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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스크랩]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적 《똥꽃》"

샤론의 수선화 2015. 8. 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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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성 치매(알츠하이머)는 치유될 수 있을까? 〈똥꽃〉(그물코 펴냄)은 ‘그렇다’는 답을 제시한다.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병원에선 엄두도 못 내던 일이었고 노인전문의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똥꽃〉은 치매가 “굴절된 삶의 현재적 표현”이자 “필요한 현상이고 (그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심지어 “생활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면 병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까지 한다. 그리고 “노인들의 치매가 병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현대를 사는 모든 인간들은 다 병자”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따라서 어머니의 치매와 싸운 〈똥꽃〉 얘기는 특정 치매환자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는 진지한 실험에 관한 현장 보고서일 수 있다.

“해발 620미터인 이곳에 처음으로 진달래가 핀 날, 어머니 새참 드리는 것도 잊고 어둑발이 질 때야 집에 돌아왔다. …마루에는 똥이 묻은 아래위 겉옷과 속옷이 쌓여 있었고 방안에도 어머니가 움직이신 길을 따라 똥칠이 되어 있었다. 똥을 눈 지 오래되었는지 작은 똥덩어리는 딱딱하게 말라붙었고 손이나 발에도 똥칠갑이었다. 어머니는 불도 켜지 않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내가 왔지만 돌아보지도 않은 채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열혈 노동운동가였던 전희식(50)씨. 10여년 전 자연농업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기로 인생 진로를 수정하고 ‘귀농’했던 그는 3년 전 서울 큰형 집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단독주택 3층 두 평 남짓한 외딴방에서 기저귀를 찬 채 밥과 약을 받아먹으며 두문불출하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에게 “오줌 누는 데가 따갑다”며 하소연했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일부러 찾아뵌 적이 없었고,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때나 형 집에 들른 김에 어머니께 인사드리는 정도였다. 한번 얘기를 꺼내면 끝이 없고 냄새가 진동하는 어머니 방에 누구도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10년 전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고관절이 바스러져 철심을 넣은 뒤 아랫도리를 쓰지 못했고 귀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됐다. 누워 지내면서 치매가 진행됐다. 작은형이 식사 때마다 어머니 틀니를 칫솔로 닦을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해 고개를 돌리곤 했던 그였으나 그날 벌겋게 짓무른 어머니 아랫도리와 하얗게 세버린 체모를 보고 울었다. “그 많은 자식 키우면서 어머니가 똥오줌 묻은 옷이나 걸레를 빠신 햇수만큼은 다 못하더라도 두세 자식 몫은 하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내 건강한 시절 몇 년을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2006년 봄 식구들이 사는 전북 완주에서 멀리 떨어진 장수군 산촌의 다 쓰러져 가는 외딴 빈집을 구해 반년 가까이 수리를 한 뒤에야 식구들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했다. 그해 9월 홀로 이사를 했고 2007년 2월에는 마침내 어머니를 모셔 왔다.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 드리고 바위와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려고 한다. 철따라 피고 지는 꽃도 보시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곡의 바람결도 느끼시고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까지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남 함양 출신인 어머니는 14살 때 시집와서 6남매를 눈물로 키웠다. 아버지가 43살에 돌아가신 뒤의 모진 과부살이였다.

어머니와 살면서 전씨가 가장 신경 쓴 것 중의 하나는 똥오줌 가리기였다. 먼저 화장실을 어머니가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고 음식 섭취와 배뇨시간의 상관관계를 면밀히 관찰한 뒤, 때 맞춰 변기를 갖다 드렸다. 기저귀를 없앤 것이다. 기저귀를 채우는 것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애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공인하는 과정”으로, 거기서 수치감을 느끼면 심리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두 달 이상 노력한 끝에 어머니는 배뇨감각을 회복하고 몸을 끌고 가 뒷문 쪽 전용 뒷간을 이용하게 됐다.

방에 온통 똥칠갑을 한 사건은 그 와중에 일어났지만 전씨는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방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하고 노래했다.

전씨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존엄’, “건강보다도 존엄”이었다. 어머니에겐 반드시 존댓말을 썼고 집을 드나들 때는 절을 올렸으며, 집안 대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일이 알려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어머니를 관리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주체,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에 앞서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은 어머니 얘기를 한결같이 비웃거나 개탄하며 무시하거나 그게 아니라며 교정해주려 애썼다. “어머니는 좌절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언제나 부정당하는 자신마저도 포기했다. 나는 바로 이게 치매라고 생각한다.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이 치매다.”

