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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해

[스크랩]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 현황

샤론의 수선화 2018. 12. 21. 00:34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 현황



 

 

그리스도교는 BC 4년에 유대에서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하나님[Yahweh(야훼)=Jehovah(여호와)]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아(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로 믿는 종교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3위 일체 하나님과 부활신앙을 기본 교리로 하고 있다.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헬라어(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며,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하느님)으로 해석되는 히브리어 “야훼(야웨)”(Yahweh)의 본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있다”를 뜻하는 동사 “하야”(hayah.어두의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가 되어 “산다”를 의미한다)가 변화한 말이며 “있는 자, 사는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보고 있다.

 

'야훼'는 또 '여호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발음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원래 유대인들은 거룩한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율법에 기록할 때도 야훼를 뜻하는 단어는 자음 4자만을 표기(로마어로는 YHWH, YHVH, 혹은 JHWH, JHVH라고 쓰고, 독일에서는 JHWH로 통일해서 표기)하였으며, 이 4글자는 거룩한 4글자라고 하여 읽을 때도 본래의 발음대로 읽지 않고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라는 뜻)라고 읽도록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전 3세기부터 히브리어 구약을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70인역)할 때도 하나님(야훼)을 나타내는 단어는 그대로 음역(音譯)하지 않고 아도나이와 같은 뜻인 “주님” 곧 “퀴리오스”라고 번역하였으며, 이런 전통은 예수나, 사도들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전서를 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똑같이 “퀴리오스”(Kurios) 곧 “주님”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하나님 이름을 본래의 발음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다가 16세기의 기독교 학자들이 일부 유대인 사이에서 YHWH를 아도나이(Adonai)로 읽도록 지시하기 위해 YHWH 글자 밑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작게 써 넣어 “YaHoWaH”로 표기했던 점에 착안하여 임시방편으로 “YHWH”를 “여호와”(Yehowah = 영어로는 Jehovah)라고 읽게 되었으며, 첫 모음 a가 e로 바뀐 이유는 제1자음 y아래서는 모음 a가 e로 발음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의 히브리어 학계에서 드디어 YHWH의 진짜 발음이 “야훼”라는 것을 밝혀내게 됨에 따라 학계에서는 신,구교 가릴 것 없이 “여호와”나 “주님” 대신에 “야훼”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어판[예루살렘 성서](1961)에서도 “야훼”를 쓰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나온 영어, 독일어판[예루살렘 성서]도 “여호와”나  “주님” 대신  “야훼”를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7년에 나온[공동번역 성서]에서 여호와를 “야훼”로 바꿔 표기함에 따라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하는 가톨릭이나 성공회에서는 하나님 이름을 “야훼”로 호칭하고 있으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된 대다수의 성경은 “여호와” 대신 전통적으로 써온 “주님(LORD)”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한글개역판의 영향으로 인해 대부분의 교단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표기하고 있고, 순복음교회에서만 2007년도 개역개정판에서 여호와를 모두 “야훼”로 고쳐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서는 2008. 10. 17 “교황청이 최근 거룩한 네 글자(YHWH)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이름을 전례와 성가, 기도에서 사용하거나 발음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을 보내왔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미사나 성가, 기도 등 공식 전례(典禮)에서 'YHWH(야훼)'라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발음하지 않기로 했으며, 히브리어로 '주님'이라는 뜻인 'Adonai(아도나이)'는 '주님'으로, 'YHWH(야훼)'는 '하느님'으로 번역하고, '아도나이 YHWH'는 '주 하느님'으로 번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될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하늘에 있는 전지 전능한 신, 곧 "하느님"이란 단어가 있었기 때문에 "야훼"를 "하느님"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개신교인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이란 개념을 우선시하여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

 

