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의 배경적 이해
신약 성경 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의 배경적 이해
신인철 목사
남아공 사랑의 교회
1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읽는 독자가 성서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서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은 성경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지름길 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서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적 배경은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보다 정확한 성경 해석을 위해 성서배경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신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서 사마리아라는 주제를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 성경을 읽다 보면 사마리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 독자들에게는 이 사마리아란 곳이 구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구약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있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지역적 배경을 사마리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약 성경의 독자들은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장면을 통해서 사마리아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평신도 독자들이 누군가에게 사마리아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면, 사마리아의 역사, 종교, 문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마리아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은, 그들이 유대인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거나,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신약학자들이 사마리아에 대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 역시 신약 시대에 유대인의 한 공동체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배경적 이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에게 보다 올바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사마리아의 기원에 대해서 고찰하려고 한다 둘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사마리아의 역사에 대한 고찰도 일부분 함께 이루어 질것이다. 셋째, 사마리아인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들의 신앙이 유대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단순 비교하는 형식으로 고찰할 것이다. 넷째, 사마리아인들의 축제와 행사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의 언어와 문학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2 사마리아인의 기원
지정학적으로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약 33km 떨어진 팔레스틴의 내륙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열왕기상 13:32절에 사마리아는 도시로 묘사되어 있는데 여로보암 당시만해도 사마리아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약 50년이 지난 후 북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이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했다. BC 880년경 오므리 왕은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기 위해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구입했고 본래 주인인 세멜의 이름을 따라서 사마리아라는 명칭을 붙였다(왕상 16:24절). 사마리아는 히브리어로 솜론(Shomron)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현대어로는 세바스테(Sebaste)이다. 아모스 3:9절에서 사마리아를 산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므리는 사마리아가 자연적 요새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결정을 한 것 같다. 따라서 사마리아라는 명칭은 곧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받아들여졌고,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사마리아성은 많은 침략자를 막기에 적합한 천혜의 요새였지만 역사를 거듭하면서 이어지는 수많은 외침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공격으로 사마리아성이 무너지면서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고, 그들의 관공서가 자리하게 되었다. 파괴된 사마리아성은 기원전 30년 헤롯 대왕에 의해서 재건축 되었고 , 이후 사마리아는 하나의 도시가 아닌 사마리아 지방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신약 성경에는 사마리아를 지방적인 의미로 사용한 부분이 많다.
이제 사마리아인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기원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다스리고 있었다 (왕하 17:1절). 앗수르 왕 살만에셀(Shalmaneser)의 공격으로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멸망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메데 지역에 분산 수용되었다 (왕하 17:2-6절).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지역으로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그리고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여러 성읍에 정착시켰다(왕하 17:24절). 이러한 앗수르의 정책은 점령지에 대한 통치 관습중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사자들을(Lions) 보내서 몇 사람을 죽이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왕하 17:25절). 사마리아로 이주한 이방 백성들은 앗수르 왕에게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마리아 출신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을 돌려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사마리아로 돌아온 제사장은 벧엘에서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백성들은 각자 자기들의 토속 신을 섬겼다 (왕하 17:24-41절). 결국 사마리아는 종교적으로 혼합이 이루어졌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이방 종교의 전통들이 사마리아 전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이방인과의 혼합을 비웃으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구데스(Cuthes) 또는 ‘사자에게 개종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위에서 제시한 유대인들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들은 요셉 족속의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직접적인 후손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이 해외로 추방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마리아에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아있었고 55년이 지난 후 해외로 추방된 백성들은 다시 돌아왔으며, 그들의 자녀들이 사마리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유대인들과 분리된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그리심산에 세워져야 한다는 모세 율법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엘리가 불법으로 성전을 실로에 세우면서부터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가 앗수르라는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앗수르의 침략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타 민족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인 사마리아 지역에 정착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과연 얼마나 많은 이방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마리아 지역 백성들이 해외로 강제 이주를 당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이곤 (Sagon)은 2만729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외로 이주 시켰다고 기록했다. 열왕기하 15:19-20절에 의하면 앗수르 왕 불이 와서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은 1천 달란트를 지불하고 위기를 모면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역대하 34:9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거둔 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사마리아 지역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전 수리 비용을 냈고, 성전 수리를 위해서 이 돈을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앗수르는 점령지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외로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평민 계층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종합한다면,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지배를 받는 동안 분명히 이방인들이 이주해 왔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혼합되었다는 견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인들의 기원에 대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견해를 부인하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견해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에 의해 정복 당한 후 유대인들로부터 혼합주의에 빠진 절반은 이방인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예로, 유대 문학에 따르면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분류 기준으로 절반은 이방인이라는 내용들이 기록되어있다. 결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순수성을 어느 정도 상실한 부분이 있지만 유대인들의 견해처럼 사마리아인들을 완전히 이방인으로 치부하는 것도 무리가 따를 것이다.
