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섯 번째 데려가심/ 2007년 2월 18일
두려움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주님께서 수시로 천국에 데려가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리면서도 나 역시 두려움에 빠져 고통하였던 경험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럴 때 그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를 주님께서 일러주시고자 허락하신 해프닝이 이 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을 계기로 내게 두려움이 엄습했고 나는 밤새 끙끙대며 두려움을 안고 울었다.
마귀는 무작정 내게 덤벼들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호시탐탐 나의 연약함을 엿보고 있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속성이 내 안에 비치기만 하면 재빨리 불화살을 쏘아대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란?
겉으로는 활발해보이나 실은 내성적임을 주님도 아시고 마귀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내 자신을 공적으로나 세상에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상처로 인하여서였음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치유받았으나 당시에는 그랬다.
근본적으로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늘 내 자신에 대해 자신없어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가치를 그다지 높게 두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 드러나면 뭇 사람들의 비방과 손가락질과 비평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아주 많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아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만 아프고 싶었다.
이제 주님과 더 깊은 사랑에 빠지면서 이제는 더 아픈 고통은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를 온 세상에 드러낼 때 숱한 비평이 있을 거라는 누군가의 말을 들었을 때 그만 그것이 내 심령에 비수처럼 꽂히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여 드러내신 나의 연약함이었다.
그 시간 이후부터 그 비수가 점점 아파오기 시작하면서 그 날 밤새 눈물로 앓은 것이다.
밤새 몇 시간을 울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저는 유명해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 크게 쓰임받고 싶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여느 사람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다가 주님 앞에 갔을 때 잘 하였도다 칭찬받고 싶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이 무엇인지요.
제가 생각하기 너무 엄청납니다.
감당하기 힘이 듭니다.
꼭 제가 세상에 드러나야 하나요?
무명으로 책을 내면 어떨까요?
전 정말이지 숨고 싶습니다, 주님..
두렵습니다, 두렵습니다.
주님! 나를 붙드소서, 붙들어 주소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초라한 작은 새 한 마리가 되어 지구 한 귀퉁이 어둠 속에서 떨며 웅크리고 하염없는 통곡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나였다.
울다 지쳐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도 계속 “예수님..예수님..”
예수님만 찾았다.
그 때 갑자기 머리가 아니 온 몸이 공중회전하듯 휘잉~ 도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회전그네나 청룡열차같은 것을 탄 느낌이 이런 것일까?
난 실은 겁이 많아서 이런 놀이기구들을 타 본적이 없다.
뭔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이끌려 갔다.
나를 자주 데려가시던 희고 큰 성전 중앙에 예수님과 내가 있었다.
나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예수님은 내 머리에 안수하고 계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아 41:10
예수님께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 보시는데 주님의 마음이 내게 느껴져 왔다.
예수님은 지금 나를 보시며 하염없는 안타까움을 가슴 가득 느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지금의 내 자신의 이런 모습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부끄러움은 부끄러움대로 느끼면서도 여전히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또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 이론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실제에서 적용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주님..엉엉..제가 유명해져서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고 그런 적 없잖아요..엉엉엉.
제가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적 없잖아요..엉엉엉.
전 그냥 제 작은 정성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것 뿐이예요..엉엉엉.”
지상에서 드리던 기도를 천상에서 예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또 아뢰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모든 주님이 내게 행하시는 일에 의심이 가는 것이었다.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생각해보면 순전히 마귀가 주는 생각일 뿐인데 그 당시에는 무지 심각했다.
예수님께서 묵묵히 나를 내려다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만들었다.
나는 너를 잘 안다.
네가 연약하므로 내가 너를 쓰는 것이다.
너의 연약함으로 내가 나의 영광을 취하려 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거니와 두려워 말라.
내가 말하지 않았으냐,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나에게 예수님께서 서운하신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되어지지 않음을 그때 깨달았다.
누구보다 내 자신이 주님을 믿고 확신하고 의지하여 지금의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터였다.