【기본 교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한 절대자요,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또 스스로 존재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사랑(agape)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와 인류 구원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의 죄를 대속한 후 부활하였는데 이가 곧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신이므로, 그 자신이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3위의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 셋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삼위일체로써 하나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이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 · 동방 정교회(正敎會) ·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다시 동방 정교회(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내에서도 몇몇 독립적인 교회로, 또 개신교내에서도 기독교, 성공회 외의 수많은 종파로 갈라져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경전(經典) 】

경전은 성경이며, 구약과 신약을 합하여 개신교는 66권(구약39권, 신약27권), 동방정교회는 76권(구약49권, 신약27권), 가톨릭은 73권(구약46권, 신약2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일찍부터 2개 언어로 전하여왔는데 하나는 히브리어(고대 이스라엘어)성경이며, 하나는 BC 3세기경부터 쓰인 헬라어(그리스어)성경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서와 에스라서 일부는 성서 본문을 아람어로 기록해 놓았다.  성경은 정경과 외경, 위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정경(正經)은 영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 교회에서 경전으로 채택된 책을 말한다. 정경이란 말은 "장대" 또는 "자"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카논(kanon)에서 유래되었다.

 

외경(外經)은 정경으로 인정되지 못하여 경전으로 채택되지 못한 감추어진 책을 말하며, 헬라어로 "아포크리파"(Apo-crypha)라고 하는데 "멀리 감추어 버린"이란 뜻이다.

 

위경(僞經)은 정경과 외경에 들지 않는 책으로서, 거짓으로 지어낸 책을 말하며, 헬라어로 "수데피그라파"(pseudepig-rapha) 라고 하는데 "가짜 표제" 또는 "위조기록"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위경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저자로 내세워 정경을 흉내 낸 것이 특징이며, 소설 같은 창작물이어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다니엘서나 스가랴서와 같은 묵시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꿈, 천사, 환상, 계시 같은 신비주의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최근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새로운 복음서라도 발견된 양 호들갑을 떨었던 "유다복음"도 바로 위경의 범주에 해당하며, 유다복음 외에도 도마복음, 에비온복음, 베드로복음, 야고보원복음, 니고데모복음 등 수없이 많다. 외경과 위경의 수는 상당히 많은데 개신교를 기준으로 현존하는 외경과 위경의 수는 구약이 약 40권 정도, 신약이 약 80권 정도 된다고 하며, 신약 위경의 경우에는 9세기까지 포티우스(Photius)가 약 280개의 목록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 수가 엄청나게 많다.

 

구약의 율법서(창세기 ~ 여호수아)는 BC 5세기경에 가장 먼저 정경(正經, Canon)으로 인정되었고,  예언서 (이사야 ~ 말라기)는 BC 200년경에, 성문서(욥기 ~ 아가서)는 AD 1세기에 정경으로 인정되어 히브리어 성경(정경)은 모두 24권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BC 722년경부터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히브리어보다는 중동일대의 공통어인 아람어를 대부분 사용하였으며, BC 333년부터는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다시 지식층을 중심으로 헬라어(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학술용어는 헬라어를 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BC 3세기(중엽)경 유대의 12지파 대표(각6명)72명이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히브리어 성경 24권을 헬라어로 번역하는작업을 진행하여 총 39권을 번역하였으며, 또 당시 여러 형태로 전하던 헬라어 성경 14권도 함께 정리하였다.(이를 70인역이라고 함)

 