3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반감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흐르는 반감을 논할 때는 언제나 충돌이 예상된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갈등하게 된 것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리될 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남북 왕조가 갈라진 것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였을 뿐이라는 견해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므리 왕조 시대에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아주 좋은 관계를 형성한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은 반감의 시작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본국으로 귀환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민족적 순수성의 문제로 인하여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다는 견해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가지는 반목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아마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이 깊어진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의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의 행위였을 것이다. 성전 건축에 동참하려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거부 당하자 그리심산에 사마리아 성전을 세우고 여호와를 예배하였다. 이 성전은 기원전 128년에 요한 히라크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다. 성전 파괴 사건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지탄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요한 히라크누스 (Hyrcanus)는 기원전 108년에 사마리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모든 지방을 자기 영토로 편입을 시켰다. 그는 또한 사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자기 통치 지역이 종교적,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에 귀속되도록 시도했다. 히라크누스(Hyrcanus)의 이러한 정책은 헬라화된 사마리아 성읍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유대교에서 분리하려는 세력으로 간주했으며, 그들을 처벌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아주 강력하게 저항을 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BC 65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단지 종교적인 공동체만 회복하게 되었다. 로마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으로 많은 통치의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의 기본 정책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뚜렷한 종교 문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랍비 문학에 담긴 내용들이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화되었다. 헤롯 대왕의 부인 중 한 사람인 말테세 (Malthace)는 사마리아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아마도 헤롯은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가 보다 건설적이고 평안하기를 원한 것 같다. 그러나 AD 6-9년경에 사마리아인 몇 사람이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 성전에 뿌리며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서로가 가진 오랜 증오를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후손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참여하는 것도 배제되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사마리아인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교제하는 것도 많은 금지 조항을 두어 제한시켰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은 신약을 읽는 우리들에게 유대인들이 가진 사마리아인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 이해 할 것 인가를 전반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마태복음 10:5절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는 들어가지도 말라는 기록이 있다. 이 구절은 사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복음서는 한 시대만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시대와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가 활동한 시대가 시간적으로 겹쳐져서 묘사되어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마태 공동체가 사마리아 선교를 반대했다는 견해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단지 사마리아에 대한 반감을 근거로 한 묘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누가복음 9:53절에는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후 율법사에게 누가 선한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율법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서 단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하였다. 율법사는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를 회피함으로 인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러한 누가복음의 기록 역시 사마리아에 대한 반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는 아주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요 8:48). 그러나 이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사마리아에 대한 선교를 부정 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 1:8절에서는 사마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으로 보는 것 보다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사마리아인에 대한 선교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유대교와 분리된 기독교 공동체는 사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년)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러한 결과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4 사마리아 인들의 신앙
사마리아인들이 나름대로 형성한 신앙을 살펴보는 것은 신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들의 신앙에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책은 ‘사마리안 모세오경’(Samaritian Pentateuch)과 ‘탈굼’ (Targum)이다.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살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는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다. 둘째는 모세에 대한 중요성이다. 셋째는 모세오경에 대한 태도이다. 넷째는 그림심산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지막 날에 받게 될 보상과 심판이다.
