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1/2) / 매튜 미드
1. 자신의 진실한 상태를 스스로 속이기 때문
그들은 자신의 상태를 잘못 판단한다. 사실은 악하고 위태로운데도 선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속한 젓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노의 그릇으로 생각하신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받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죄를 더 바라보고, 자신의 믿음보다는 자신의 타락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보다는 내재하는 정욕을 더욱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매우 선한데도 매우 악하다고 생각 할 것이다.
신부는, “저는 검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는 여자 중 가장 아름답도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죄인은 자신의 죄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보고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부에는 무뢰한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잠13:7).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라고 한 말씀처럼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
1) 거짓된 마음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모든 자연인의 마음의 절망적인 기만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17:9)라고 했는데, 여기서 ‘거짓되다’ 의 히브리어는 야곱의 이름과 동일하다.
여러분은 사탄의 기만에 대해서도 읽어 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사탄보다 더 거짓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사탄은 결코 사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좋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의 기만에서 나온 것이다.
2)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의로운 줄 안다
이러한 실수는 자만심에서 온다. 모든 자연인에게는 자만심이 있다. 아담이 죄를 지을 때도 자만심이 있었고,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게도 있었다. 자만심은 근본적인 죄이다.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상태를 자신하는 태도가 오게 되었다.
솔로몬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오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지혜자의 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식자의 교만을 말씀하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추함보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보되 얼룩은 보지 않는다. 가식적인 의를 보되 자신의 비참은 보지 않는다. ‘사람이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의 작용이다.’ 교만한 눈은 위를 보지만, 겸손한 눈은 아래를 본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자의 모토(motto)이다. “나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죄인 중에 가장 큰 자라요, 죄인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러나 육적인 사람의 모토는 이렇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 일반 은혜를 특별 은혜로 착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 대신 일반 은총으로 자신을 속인다.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위조 화폐를 진짜 화폐로 착각하는 것처럼, 일반 은혜를 구원하는 참된 은혜로 오해한다.
사울은 귀신이 사무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신을 사무엘로 착각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일반 은총이 구원의 은혜를 닮았기 때문에 일반 은총을 택한다.
사람이 초자연적인 역사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은혜에는 미치지 못한다. 전자는 본성을 부추기지만, 후자는 본성을 새롭게 한다. 성령의 모든 구원하는 역사는 초자연적이지만, 성령의 모든 초자연적인 역사가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4) 참된 회심보다는 외적 개혁에 머문다
많은 사람은 회심의 사역 대신 신앙고백을, 내적인 거듭남의 참된 표지보다는 외적인 개혁을 선택한다. 그들은 컵의 겉을 씻었다면 비록 속은 깨끗하지 않더라도 컵 전체가 깨끗해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경건의 모양만을 취함으로써 영원한 함정에 빠지고 만다.
5)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이 처한 진실한 상태와 조건을 발견하기 위하여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율법을 통렬하게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은혜의 역사가 부족한 가운데 있을 것이고, 자신에 대하여 실제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여기 사도가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전에 율법을 가지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이것은 바울이 자신에게 말씀이 있었을 때와 말씀이 없었을 때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이다.
첫째, 여기 율법이 없었을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있다. “율법을 가지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도다”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지식의 모양, 율법의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는 ‘율법을 가지지 못 했을 때는’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시면 안 된다.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에게는 마음과 양심에 죄를 각성시키고 의식하게 하며 분별하게 하는 율법의 능력과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경우에 처해 있는 동안 자신의 상태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선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내가 살았더니’ 라는 구절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때는 그랬다.
둘째, 여기 율법이 있었을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있다. 이것은 앞의 상태와는 대조적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계명이 이르매’는 주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능력으로 임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양심에 유효적으로 좌정했을 때를 의미한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와 자기 의의 추함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그때 나의 희망이 그쳤고 나의 확신이 무너졌도다. 전에 내가 살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내 죄가 죽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의 양심을 깨우시자, 나의 죄가 살아나 강력해지고 나 자신은 죽고 비참해졌도다.”
- 매튜 미드, 「유사 그리스도인」, PP 193-203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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