그러다가 AD 90년경 유대인 랍비들의 종교회의인 얌니아(Jamnia)공의회에서 히브리어 성경(39권)만을 정경으로 승인하고 나머지 헬라어 성경은 성서로서의 권위를 문제 삼아 경전에서 제외함에 따라 헬라어 성경은 외경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후 313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로마의 가톨릭교회 내에서 헬라어 성경(외경)을 정경(제2경전)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발생하게 되자, AD 382년 로마 주교회의에서 헬라어 성경 중 토비트서, 유딧서, 에스텔서 일부,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 일부, 마카베오서〈상,하〉등 7권을 히브리어 경전 39권(제1경전)과 동일하게 영감을 받은 권위 있는 경전(제2경전)으로 인정하여 총 4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그 후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게 되자 교황 다마소 1세가 예로니모에게 명하여 헬라어 성경(46권)을 로마어로 번역(이를 불가타역이라고 하며 405년에 완성됨)하게 한 것을 1546년 트란트 공의회(1545년-1563년)에서 다시 정경으로 공인하여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에서는 구약 4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개신교(기독교)는 얌니아 공의회에서 승인한 히브리어 성경 39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동방정교회에서는 히브리어 성경 39권외에도 헬라어 성경 12권까지 경전에 포함시켜 총 51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다가 1672년 예루살렘회의에서 바룩(Baruch)과 예레미야의 편지 등 2권을 제외시켜 총 49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신약의 경우 로마의 그리스도교 승인으로 교회 내에 복잡한 분파가 일어나고, 정경 승인 문제로 논란이 일게 되자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만을 정경으로 승인하고 목차를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36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2차 : 성령단일출원설, 교회의 4표식)

- 367년 “아다나시우스”가 신약 27권 정경화 주장

- 381년 콘스탄틴노플 2차 공의회(사도신경 결정)

- 395년 카르타고 회의(신약 27권 승인 후 목차 확정, 동,서 로마제국 분리)

- 431년 에베소 공의회 (3차 : 네스토리우스 정죄)

- 451년 칼케돈 공의회(4차 : 양성의 혼합, 변동, 분리, 분활 불가)

-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차 : 양성론 재 확정)

- 68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차 : 양의론 체택)

- 787년 니케아 공의회(7차 : 화상숭배 인정)

- 869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차: 니케아 신조 재 확인)

- 988년 러시아 블라디밀 황제의 회심과 러시아 정교회 공인

- 1054년 동서 교회의 분리 (상호 파문장 발송)

- 1215년 이노센트 3세가 라테란 공의회(4차)에서 화체설 확정

 

【사본과 번역본 성경 】

BC 722년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BC 586년에는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부터 유대 민족들은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그들의 언어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은, BC 722년경부터 아람어를 쓰는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 등 주변 제국의 지배를 400여 년간 받게 되자 점차 그들이 쓰는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어, 구약성서의 일부 아람어도 이때에 유래하였고,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아람어로 대화하였다.

 

당시 아람어는 중동 일대의 공통어였으며, BC 10세기∼BC 8세기의 언어를 고(古)아람어, BC 4세기 무렵까지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 각 제국에서 사용된 아람어를 제국아람어라 하는데, 아람어는 이집트·에게해·카스피해·인더스강에 걸친 영역까지 퍼져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BC 333년 마케도니아(그리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부터는 다시 유대 지식층들에 의해 헬라어(그리스어)가 사용되어 주로 학술용어로 통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BC 3세기중엽 무렵 히브리어 성경을 학술용어인 헬라어로 번역(70인 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후 BC 67년경부터는 다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로마어가 통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그리스어=희랍어), 로마어(라틴어) 등 4개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을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하였다(요한복음 19:20)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전까지는 위 4개 언어로 일일이 베껴서 전수하였는데, 필사재료로는 파피루스와 양피지, 우피지 등이 사용되었으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의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16세기(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차적으로 기록한 '원본'과 그 원본을 옮겨 쓴 '사본' 그리고 히브리어, 아람어로 기록된 구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한 '역본' 이 있는데, 현재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은 박물관에 수 만권이 있고, 역본은 수 천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오늘날의 서력(西曆)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고 있으나 최근, 사학자들은 유다 나라 헤롯대왕(BC 37∼BC 4?) 통치 말기에 실시한 ‘호구조사령’을 근거로 BC 4년경에 예수가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때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BC 6세기부터 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마케도니아), 로마 등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며, 억압과 구속된 생활을 하여 왔기 때문에 그들의 유일신 야훼(하느님)가 그들 민족을 구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의 세상은 얼마 안가서 끝이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과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새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 ‘메시아(Messiah)’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원어는 히브리어의 마샤(mashiah)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상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종말사상이 팽배해 있었고, 그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이 높아 있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그의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바로 ‘사랑’이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여, 병든 사람과 불구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가까이 하며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으나,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묶여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바리새파)나 제사장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을 자칭하며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구실 하에 반로마 운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도들의 전도〉

