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on the way to heaven

주님을만난사람들

[스크랩] < 나의 간증 미국 생활 #1 >

샤론의 수선화 2012. 4. 7. 22:27

*오늘 부터 시리즈로 나의 미국생활 간증을 시작하고자 한다.. 나의 간증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시는 분이 한분이라도 있으시길 기도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 나의 간증 미국 생활 #1 >



나는 끔찍한 사고와 견딜 수 없는 육체의 고통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인 문제를 계속 적으로 겪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릴 뻔 한적이 여러번 있다.
돈에 미친 전 남편은 아들에게 먹일 음식이 떨어지고 냉장고가 텅 비어있어도 돈이 아까워 시장갈 돈을 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22 살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시집와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앞뒤 분간도 못하던 나였지만 갓난아기 였던 첫아들에게 먹일 것이 없어서 몇날 며칠을 쌀죽만 먹여야 했었다.
1 불 조차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게 쓰는 것이 아까워 한 그사람은 그 와중에 알콜 중독에 마리화나 중독자였다.

아들은 매일 아침 눈떠서 잠들기 까지 배가고파 울어댔고 나의 입으로 들어갈 음식 같은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20 여년전만 해도 미국사람들은 그나마 인정이라도 있어서 매일 굶고 있는 나와 아들에게 간혹 빵을 가져다 줘서 겨우 허기를 달랠 수는 있었다.

미국에 처음 와서 2년간 남편은 의료기구 회사에서 일하며 그 받은 돈으로 술과 마리화나만 사먹기에 바빴다.
아기가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어도 타이레놀 하나를 사주지 않던 사람이다.

그나마 한국서 가져 왔던 돈은 마약 중독자인 세째 시누이가 미국에 도착해서 얼마 되기도 전에 내방에 들어와 훔쳐가서 마약을 구입하는 돈으로 모두 날려버린 상태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어머니 집 다락에서 시작한 첫 미국생활.. 그집에는 시어머니와 애들아빠의 외할머니 그리고 마약에 찌들어 살던 세째 시누이 그리고 우리 세 식구가 첫 해를 함께 살았다.

어릴적 부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던 나로서는 그 모든 것이 낯설고 암담하기만 했었다.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의 시할머니에게 노예 취급을 받으며 두들겨 맞는 것은 그나마 참을 수 있는 고통이었다.
매일 밖으로 놀러다니느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남편, 가끔 집에 들어오더라도 술에 너무 취해 대화 조차도 할 기회마저 없는데 그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세째 시누이의 폭력이었다.

매일 내게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했고 한국서 가져온 돈과 내 옷가지, 악세서리는 이미 그 여자에게 모두 빼앗긴 상태에서 더이상 그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내놓으라고 매일 소리를 지르며 내가 없다고 하면 나에게 주먹질을 하며 폭행을 일삼고 그 광경을 1살도 않된 나의 아들은 고스란히 목격하고 있어야 했다.

하루는 아기를 1층 부엌에 놔두고 3층에 있는 다락에 무엇인가를 가지러 간 사이… 아래층에서 아기의 자지러지도록 숨이 넘어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급한 마음으로 단숨에 내려간 1층 부엌에서 목격된 모습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다.

내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발광을 하던 세째 시누이는 아기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우유만 먹는 아기를 하이체어에 앉혀 놓고 입을 벌려 핫소스를 병채로 아기의 입속으로 쑤셔 넣고 있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마자 나는 순간적으로 그야말로 공중에 나르듯이 달려가 나도 모르게 오른발로 그 여자의 얼굴을 강타해 버렸다.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시커매지기 까지 하는 아기는 숨울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나는 아기를 내품에 끓어안고 맨발로 무조건 밖으로 뛰어나가 달렸다.
다행히 집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 아기는 목숨을 건져지만… 나는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

한국에 있는 엄마는 며칠에 한번씩 전화가 와도 나는 늘 거짓말을 했다. “나는 잘살아,, 맨날 파티 다니고 얼마나 재밌게 사는데”…. 라며…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결혼했던 이 사람과 미국으로 들어올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미국사람과 결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가 없어 쇼크로 쓰러지셨었다.
그런 엄마에게 차마 이곳에 삶을 그대로 얘기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 들어와 1년간을 시어머니 집에서 그렇게 핍박을 받으며 지옥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때 연락도 없이 현관에 찾아온 엄마… 매일 전화통화에서 느껴지는 나의 슬픔이 느껴져 걱정이 되셨던지 나에게 말도 없이 미국을 찾아 오신 것이다.

