본질 안에 찬양이 중요한 몸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부처럼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습관적으로 쓰는 ‘준비 찬송’이란 말이 그렇다. 마치 찬양을 예배를 앞두고 애드벌룬을 띄우는 작업처럼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찬송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예배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배 때 부르는 찬송가는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찬송가보다 CCM을 더 선호하는 교회들이 많다. 물론 예배에서 꼭 찬송가만 불러야 하는지, 복음성가를 불러도 괜찮은지, 이것은 여기서 논쟁할 일이 아니다. 이미 모델처럼 떠받드는 교회들의 예배광경을 보면 그런 문제제기는 더 이상 논란거리를 넘어선 듯하다. 사실 전통적인 찬송가는 심심하기 짝이 없다. 복음성가에 비해 흥미가 덜하고, 차세대의 음악적 감수성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러니 CCM은 예배찬송을 보완할 뿐 아니라 외려 찬송가보다 비중있는 역할을 한다.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나 기왕이면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고, CCM도 즐겁게 부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소외당하는 이유가 있다. 대개의 교회는 전체 찬송가 곡 중 절반도 활용하지 않는다. 예배 찬송을 선택할 때 회중 모두가 알만한 곡을 우선 골라야 하기 때문에, 아주 적은 범위에서 선곡한다. 예배 찬송이 늘 그 타령에 머무는 이유이다. 아는 곡은 너무 뻔하고, 모르는 곡은 아예 재미없다. 대개의 교회는 새로운 찬송가를 배우는 일에 미숙하다. 아마 찬송가는 원래 구식이라는 선입견 때문이고, CCM에 비해 재미나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악순환은 반복되게 마련이다. 찬송가는 복음성가처럼 쉽게 입에 붙지도 않고, 누구나 편하게 부를 만큼 수용성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찬송가를 언제까지 뒷방에 둘 일은 아니다. 교회는 새 찬송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예배에 적용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래야 예배의 긴장과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복음성가와 달리 찬송가에는 예배의 경건성, 교회력, 신앙생활의 다양한 주제들, 세대 찬송, 민족의 경험과 서사가 담긴 고백들을 균형 있게 담고 있다. 독일찬송가 안에 8절~12절에 이르는 찬송곡이 수두룩한 까닭은 그만큼 신앙고백을 두루 담으려는 의도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21세기 찬송가’는 여전히 문제점이 있지만, 이전에 비해 보강된 측면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가사와 우리 가락 찬송을 100여곡 이상 수록한 것이다. 예전 ‘통일찬송가’는 겨우 19곡에 불과하였다. 미국 부흥 찬송 위주였던 외국곡도 세계교회 찬송들로 골고루 채워지면서 다양성을 확장하였다. 나 역시 늘 뻔한 찬송을 불러왔다. 찬송을 새로 배우는 일에 미숙한 까닭이다. 그러다가 문득 예배집례자라면 찬송가 전곡에 익숙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찬송가 전곡을 배우기로 작심하고, 꾸준히 익혔다. 독일 복흠교회 시절에 ‘통일찬송가’ 558장을 다 배웠고, 색동교회에서는 새로워진 ‘21세기 찬송가’ 645장에도 도전하였다. 찬송가 전곡을 활용하니 예배 찬송의 범위가 넓어졌고, 찬송시간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찬송가 전곡을 부르게 되면서 예배 찬송은 찬송가답게 불러야 한다는 소신도 생겨났다. 놀랍게도 평범한 찬송 한 장 한 장에 믿음의 기록과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더라. 수요기도회에서 찬송을 한 장 한 장 배울 때마다 그 배경을 소개하고, 관련된 에피소드를 주워 섬겼다. 보기를 들어 ‘다정하신 목자 예수’(567장)는 첫 목회지인 문수산성교회 시절에 배웠다. 어떤 거지 아이가 찾아와 가르쳐준 찬송이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속회를 드리러 나서려는데 열 서너 살 쯤 된 소년이 찾아와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청하였다. 고아원 원장님이 잠 잘 데가 없으면 교회를 찾아가 부탁드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침 아내의 출산이 임박한 때라 누구를 재워줄 처지가 못 되었다. 우물쭈물하는 내 앞에서 아이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집에 들이지 못하였다. 대신 3천원을 쥐어 주며 강화도에 가면 잘 만한 곳이 있을 것이라고 둘러댔다. 밤길에 속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아이가 부른 노래가 계속 귓전을 맴돌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찬송가를 뒤적거렸고, 결국 그 곡을 찾아냈다. ‘다정하신 목자 예수 어린 양을 돌 보사 캄캄한 밤 지나도록 나를 지켜 주소서.’ 추억의 찬송을 손꼽다보면 사연이 없는 찬송이 드믈 정도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막 14:26).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아마 절실한, 허나 승리를 부르는 노래였을 것이다. 찬송가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불리든, 밖에서 부르든 공동체의 믿음, 역사적 삶, 인간의 아픔과 희망을 두루 담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래 시편의 고백이 그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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