하느님으로서 인성을 취한 예수는 신적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으며, 사도 바울이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이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로서의 감독·장로, 부제(副祭)로서의 집사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으며,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가 쓰인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고 가톨릭교회 】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를 지나 2세기 이후 교회의 조직이 정비되면서부터 중세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교회가 형성되기까지의 초대교회를 고(古)가톨릭교회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교회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부여하고 교회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였다.

 

그는《가톨릭교회의 통일에 대하여》라는 저서 속에서,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유일한 구원기관이며, 교회의 주교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적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주장하였다. 그가 사용한 ‘가톨릭’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하는데, ‘전체적’ ‘보편적’ ‘공적’이라는 의미이며, 이 말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로마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어, 오늘날 ‘가톨릭’이라고 하면 곧 로마 가톨릭교회를 가리키게 되었다.

 

키프리아누스 외에 유스티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의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노시스파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성서적인 증언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하였는데 그들에 의하여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격으로써 일체를 이룬다는 삼위일체 신학이 확립되었다.

 

3세기 이후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에 의해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는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는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듯, 그리스도 교인들에 대해 대규모의 박해를 감행하여 무수한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교인들은 더욱 단결하여 믿음을 지키면서 교회를 계속 키워 나갔으므로, 결국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는 그 회유책으로 313년에 밀라노칙령(勅令)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믿어도 된다고 승인하기에 이르렀으며, 325년의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과 같은 신격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392년에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여 결국 로마를 통해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분리〉

  국교로서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게 된 가톨릭교회는 교세를 확장하여 전체 교회를 로마 · 콘스탄티노플 ·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나누어 관할하였으나 7세기경 사라센 제국의 침략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의 세 교구는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교구만 동서 양쪽에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두 교회는 서로마가 멸망(486년)된 이후부터 각각 비잔틴제국과 게르만족 국가 사이의 상이한 정치상황 탓으로 인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데,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는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를 따르고 있었지만, 서방의 로마교회는 황제권과는 독립적으로 로마주교가 유럽 가톨릭교회의 수장의 지위를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점점 콘스탄티노플 교회와는 협조체제는 무너져 갔으며, 이후 11세기에는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와의 정면충돌로 인해 서로를 파문하는 등 결정적인 분열을 초래하게 되자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로마의 가톨릭교회와 갈라져 동방정교회로 정착하게 되었다.

 

〈 로마 교황의 탄생 〉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교황’의 개념은 없었으며, 단지 각지 교회의 주교 가운데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로마의 주교’라는 개념만이 있었다. 이 특별한 지위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 교회가 창립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12사도 중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반석’이라는 뜻)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마태 16:18)고 말함으로써 그에게 전체 교회를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사도들은 각지로 흩어져 예수의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했고,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 역시 안티오키아와 로마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다가 카리굴라 경기장에서 순교하여 바티칸 언덕의 무덤 지대에 묻혔는데, 몇 세기 뒤 그 자리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이것이 바로 로마, 그 중에서도 특히 바티칸이 가톨릭교회의 본산이 된 배경이다.

 

베드로가 죽은 뒤 그의 후계자들(로마 교회의 주교들)은 자신을 베드로와 동일시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초대교회에서 베드로가 차지했던 특별한 위치와 일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특히 동로마와 분리되어 독자의 노선을 걷게 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교권이 속권(황제)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 주교를 수장으로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훗날 로마 주교가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교황을 뜻하는 “파파”(papa, 영어로는 pope)'란 호칭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본뜻은 '아버지'이다. 이 호칭은 가톨릭교회 내 일반주교들과 대수도원의 원장들에게 붙여지던 것이었으나 로마주교 즉 교황에게 국한되기 시작한 것은 서로마가 멸망(486년)되던 시기부터이고, 11세기부터는 완전히 교황에게만 국한되었다.