엄마는 나의 거지같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자마자 충격에 빠졌고 시할머니가 키우고 있던 여섯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배설한 배설물의 냄새로 진동하는 다 쓰러져가는 필라델피아 도시 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한 흑인 골목에 위치한 이 허름한 집을, 엄마는 잘도 찾아 오셨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엄마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구토를 일으키셨다.

아기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바짝 말라있었고 나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구타를 당하다 보니 이곳저곳 몸에 멍투성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신 엄마는 그대로 나와 아들을 데리고 나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백인 동네에 집을 장만해주셨다.. 엄마의 가슴에 대 못을 밖은 불효한 딸이다…

결혼전 한국 남자들에게 받은 충격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내가 미국사람과 결혼해서 한국땅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을때 엄마와 아버지는 극심한 충격을 받으시고 반대하셨지만 내가 한국서 어릴적 겪은 일들을 아시는 부모님으로서는 나를 끝내 말리실 수가 없이 “그래 한국을 떠나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인생을 시작해라” 라고 말하시며 미국을 보내주셨던 분들이다.

아버지는 병원을 운영하시고 엄마는 사업을 늘 하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 없이 자란 나는 7살때부터 성폭행이라는 사탄의 역사가 결혼전까지 끊이질 않았었다.

초등학교 내내 반에서 일등을 하던 나는 중학교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를 여자로 사랑?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성폭행이 일어났고… 정신 병에 걸린 그 남자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찾아와 날 불러내 빵집을 데리고가서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는 강요를 해댔다..

사랑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던 어린 나에게 그는 너무나도 가혹한 평생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큰 상처를 남겨주었다. 유명 중학교의 유명선생…. 그 사람이 아직도 그 학교에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하지만…. 옛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나이가 들었어도 찾아 볼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혹시 다른 여학생을 나처럼 괴롭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신문사 사장까지 되었던 나는 그를 이제 잡기에는 증거 불 충분으로 너무 늦었음을 알기에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이미 그를 용서했지만 혹시 모를 여자 아이들이 그사람으로 부터 고통을 받게 될까봐서이다..

그는 나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며 자신이 다니는 종교에 속한 고등학교로 나를 데리고 갔고… 남녀 공학이었던 그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던 같은 반 남자녀석은 나를 미워하다 못해 망가뜨리겠다며 강간을 했다… 그리고 이어진 인신 매매 납치 사건….대학교 1학년때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첫사랑..우리 부모에게 결혼 승낙까지 받으러 왔던 그 남자는 알고보니 유부남이었고 나는 그렇게 배신을 당했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절대음감을 가졌다는 나는 어릴 적 부터 피아노를 독학으로 마스터 했고 교회 지휘자가 전해주는 악보가 없는 외국곡 테이프를 들으며 악보를 만들어 줄정도로 뛰어난 작곡 재능은 제대로 발휘도 못하고 어릴적 부터 겪은 충격적인 일들로 인하여 자포자기 하고 대학도 원치 않는 그 종교의 부속 대학 음악과에 차석으로 들어가 과대표 까지 했지만..

결국 중학교 선생의 끊임없는 괴롭힘, 고등학교때의 사건 사고등의 충격… 이어진 사랑의 배신... 감리교였던 나로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의 채플…. 결국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고통으로 희망을 잃고 그 대학교 마저 스스로 나와 버렸다..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일어난 도무지 이해할 수도 상상 할수도 없는 억울한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 조차도 없는나였지만 하나님은 일찌기 초등학교 3학년때 부터 나에게 임해주셨다.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아주 어릴 적 부터 사탄과 하나님이 나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파란 만장하고도 치열한 삶을 살아 왔다.

주님은 마치 이미 내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될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 처럼 나를 초등학교 3학년때 홀로 교회로 부르셔서 성령으로 임해주셨다.
교회 방문 첫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마자 얼굴과 입에 마비가 오며 방언이 터져 나왔으니 말이다.