그런데 그것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오직 성령님께서 나에게 감동주실 때만이 믿어지고 확신하고 담대해지고 하는것을 다시금 알게 하시면서 내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버리도록 해 주셨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주님 발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주님~~!
나를 붙드소서, 붙드소서!”
예수님께서 나를 일으키시고 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성전을 거니셨다.
아무 말씀없이 그저 나를 안고만 계신데도 내 안에 평안이 임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마음에 담대함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통해 나의 일을 하리라.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이니라.
내가 출판하고 내가 말한다.
너는 단지 나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이니라.
내가 너를 통해 세계의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것이니라.”
그렇다.
나는 주님께서 이름주신 그대로 주님의 음성을 대신 전하는 「소리」일 뿐이다.
나는 두려움 속에 기도하는 가운데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아무 것도 아니며 그저 보이지 않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나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내 안에 평안과 담대함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두려움이란 내가 만들어놓은 그 무언가가 허물어질까 염려함에서 오는 마음새인 것임을 알았다.
욥을 공격했던 마귀도 욥에게 감추어져 있던 두려움을 틈타서 공격했다고 믿는다.
그의 두려움을 근거로 하나님께 송사하고 공격의 빌미를 제공받은 것이다.
그것을 환난을 맞이한 욥의 부르짖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기 3:25-2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내가 만들어놓은 탑이 허물어질까 불안해하며 두려움 속에 지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간밤의 몇 시간에 걸쳐 느껴본 이 불안과 두려움..
이것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나에게 허락하신 심정이었다.
주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이 나에게 깃들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고픈 말씀이 있으시기 때문이라 믿는다.
“너를 바라보는 내 심정이 이토록 안타깝구나..
내가 너를 보고 있고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두려워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붙들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두려움은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이다.
내가 그 두려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인 것은 바로 마귀를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저 울며 두렵다고만 기도하고 있은 것이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내 안에 두려움을 가져온 마귀를 쫓아냈어야 했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성전 밖으로 이끄시어 데려가신 곳은 특별한 연못이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나를 세워놓고 머리 위로 여러 번 계속 물을 끼얹으셨다.
예전 이 연못을 두고 말씀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며, 죄사함을 입는 물이다.”
간밤에 두려움에 떨던 나의 모습,
그것은 주님께서 그간 나에게 주신 은혜를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나의 모든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잊는 행위이다.
그것은 주님께 죄악인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죄된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물을 통해 나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죄사함을 받고 회복된 것이다. 할렐루야!
이 대목에 대해 마귀의 훼방이 심했다.
깨고난 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상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던 것을 예수님께서 나를 천국으로 다시 데려가셔서 기억나게 해주셨다.
그리고 지금 또 이곳에 이 장면을 쓰려고 하니 워드문서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회복한 문서를 다시 보는데 어느 대목이 사라진 것인지 도무지 또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주님께 기도드리자 성령께서 다시 기억나게 도와주셨다.
마귀가 왜 이 대목에 이리도 민감한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시고, 마귀는 우리가 죄 중에 더러운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한 신부로 단장하길 원하셔서 회개하라고 하시는데 마귀는 우리가 회개치 못하도록 기를 써가며 훼방하는 것이다.
나아뿐 마귀!
내게 두려움과 불안이 임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아까 말처럼 두려움과 불안은 마귀가 가져오는 것이고 내가 용납하였기에 들어오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귀를 나도 모르게 받아들인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내가 아는 죄는 회개하지만 내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했던 것을 회개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주님께서 나의 두려움을 거두어가셨다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악이며 회개해야 하는 것임을.
회개하는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인간은 너나없이 연약하여 두려워하는 경우에 처할 수가 있다.
불안에 떠는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재빨리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온 마귀를 물리치고 그것을 받아들인 나의 죄를 회개하자.
그러면 우리는 더욱 성결해질 수 있다.
더욱 깨끗한 신부로 단장하게 되는 것이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신부인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한 걸음 더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게 되는 것이다.
주님과의 아픈 대화 후 나는 지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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