 

【종교개혁 】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상 가장 파고(波高) 높은 변화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반기를 들고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운동은 몇 가지 시대적 흐름이 한 곳에서 만남으로써 가능하였는데, 그 흐름들은 중세 신비주의·회의주의·르네상스·민족주의 등이었다.

 

독일은 교황청의 착취를 가장 심하게 당하고 있던 지역의 하나였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독일에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 입장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가톨릭교회의 전승주의(傳承主義)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개인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교회의 성사(聖事)와 같은 외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가톨릭의 사제제도에 반대하여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사제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제후들의 보호를 받아 지방군주적 교회통치제를 확립하고, 1529년에는 제후들의 공동커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 측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프랑스 태생의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는데,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같은 흐름을 이루면서도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여 세속적인 직업도 하느님의 소명(召命)으로 보고, 세속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려는 근세적인 종교관을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칼뱅의 개혁운동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개혁파교회’를 형성하며 루터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성공회의 분립〉

한편 영국에서는 특이하게 종교개혁이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서 발단하여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이 곧 교회의 지배자가 되는 ‘수장령(首長令)’이 선포되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영국국교회’로 분립되었는데, 한국에서 성공회(聖公會)라 불리는 이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가톨릭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근대 그리스도교 】

근대 조직신학(組織神學)으로의 새로운 길을 연 사람은 독일의 슐라이어마허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종교론》(1799)과 《그리스도교 신앙》(1822)은 당시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스도교 신학에 새 활기를 불어넣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중반에 J.웨슬리를 중심으로 하여 합리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방법을 요구하게 되어 메서디즘(Methodism)이라 불렸으며, 영국의 산업근로자들에게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널리 전파되어, 감리교회를 형성하였는데 감리교회는 그 뒤 미국으로 전파되어 침례교회와 함께 2대 복음주의 교회를 이룩하였다.

 

근대 교회,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밖에 여러 교파를 파생시켰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Presby-terians)가,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에 의하여 조합교회(組合敎會 : Congregational Church)가 파생하였다.

 

이 조합교회는 곧 미국으로 건너가 큰 교파를 형성하였는데, 조합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작은 교파이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퀘이커파(Quakers)와 유니테리언교회(Unitarian Church) 등과 함께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여, 근대사회에 휴머니즘 신상을 전파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현대 그리스도교 】

현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의 하나로, “교회일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유물론적 경향에 맞서서,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단결하려는 움직임인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910년 이래 루터교 · 장로교 · 성공회 · 감리교 · 침례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운동이 일어났으며, 교회일치운동으로 번역되는 이 운동은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호응을 얻어, 19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일치운동이 목적하는 바의 일치는, 특정한 교리나 의식(儀式) 등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분의 성령이 가져다주는 신앙 정신적 일치를 상호 대화 속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 일치를, 다만 교회 안의 일치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 인류의 일치라고 하는 넓은 관점에서 파악하여,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교회 전체가 일치 협력하자는데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세계 역사 속에서의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

〈가톨릭의 전래〉

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고 있으며, 가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 또는 기독교라고 부르고 있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西學)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이 북경에서 마테오리치의 저서인《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후 천주교로 개칭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으므로 그 결과 공리공론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에 반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운동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는데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전도 없이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성립되어, 세계 가톨릭 전교사상(傳敎史上) 커다란 특징을 이루고 있으나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18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18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金大建)이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나 곧 순교하였고,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에 의한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등 박해를 받다가. 18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 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기독교의 전래〉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85년(고종 22) 부활절에 미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입국하여, 정식으로 선교 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입국하기 전인 1883. 5. 16(혹은 1884. 6. 29)에 황해도 장연에 이미 한국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소래교회(松川敎會)가 한국인 서상륜(1848~1925)에 의해 세워진 바 있으며 그의 아우 서경조(상우)는 후에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중 한 명이 되었다.