눈 내리는 광경을 10여년 만에 보고 놀라던 어머니는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씨는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닌 생산적인 작업, 예컨대 청국장 만들기, 가죽자반 담기, 배추 심기, 쑥 뜯기 등을 어머니가 주도하도록 했다. 어머니는 아궁이 불도 지폈다. 양말과 바지를 몰래 찢어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부탁하고 나무쌓기 놀이를 유도했다. 믿음 때문인지 어머니는 아들의 말은 용케도 잘 알아들었다. 모내기, 마을회관 가기, 사찰 행사 참가, 고향 나들이, 기도회 개최 등 아들은 어머니가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만들었다.

“어머니가 나랑 사시면서 달라진 여러 모습 중에 가장 반가운 것”은 “맘에 안 들면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것, 떵떵거리고 사는 어머니 모습”이었다. “요즘 나 밥값 하제?”로 발전하더니 10년 만에 수제비를 끓여 아들 밥상을 차렸다. 먼저 그가 변하고 어머니가 변했다. 그리고 식구들이 바뀌고 주변이 함께 바뀌기 시작했다.

전씨는 〈똥꽃〉을 두고 “치매를 소재로 삼긴 했지만 주제는 세상과의 관계,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보자는 것”이라며, “외형이나 현상만으로 사람을 단정하지 말고 (어머니의 86년 세월처럼)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곡절과 내력을 읽고 이해하

는 것, 그렇게 해서 소통하기 시작하면 뜻밖의 기적도 일어난다”고 했다.

전희식·김정임 지음
그물코·1만2000원

어머니와 아들 ‘당신은 나의 힘’ 
어머니는 아들 정성으로 새 삶…아들은 어머니 통해 글 소재 얻어

전희식씨의 어머니 김정임(86)씨는 여전히 심신 모두 불편한 점이 많지만 심하던 악담, 저주도 끊었고 더는 악령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엉뚱한 고집도 피우지 않고 말과 행동이 너무나 부드러워졌다. 아직은 추워서 제대로 시도하지 못하지만 소망 중의 소망인 “벌떡 일어나” 다니기 위한 걷기 연습에도 의욕적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보름 전쯤부터 그동안 계속 시도해온 글쓰기에도 성공했다.” 편지를 보내야 한다며 아들 전씨가 아들들 이름을 써 달라고 했더니 볼펜으로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게 쓰고는 “아이고 모르겠다”고 하더란다. “처음엔 어머니 남은 삶이 2~3년쯤 될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여전히 내일 일을 알 수 없지만, 지금 같아선 10년은 더 사실 것 같다. 검은 머리칼도 많이 났고 얼굴도 부기가 사라지고 맑아졌다”고 전씨는 말했다.

그는 지금 쌀농사를 500평(두 마지기 반), 밭농사는 400평 정도 짓는다. 모두 자연농법이다. “넉넉하진 않아도 살 만하다.”

고향인 경남 함양에서 가난 속에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수도권 공장에 들어간 뒤 대학을 다녔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민중당,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일에 열중하며 총각 시절을 보냈다. 거기서 아내도 만났다. 1993년께 무소유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야마기시회’ 국내 공동체에서 명상수련을 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는 ‘운동권’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94년 전격적으로 귀농을 결행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가 97년에야 생겼으니 당시엔 아직 귀농이 사회적 화두로 등장하기 전이었다.

지금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인 그는 농사를 기본으로 하면서 대안학교·대체의학·보따리 학교 운영, 할머니 한글교실·이주여성 지원센터 강의 등 활발한 사회활동도 벌인다. 생태학과 몸살림과 마음살림, 생명평화결사운동 등 ‘총체생명주의’에 관심을 쏟고 있다. 신문과 잡지, 인터넷 매체에 두루 글도 쓴다. 그럼에도 요즘 그에겐 어머니와 함께 사는 일이 일상의 중심이다. 하루 세끼 밥하고 반찬하고, 때마다 참을 해드리고, 군불 지피고, 어머니 옷 빨고 목욕시켜 드리고, 말벗하고, 일거리 마련하고 …. 〈아이들은 자연이다〉의 저자 김광화씨 말처럼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씨에게 어머니 모시기는 “너무나 새롭고 신비로우며, 또 너무 재미있는 일”이다. 체면, 위신 등에 구애받지 않고 순수본능에 따라 전혀 다듬지 않고 옛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는 치매노인들을 그는 “엄청난 보물단지”로 여긴다. “심오한 무의식과 초차원적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그 “일급 판타지 소재”를 어머니와의 밀착생활에서 포착한 그는 요즘 이를 토대로 노인들을 위한, 동화(童話) 아닌 ‘노화(話)’도 열심히 쓰고 있다.

■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http://cafe.daum.net/naturalecology/crOW/10

출처 : 장두석의 생명살림
글쓴이 : 솔방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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