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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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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베트남.소식

[스크랩] 베트남에 살아보니 41

샤론의 수선화 2018. 12. 28. 20:43

  한국의 지인이 호찌민에 온다고 해서 잠시라도 얼굴을 보러 공항에 나갔습니다. 일행이 있는 그 분은 넓다란 박스 하나를 안겨주고는 여행지로 떠나갔습니다.


 

  집에 와서 박스를 열어보니 생필품 세트입니다. 쓰기가 아까워서 농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한 달 전쯤, 훼사장이 우리 집에 왔었습니다.
  “이모, 우리 둘이 번 돈에서 매달 3백만 동(15만원)으로 솜이 엄마를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이모 생각은 어때요?”
  “좋지...!”
  훼사장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자신의 사업을 키워나가느라 늘 빠듯한데, 솜이 엄마를 돕겠다고 먼저 나서주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32살인 훼사장이 소견이 훤합니다. 철이 들고 어른스럽습니다. 솜이네 외삼촌 라우까지 집에 들여 열 식구 밥을 해대느라, 꼬맹이 넷을 합쳐 늘 전쟁터 같습니다. 어려운 남남끼리 한 집에서 복닥복닥 살아내는 게 대견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많이 도전을 받습니다.
  라우는 30살, 이 나라에서는 아주 노총각입니다. 누나와 조카들을 생각하면 결혼할 엄두도 못 냅니다.
  솜이 엄마 33, 제일 나이 많은 냐안은 34살, 모두들 30대 초반인데 부모님과 아이들은 책임지고 있는 어른들입니다. 베트남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세대들입니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베트남의 희망을 봅니다.


  아무튼 훼사장과 얘기를 나눈 지 한 달이 다가옵니다. 연말이어서인지 배로 보냈다는 헌옷은 아직 소식이 없어 연말특수는 물 건너 간 것 같고,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농 위에 올려놨었던 선물이 생각나서 훼사장을 불렀습니다.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5백만 동이 넘는 상품이지만 3백만 동이라도 받아서 솜이 엄마에게 전해주자고 했습니다. 첫 달은 이렇게라도 넘겨야겠습니다.
  뭐 더 팔게 없을까하여 서랍과 찬장을 몇 번이나 열어봐도 나그네 살림살이가 거기서 거깁니다.


 

  지난 성탄절에 냐안의 회사 식구들을 불러서 예수님 생일잔치를 열었습니다. 케이크와 수박을 사들고 먼저 도착한 여직원들이 한국음식을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느라 난립니다. 김치가 맛있다 해서 즉석에서 10통을 주문받았습니다.
  어제 훼사장과 둘이서 김치를 만들며, 내가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었던 동영상도 찍었습니다.
  “훼사장, 김치 주문이 들어오면 배달은 누가 해?”
  “이모, 걱정 말아요. 방법이 나올 거예요.” 
  아침 일찍 오토바이를 몰고 나간 솜이 엄마와는 전화연락도 안되고, 훼사장과 둘이서 주문받은 김치를 담그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눕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아파트에서 한국 어르신 몇 분을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 분들인지라 엄청 반가웠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호찌민을 왕래하셨던 분들이어서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가까이에 한국인 교회가 있다고 해서 그 분들을 따라 교회 갈 차비를 하는데 솜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이모, 나도 이모 따라 그 교회에 가면 안 돼요?”
  “안 돼. 한국인 교회에 베트남인은 갈 수 없어. 미안해!”
  선교가 금지된 국가에서 현지인이 외국인 교회에 가는 것은, 그 나라 종교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죽어도 자신은 한국며느리이고, 아이들은 한국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솜이 엄마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솜이 엄마가 지난 성탄이브에 찍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아빠 없는 빈자리에 케이크를 사놓고 사발에 콜라도 따라놓았습니다.
  엄마가 기도를 하는데 둘째는 타오르는 촛불이 궁금해서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솜이 엄마지만, 아이 셋에게 쏟는 정성은 이렇게 한국 엄마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출처 : 통일한국 원로원
글쓴이 : 무궁화3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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