4.1 하나님
사마리아인들 신앙의 핵심은 유일신 사상이며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영적인 존재로 믿는다. 유대인들이 믿는 것처럼 사마리아인들 역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인식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을 영광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믿으며,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처럼 존귀한 분으로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모든 것을 아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출 3:14절).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믿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들과 특별한 계약을 맺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 역시 자기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Shem (유일한 이름)라는 단어로 대신하여 호칭 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칭하는 엘(El), 엘하(Elah)를 잘 사용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야훼(Jahwe)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있다.
4.2 모세
사마리아인들이 가진 모세에 대한 개념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가진 개념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들은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이자 최고의 예언자라고 주장 한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으며 모든 사도들보다 뛰어나다고 믿는다. 이 말의 의미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대화 통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빛에 비유했다면(요 1:5절) 사마리아인들은 모세를 빛에 비유했다. 모세는 세상의 유일한 빛이며, 그는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 했으며, 나중에 그의 부모를 통해 육신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모세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자세는 신적인 개념을 능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4.3 모세오경 (사마리아 모세오경)
제1 성전 시대에는 (the First Temple)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동일한 필사본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아람어의 영향으로 서로의 필사본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사마리아 모세 오경이 아람어로 번역된 것은 BC 1세기 말과 AD 11세기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 진 것 같다. 그들은 모세 오경을 하나님이 주신 성경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언서나 다른 구약의 책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세오경은 진실되며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이 모세오경을 직접 썼고 그것은 영원하며 불변 하다고 믿는다.
사마리아인들의 모든 예배 시간에는 모세오경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서였고, 모세 오경을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세오경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맛소라 (유대 모세오경) 사본과는 근소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든다면, 신명기 18:15-18절에 있는 모세의 예언자에 대한 예언이 사마리아 모세오경에는 없다. 모세의 예언이 호렙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기록된 내용을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모세오경에서 제외시킨 것은 그리심산의 거룩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것은 모세 오경의 정경화가 이루어질 때 유대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이미 분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통해서는 유대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언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4.4 그리심산
사마리아인들의 신앙 생활의 중심은 그리심산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심산은 하나님과 모세오경에 의해서 거룩한 장소로 구분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심산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든 십계명에 그리심산을 덧붙였고, 신명기 11:30과 27:2-8절의 내용을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번역본과 사마리아 본문 신명기 27:4의 내용은 그리심산에서 축복 에발산에서 저주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받아들인다.
그리심산은 이미 창조 이전에 선택되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그리심산 만이 유일하게 노아의 홍수를 피했고, 마지막 심판 때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그림심산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첫번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곳으로 알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아담과 이브가 처음 만난 곳도 그리심산 이라고 믿는다. 마지막 날에는 생수의 시냇물이 그리심산에서 흘러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궤 역시 이곳에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이곳에서 찬란한 빛이 비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 같이 그리심산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강조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여러 산들을 그리심산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했다. 예를 든다면 창세기 10:30절의 ‘동편 산’, 28:17절의 ‘하늘의 문’, 28:19절의 ‘벧엘’, 그리고 출애굽기 15:17절의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그리심산으로 해석했다.