 

그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상태에서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러한 혼란 속에서 기독교는 먼저 서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후 교육사업 · 의료사업 · 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개선에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그 후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세계 그리스도교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보였으나, 반면 많은 교파의 분열을 초래하여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비롯, 많은 교파가 있다.

 

〈한국의 기독교 교파〉

장로교 : (長老敎 - Presbyterian Church)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자인 J. 칼뱅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모체로 하여 발전한 개신교의 교파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교리의 핵심은 예정론과 신의 영광에 두고 있고, 예배는 간결하며 설교와 사도신경에 대한 충실을 강조한다.

 

성찬예식(聖餐禮式)은 전통적으로 지켜지도록 되어 있으며 설교와 성찬을 교회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고, 미국의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캐나다의 연합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그 흐름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는 1884. 9. 20 북장로교 소속 알렌이 의사신분으로 입국, 의료선교를 시작한 후, 1885. 4. 5 부활절에 미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인천항에 입국한 이후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1887년에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서울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해방 이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단일교단으로 존속하다 1952년 9월 고신측이, 1953년 6월 기장측이 각 분립한데 이어, 1959년 9월 WCC (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와 에큐메니칼 운동(교회일치 운동)에 대한 노선차이로 인해 총회가 찬성파인 통합측과 반대파인 합동측으로 양분되었으며, 특히 분열 이후 통합측은 분열이 없었으나 합동측은 다시 수많은 교단으로 재 분열되어 예장에 속한 다수의 교단이 합동에서 갈라져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합동측은 1979년에 분열했던 개혁측 교단이 2005년 6월 합동측과 재결합함으로써 1만 교회 400만 신도가 넘는 초대형 교단으로 변모되어 있어 교세는 통합측보다 크지만 학교나 병원 등의 기관은 통합측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연세대, 숭실대, 서울여대, 계명대, 한남대 등은 모두 통합측에서 이사를 파송하는 대학임) 교육부에서 정규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 역시 통합측이 가장 많다.  

 

<장로교 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 1952. 9. 예장총회에서 분립 (개혁보수)  

- 기독교대한장로회 (기장) - 1953. 6. 예장총회에서 분립 (진보)  

-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 1959. 9. 합동측과 양분 (중도보수)  

-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 1959. 9. 통합측과 양분 (보수)         

-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 1981. 9. 합동측에서 분립 (보수)  

-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 1961. 6.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로 창립

위 교단 외에도 100여개 이상의 군소 교단이 난립하고 있으며, 감리교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세를 이루고 있다.  

 

감리교 : (監理敎 - Methodist Church)

18세기 중엽 영국 성공회 사제인 존 웨슬리(John Wesley) 신부가 창시한 개신교 교파다.

 

웨슬리 신부는 모교인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모라비안(15세기 보헤미야, 모라비아 지방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요한 후스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종교집단)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경건주의(敬虔主義-성경적 완전주의)를 주장하였는데, 그는 1735년부터 2년간 식민지시대의 미국 조지아에 전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귀국하여 좌절감에 빠져 있던 어느 날 회심경험(回心經驗)을 하고나서부터는 열심히 길거리나 야외에 나가서 설교하고 각지로 전도여행에 나서며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방법을 요구하게 되어 메서디즘(Methodism)이라 불렸으며, 영국의 산업근로자들에게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널리 전파되었지만, 본인은 평생 성공회 사제로서 교회에서 사목하였고, 순회설교와 사회빈곤층 복지실천을 통한 산업선교와 사회복지의 업적을 남겼다. 감리교가 성공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하게 된 것은 웨슬리가 죽은 뒤였으나 그것은 그가 1784년에 미국에 파견한 선교사들, 특히 아스베리의 전도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는 1885년 4월 미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가 입국하면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1887년에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서울 정동제일 교회가 세워졌고, 현재 장로교와 함께 가장 큰 교세를 이루고 있다.  

