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치열하고 열심히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사전적 의미의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의 행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나 지하철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노숙자나 모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어려움을 당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삶을 사는 데도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저 사람은 저렇게 모든 것이 잘 되는 데 왜 내게는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현실간의 이러한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시편 1편 3절>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성공과 행복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기, 권력, 재물, 쾌락 등을 통해 행복을 누리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을 얻는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는 행복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행복을 말할 수도 없고 또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도 안 됩니다. 행복학을 말하는 강사들은 여러 가지 행복지침을 말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도 역시 무수한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상담가이자 정신과의사인 래리 크랩박사가 그의 책에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의 모든 조건을 갖춘 듯한 사람이라도 막상 자신과 한 시간 정도 상담을 하고 나면 공통적으로 ‘십분 만이라도 진정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작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 송명희 시인은 뇌성마비 상태로 태어나 시한부의 삶을 진단 받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저주하고 싶었던 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하는 가운데 비록 육신의 건강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주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삶에의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불행한 가운데에도 이처럼 행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려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에도 행복의 비밀이 되시는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처해있는 현실과 관계없이 주안에서 행복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당신의 그섬김이 해같이빛나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