4.5 종말에 받게 될 보상과 심판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종말관이 있다. 마지막 날 받게 될 보상과 심판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신명기 32:34-47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시고 저울에 무게를 다는 것처럼 심판을 하신다고 믿는다. 천사들이 마지막 날 인간들의 행위에 대해서 잘못을 고소하거나 변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할 것이며 땅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모세가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선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은 좋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 깨끗한 옷을 입고 사랑의 향기를 날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누더기로 몸을 가리고 악취를 풍길 것이다. 심판을 받은 후에 행복한 삶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은 에덴으로 들어가서 모세, 아론, 그리고 영적인 선조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뜨거운 불이 있는 곳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가인, 라멕, 고라, 아멜렉과 다른 악한 죄인들과 같이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부활의 날, 청산의 날, 그리고 공평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마지막 날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타헵 (Taheb)이 올 것으로 고대한다. 타헵 (Taheb)의 원래 이름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타헵 (Taheb)은 어떤 것을 회복시키거나 수확을 나타내는 자동사이거나 사역동사이다. 그러나 타헵 (Taheb)은 전능자나 메시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4:25, 29절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그녀가 가진 심판자의 개념은 유대인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개념인 타헵(Taheb)의 역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신명기 18:18절에 언급을 전제로 한 마지막 선지자 일 것이다. 그는 기적을 행하며 율법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는 또한 그리심산에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어 희생 제사를 회복시킬 것이며 이방인들 역시 그를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5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축제와 실재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달력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아랍의 영향을 받으면서 단지 제사장들만 축제일을 계산할 수 있을 정도로 달력의 계산법이 복잡하게 되었다. 현재 사마리아인들은 양력과 음력을 겸하여 사용하는데 1년을 354일로 계산 한다. 그리고 1년을 12달로 나누고 매달을 29일이나 30일로 고정을 시켜두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을 중요한 3대 절기로 지내고 있다. 3대 절기가 되면 그리심산을 순례하는 행사를 하는데 오순절은 언제나 유월절 안식일이 지나고 15일 후가 된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언제나 주일이 된다. 축제의 주된 행사는 속죄 일에 모두 금식을 하고 모세오경을 읽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안식일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다. 안식일에는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집을 떠나 다른 곳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도시에서 떨어진 곳에 임시 처소를 만들어두는 것을 사마리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울 수도 없다. 먹을 음식은 안식일 저녁이 되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날 예배의 절정은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아비사 (Abisha)두루마리를 예찬하며 모세 오경을 읽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할례를 아주 중요한 의식으로 행하고 있다. 아들이 태어나서 8일이 지나면 할례를 행한다. 만약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사마리아’ 인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할례는 대 제사장의 집도로 반드시 새벽 기도가 마친 후에 행한다. 결론적으로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과 비슷한 절기와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축제의 가장 중요하고 특이한 면은 그리심산 순례이다. 그리심산 순례를 이해하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축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6 사마리아인의 언어와 문학
사마리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아라비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언어는 서쪽 아람어 방언이며 고대 히브리어 문자를 사용했다. AD 634-636년에 이슬람이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 아람어 방언은 기도문을 제외하고 점차적으로 아라비아어로 바뀌었다. 헬라시대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처럼 헬라어를 그들의 전적인 생활 언어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헬라어로 번역된 사마리안 모세오경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 고고학자는 사마리안 회당에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비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현재 초기 사마리아 문학 작품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는 문학 작품은 50여권도 채 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문학 작품들은 사마리아가 이슬람화 되기 전에 민족 방언으로 기록된 한 그룹과 이슬람화 후에 주로 아랍어로 기록한 그룹으로 구분된다. 이슬람화 이전 그룹의 문학 활동은 AD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 모세오경은 사마리아인들이 소유한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이며 학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다. 위 4장에서 살펴본 것 같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이 유일하게 거룩한 기록으로 자기들에게 전해졌다고 믿는다. 이것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 관계없이 모세오경의 일반적인 권위로 인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나누어졌다고 본다. 사마리안 모세오경은 맛소라 사본 (유대인이 받아들인 사본)과 6천 군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 사마리안 모세오경은 맛소라 사본보다 양이 많으며 부연(敷?)과 해설 또한 많이 더해져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문학 작품은 전체적으로 ‘사마리안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종교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모든 문학 작품의 발전은 사마리안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련된 책들을 잘 이해하고 자기들의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역사적인 문학 작품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율법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7 결론
지금까지 사마리아에 대한 배경을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사마리아인의 기원에 대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고, 유대 민족의 전통적 혈통을 가졌지만 절반만 유대인인 사마리아 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과 오랜 반목을 거듭하며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형성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이 가진 신앙관은 많은 부분에서 유대인들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특히 짧은 부분이지만 사마리아인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의 영향을 받았음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학은 모세오경이며 모세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신앙과 문학의 발전은 다분히 반 유대적인 사고와 배경에서 출발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약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위에서 제시한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통해 많은 유익함을 얻을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는 가운데 사마리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읽을 경우 지금까지 살펴본 사마리아의 역사, 사회적 배경은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유대인들로부터 늘 멸시와 천대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신약 성경에는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특히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것은 사마리아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선교 대상지였다는 것을 신약 성경 독자들에게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싫어했는지에 대한 보다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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