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앓고 있는 점 고려해 유기징역
"유족 존중하되, 흉악범죄로부터 국민 보호"
서울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가 진료를 하다 김모(31)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한 직후 병원 내부의 모습. /홍다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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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세밑 오후 5시 39분,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13호 진료실. 김모(31)씨가 이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임세원 교수와 마주앉았다. 김씨는 "퇴원 후 이상해졌다. 머릿속에 폭탄을 넣어놓았다", "정신병원에 강제입원했던 것부터 해서 여태까지 있었던 것을 싹 다 없었던 것으로 해 줄테니, 내 머릿속에 있는 폭탄을 제거해 달라"고 했다.
임 교수는 책상 위에 있는 호출벨을 눌러 간호조무사를 부른 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작'을 했다. 비상벨을 누르라는 뜻이다. 김씨는 이 순간 임 교수가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고 경비원을 부른 것이라 생각해 계획한 대로 임 교수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었다.
◇1분 만에 일어난 참극…"이 정도도 각오 못했어?"
오후 5시 42분, 김씨는 간호조무사가 진료실에서 나가자마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료실 출입문을 잠궜다. 이어 점퍼 안에서 미리 준비했던 32.5cm짜리 흉기를 꺼냈다.
놀란 임 교수가 바로 옆 진료실을 통해 빠져나가자, 병원 내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김씨는 47m가량 임 교수를 쫓았다. 임 교수가 통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자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가슴을 세 차례나 찔렀고 왼팔과 왼손, 얼굴 등도 연이어 찔렀다. 불과 1분 만에 벌어친 참극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씨는 쓰러져있는 임 교수에게 "이 정도도 각오 못했어? 이 정도도 생각 못했어?"라고 말하며 왼쪽 가슴 부위를 발로 밟기도 했다. 임 교수는 이날 저녁 7시 30분쯤 사망했다.
◇‘3차대전 전쟁 주동자 만든다’…망상이 불러온 파국
김씨는 2015년 9월 23일부터 10월 12일까지 이 병원에서 조울증(양극성 정동장애)로 진료를 받았다. 당시 주치의는 임 교수였다.
김씨는 '정부와 강북삼성병원 사람들이 공모해 나를 3차 세계대전의 전쟁 주동자로 만들기 위해 강제입원 시켰다'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머릿 속에 소형 폭탄을 심었다고도 착각하고 있었다. 주치의인 임 교수가 폭탄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살해할 생각이었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다. 김씨는 병원으로 가기 전 경기 하남시에 있는 한 마트에 들렀다. 그 곳에서 회칼을 구입해 신문지로 감싼 다음 점퍼 안에 넣었다. 이로부터 3시간여 뒤, 진료 예약도 없이, 불쑥 병원에 찾아온 환자를 맞이한 임 교수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사건의 파장은 적지 않았다.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유명을 달리했기 떄문이다. 의료인을 폭행할 경우 가중처벌하는 이른바 ‘임세원법’이 지난달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일정규모 이상의 병원이나 정신병원에는 비상벨을 설치하고, 보안인력 배치 등이 의무화되기도 했다.
◇‘자상한 아빠이자 친구같은 남편’이었는데…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씨의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정계선)는 지난 17일 김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살인은 인간의 생명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존귀한 가치를 침해하는 것으로, 어떠한 방법으로도 피해를 회복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이고,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른다"고 했다.
재판부는 "김씨를 치료했던 의사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이라며 "임씨의 직장 동료등 다른 사람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서도 이를 의식하지 않고 가슴과 얼굴, 팔 등을 흉기로 반복해 찔렀다"고 했다. 이어 "공격으로 의식을 잃은 임 교수의 가슴 부위를 발로 밟고, 병원 관계자들이 응급처치를 하는 와중에 태연히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 등 범행 이후의 정황도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임 교수에 대해 '두 아이의 자상한 아빠이자 대학시절부터 30년의 세월을 함께한 처에게는 친구같은 남편'이라고 했다. 또 '환자들과 동료들로부터 누구보다 존경받는 의사'라고도 했다. 재판부는 "2018년의 마지막 날 진료예약이나 사전 연락도 없이 무작정 자신을 찾아온 피고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진료를 흔쾌히 수락했고, 자신의 환자였던 김씨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임세원 교수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모씨가 17일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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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고려해 감형…"책임주의와 비례의 원칙"
검찰은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유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라거나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다’는 취지로 말하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검찰의 구형과 같이 김씨를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키는 무기징역형의 선고를 검토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
다만 김씨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점이 감형 사유가 됐다. "김씨가 앓고 있던 병이 사건 범행의 원인이 됐고, 치료와 수감을 통한 개선·교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재판부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행와 자유의지에 의한 범행에 대해 비슷한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책임주의와 비례의 원칙상 적절하지 않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혐오가 발생하지 않기를 당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고통을 겪는 환자들이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치료와 지원을 받는 환경을 꿈꿨던 임 교수의 바람을 기려 조의금까지도 정신질환 환자의 치료와 연구를 위해 사용해달라며 기부한 유족들의 뜻을 존중한다"며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되, 국민의 흉악한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오경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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