중학교때는 교회에서 가는 정신 박야가들이 모여있는 산촌에 들어가 여름 선교 봉사활동을 하는일에는 빠짐없이 ?아 다녔었다..

이러한 삶을 어릴적 부터 살아온 나,,, 그리고 이어진 도피결혼… 미국 까지 찾아와 거지의 몰골을 하고 있는 나와 굶주림에 지쳐 영양 실조 상태에 빠진 첫 손자를 대면한 엄마의 심정은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셨지만.. 나보다 더 참혹 하셨을 것이다…. 나같은 딸을 키우신 엄마의 인생도 불쌍하다…

그런 엄마는 내가 미국가서 잘 살기를 바라셨던 마음이 더 간절하셨겠지만 엄마의 눈에 비친 나의 첫 미국생활은 그야말로 인생이 끝난 사람처럼 보이셨던 것이다..

우는 아기 가슴에 안고 엄마는 내게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첫 집을 얻어 주셨고 내게 생활비 오천불을 손에 쥐어 주시며 한국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되돌아 가셨지만..
그 나마도 남편은 그 돈을 가로채갔고 나는 그이후로 그 돈은 구경조차도 하지 못했다.
매일 배가 고팠지만 아기의 배고파 우는 울음 소리는 나의 배고픔 따위는 생각조차도 못했으니까..

집에는 오직 남편이 마시다 남은 술병들만 널려져 있었고 나는 배고픔과 괴로움을 그리고 그보다도 더 처참한 외로움을 참지 못해 술이라도 매일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알콜 중독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아기를 끌어 안고 희망도 없이 울기만 하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하루는 아기와 방에서 잠에 들었는데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서 내려가 보니 아이의 아빠는 백인 여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세상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일을 겪어도 화가 나질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초등학교 3학년때 내게 찾아와 주신 하나님이셨다..

인신매매단에 끌려갔을때 구해주셨던 하나님이 셨다..
그러나 이제는 배가고파 우는 아기를 끌어 안고 매일 눈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하나님… .. 나는 어떤 고통도 감당 할 수 있다… 인생을 버틸 힘조차 없어 포기해 버린 나였지만…… 아기까지 버리란 말씀인가…. 대답이 없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화려한 교회에 가 계신 것인가… 내가 참지못했노라고 내가 이런 모든 상황을 인내하지 못했노라고 화가나셔서 날 버리신 것인가….

냉정한 하나님을 원망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아기를 부등켜 안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너무나 괴로워 그 괴로운 마음 주체 할수 조차 없어서 방바닥을 무릎으로 엉금 엉금 기어다니며 통곡을 했다..매일 밤 찾아오는 외로움과 슬픔에 나는 그렇게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렀다… 살려달라고…살려달라고…..나를 차라리 데려가시고 아기를 살려달라고….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믿어져서도 아니었다…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실 것을 믿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의지 할 곳이 하나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울며 불며 매달린 것이었다… … 그분의 이름을…..

여자들과 얼싸안고 술판을 벌이는 남편의 모습을 아무런 감정도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남겨줘라 내일 애라도 먹이게.... 매달 20일 분 정도만 아기의 우유를 사다 주는 저런 인간도 하나님이 만드신 아들이겠거니... 자식의 굼주림을 보고도 아무런 아픔을 못느끼는 냉혈인간 이지만... 사실 그를 그렇게 만든것은 돈과 술이었다.. 돈 앞에서는 처자식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다시 아기방으로 돌아와 술병을 잡으려는 순간 .. 내 눈에 목격된 아들의 모습…… 아기가 잠에서 깨어나 빈 우유병을 빨며 배가고파 허기가 진 목소리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울다가도 우유병을 다시 빨고 또 우유가 없으니 울기를 반복하는 그 모습에 나는 마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마냥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엇인가 내안에 예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살아야 한다 라는 욕구……그리고 혀를 깨무는 결심…… “그래 내가 미국 생활을 몰라도 난 내 아들을 살리고 난후 죽을 것이다”

바로 방안에 있던 모든 술병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리고 밖으로 가져다 버렸다..
영어도 아직 서툴고 미국에 익숙치 않아 방향감각도 없지만.. 난 아들을 살리고야 말것이다.. 이데로 같이 죽을 수는 없다라는 욕망이 내 마음에 불타올랐다… 밤새 잠 한숨 안자고 생각했다.