 

< 감리교 교단 >  

- 기독교대한감리회 (기감) - 정통 교단  

- 예수교대한감리회 (예감) - 1962. 8. 28 창립

 

성결교 : (聖潔敎 - Holyness Church)

19세기말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카우만, 킬보른 등이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성경적 완전주의 입장을 재강조하며 1901년 2월 일본 동경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면서 생겨난 개신교의 교파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4가지를 4중 복음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중 성결을 가장 강조하는 교리를 갖고 있다. 한국에는 일본 동양선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김상준·정 빈이 귀국하여 1907년 5월 서울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운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며, 처음에는 주로 개인선교와 노방선교 등의 직접 선교방식을 취했으나 1922년부터 교단잡지인《활천(活泉)》을 발행하는 등 활발한 문서선교활동도 펼쳤다.

 

1961년에 에큐메니컬운동을 둘러싸고 교회가 양분되었다가 1965년 7월 다시 통합되었지만 1973년에 다시 기성, 예성, 중도파 등 몇 개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신학대학교로는 성결대학교(예성)와 서울신학대학교(기성)가 있다.  

 

< 성결교 교단 >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성)  

-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예성)

 

침례교 : (浸禮敎 - Baptist Church)

영국의 청교도 J. 스미스와 T. 헬비스가 1612년 최초로 런던에 침례파 교회를 세우면서 창시된 개신교 교파다. 이 교파는 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절대권위와 규범으로 삼으며,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행하고,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입각한 일반침례파와 칼뱅주의에 입각한 특수침례파로 구분되며, 미국에서는 1639년 청교도 R. 윌리엄스에 의해 로드아일랜드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설립되어 현재 미국 최대 교파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는 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M.C.펜윅이 입국하면서 전파되기 시작,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교단 산하에 침례신학대학·침례병원·한국침례회진흥원 등을 비롯한 10개기관과 65개의 지방연합회가 조직되어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전국 교회수 약1600여개에 교인수는 50만에 달한다.  

 

그러나 침례교 중 속칭 “구원파”로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 유병언 계열)와 “대한예수교침례회”(이요한, 박옥수 계열)는 왜곡된 구원관으로 인해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있다.

 

< 침례교 교단 >  

- 기독교한국침례회 (기침) - 정통 교단  

- 기독교복음침례회 (권신찬, 유병언 계열) -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 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 박옥수 계열) -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하나님의 성회 : (The Assembly of God) - 순복음 교회

1900년 감리교 부흥사였던 파함(C. F. Parham) 목사가 캔자스주 토페카시에 벧엘성서신학교를 세워 4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령부흥운동에 뛰어들면서 탄생한 개신교의 교파다.  

 

한국에는 1953년 미국 선교사 채스넛(Arhber Cheesnut) 목사와 허홍 목사 등 11명이 성회를 개최하면서 교단이 창립되었는데, 초기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기하성)로 출발했으나 교권을 쥐고 있었던 일부 세력이 이단 시비를 문제 삼으면서 내분이 생겨 1981년 기하성 서대문측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동생 조용목 목사를 중심으로 한 기하성 반포측으로 분열됐다.

 

기하성 반포측은 1985년 다시 순신학원 이사장 문제로 분열하여 조용목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예하성)가 새롭게 조직되었는데 이 두 교단에도 속하지 못한 세력들은 기하성 수호측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결성해 3개 교단으로 분열했다.    

 

그러나 이들 3개 교단은 2007. 8. 2 서울 서교동 서교호텔에서 회합, 3개 교단을 “하나님의 성회”란 단일 교단으로 통합키로 합의한 후 2007. 10. 15 통합선포식을 갖고 총회장에 조용목 목사를 추대하여 분열 26년만에 단일 교단으로 재통합이 되었으며, 이로써 교세도 교회수 2,920개 교회(기하성은 2,500개, 예하성은 370개, 수호측은 150개)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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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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