어디에 가서 돈을 벌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자리를 찾으러 다닐 교통비 조차 없는데….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나를 외면하시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버리시기 전에 저의 마지막 부탁은 들어주시고 버리세요…. 저.. 아들 살려야 합니다… 일자리만 주세요…. 그리고 아들 혼자 먹고 살만큼만 벌게 해주신다음 그리고 버리세요”…..
이것도 기도냐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기도였다….

동이 터오자마자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도 못하지만 무조건 나갈 채비를 했다…. 남편은 술에 취해 잠에 들어 있었고 나는 몰래 자동차 키를 가지고 아기를 차에 태우고 무조건 운전을 하고 거리로 나갔다…

7 eleven 에 들렀다…” 혹시 사람 구하나요? “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그 사람이 야속했지만… 나는 포기 할수 없었다… 무작정 식품점, 옷가게, 레스토랑 등등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내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아기 우유병에 물과 설탕을 담아 가지고 나온 젖병에는 그 물 마저 떨어졌고 아기는 계속 차안에서 울다가 지친 기색을 하고 잠들어 있었다….
눈물이 주체 할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운전을 하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엉 울었다…또다시 어릴적 부터 겪었던 일들이 비디오처럼 내 머리속을 지나갔다...

정녕 하나님은 날 버리신 것인가….하나님 당신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에게 복수하시는 겁니까...절규를 넘어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며칠째 어디론가 정처없이 여기저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데… 문든 멀리서 햐안 색의 자그마한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 왔다…. 멀리 있고 작은 교회였지만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한글로 된 간판 “한인 교회” ...이런 시골에 한인 교회 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차를 몰고 그 교회로 향했다…

주차장에는 차가 몇대 서있을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동안 차에 앉아 그 교회를 바라보며 내가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가…. 날 도와줄 하나님 조차도 나를 외면하시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교회를 바라보고 차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침 어떤 한국 남자가 교회 건물에서 나왔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창피한 생각이 들어 차 핸들 밑으로 고개를 숨겼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 차로 다가오더니 창문을 두드렸다…
.
나는 눈물이 범벅되어 튕튕 부은 눈을 손으로 훔치며 창문을 내렸다….
“저는 이 교회 목사입니다… 혹시 교회를 찾아 오셨나요? “
이분의 손에 이끌려 아기와 함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이 목사님은 나에게 무슨일이 있느냐며 자세히 물었고 나는 펑펑 울면서 목사님에게 자초지종 을 설명해 드렸다..
목사님은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마디 말씀도 없이 끝까지 들어주시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목사님은 내 얘기를 다 들으신 후 말씀을 꺼냈다….

배고프시죠…. 밥부터 먹읍시다….. ㅠㅠㅠㅠㅠㅠㅠㅠ ……..

그때 목사님이 주신 밥이 내가 미국에 와서 거의 1년 반 만에 먹어본 한국 밥이었다.
아기도 허겁지겁 밥을 받아 먹었다… ㅠㅠㅠ

그리고 난 후 목사님은 내게 기도를 해주시겠다며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눈물을 쏟아내시며 안수기도해주시는 그 목사님의 손은 불덩이 같이 뜨거웠고 나도 펑펑 울면서 기도했다..

목사님이 기도를 마친후 나와 아기의 손을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자매님을 특별히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부르시고 계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할 분이십니다….순종하세요…. ㅠㅠㅠ….

나는 그 당시 그분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밥을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순종하겠노라고 약속을 드렸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며 오피스로 들어가시더니 어딘가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나오시더니 내게 종이 쪽지를 하나 주시며 말씀하셨다..

“여기는 창문 블라인드를 만드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거기에서 일을 많이 해요… 그곳에 얘기를 해 놓았으니 내일 거기를 찾아가 보세요”…..
이렇게 나는 미국에 와서 첫직장을 얻게 되었고.. 나와 아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편으로)

*앞으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 로이를 찬양하는 삶으로 독수리 비상하듯이 날아오른 나의 삶을 통해 살아계시고 부활의 역사를 우리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여러분들께 증거하려 한다...

출처 : Jean 의 골방
글쓴이 : Jean H Cumming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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