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평화를 말하는 대통령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주민이 죽어가는것보다 우리의 안락함이 먼저였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보수진영의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것입니다.
적어도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있다고 하는 저에게도 사실이었습니다.
생명걸고 기도했었지만 지나고나면 더군다나 이렇게 낙담되는 나라의 운명에관한 세월이 지나갈때 그저그렇게 살고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보수진영의 표를 합치더라도 이길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실패를 의미합니다. 저는 정말 정부가 부정선거에 개입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것은 우리 민족이 자처한 죄악이고 그렇지않다 하더라도 우리민족이 하나님을 얼마나 멀리 하고있었는지 증거로 나타난것입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2:13)
이 백성의 가장 큰 악 두가지가 하나님을 버린것과 스스로 무덤을 판것입니다. 두가지를 제시하는데 놀랍게도 두가지가 동일할 정도로 긴밀한 연관이 있는것입니다. 하나가 원인이면 하나가 결과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부르짖고 회개할 때 살길을 마련해 두십니다. 그리고 이 백성이 얼마나 나에게 돌아왔는지 살피시며 앞으로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가실지 결정하십니다.
에례미야 시대에 살길은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고개숙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 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호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이 예레미야4장입니다.
예레미야의 부르심과 환상 그리고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그것은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신것에 대한 일종의 딜레마적 표현이 나옵니다.(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3:11~12) 북이스라엘이 유다보다 의로웠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이 유다만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심판했습니다. 왜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유다의 뿌리를 붙드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죄악으로 더 정확히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질 때 하나님은 한쪽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다에 관해서는 야곱에 관해서는 끊임없는 인내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호소는 유다야 야곱아로 시작합니다. 선지서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야곱을 부를때는 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아우르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입니다
북이스라엘보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필코 다 껴안으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자녀가 죽어도 아버지는 잊을 수 없습니다. 3장까지 북이스라엘에 대한 호소와 예루살렘에대한 죄악을 언급하고 4장에서 처음으로 심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2장에 초자연적인 회복에대한 예언이 나오지만 실제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것은 4장에서 입니다. 이전에 언급된 심판은 일반적의미의 심판이라면 이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정해졌음이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4장 이후부터 16장의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을것이라는 회복의 말씀이 나오기까지 유다가 받게 될 맹렬한 심판에 대해 나옵니다.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 4:11~12)
이말씀이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키질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결케 하기위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보통 하나님의 심판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것이고 정켤케 하기위함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선고를 받을때에 그 이유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바벨론에게 대항하지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좀더 작은 심판을 통해 정결하게 되었을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뉠 기회가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이었습니다. 완전한 죽음속에서 다시 시작하실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것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더 큰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토록 큰 슬픔을 가졌던 것은 후일 에스겔 시대에 성전이 회복되는데 그 회복이 예레미야에게 그때가 이르기 까지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비하게 될 사건인줄 알 수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한 심판을 의미할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성전은 무너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편에서 그 약속을 어기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어겨진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벨론에서 시온을 향해 통곡할 백성들을 생각할 때 그는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9:1)
8장에는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에대한 탄식이 나옵니다.
딸이라는 표현이 나올때에는 아들보다 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있는 부드럽게 부르고싶으신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 약속은 역설적으로 어겨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완전히 멸망할 수 없는 성전이 무너진 것은 죽으실 수 없는 그리스도께서 죽으 실 것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게하셨습니다.
가장 믿기 어려운 유다의 멸망을 보면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유다의 멸망인줄 알기 힘들었을 것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심판을 선고하고 그렇게 긴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복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그도 무수히 받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레미야서 4장까지의 내용중에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선택을 질책하는 내용이 두 군데서 나옵니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됨이냐 2:18)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2: 36) 그것은 정치에 관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게되는 그 마음의 중심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심판이 가까워질 때 외교적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없습니다. 그러나 어느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공격때문도 아니었고 백성이 거짓을 진실로 믿고 있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르심이 다른선지자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선지자들은 비참한 삶을 살게됩니다.
에스겔은 성전이 회복되고 율법이 다시 살아나며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을 보기라도 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라도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놀라운 회복의 말씀을 듣기도 했지만 곧바로 다시 항변과 고통의 정서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됩니다. 예레미야애가서의 소망의말씀이 소망으로 다가오지 않음을 보게됩니다. 그의 사명이 그런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보내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을 보면 그의 부르심을 좀 더 알 수가 있습니다. 보내신곳에서 순종하는것만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누구의 호의도 없었고 기적도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자세히 읽어나가다 보면 심판의 초점이 사람의 생각과 많이 다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음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가난한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거짓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5:30~31)
하나님이 한 국가를 심판하기 직전 가장 큰 조건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신약시대의 모든 전쟁속에 적용되진 않습니다. 신약시대는 은혜의시대로 하나님이 한 국가의 전적인 돌이킴을 위해 심판하시거나 그렇게 하시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나라 뜻이 있는나라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듯 다루신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심판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소망이끊어지고 주만 바라게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흔드실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국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대했던것과 유사하게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대선의 큰 폭풍이 지나가고 나니 많은 깨어있는 사람들도 평안으로 마음이 다시 가는 것 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을 통해 심판이 있을거라고 분명히 알게된 사람들도 시대적 분위기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가운데에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도의 방향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놀라운 계시적 말씀을 보고도 듣고도 지식으로 알고도 하나님 정말 심판입니까 심판밖에 없는 것이 맞습니까 묻게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전 가장 큰 두가지 조건은 이렇습니다.
국가 법이 하나님의 법을 배반할 때 입니다.
백성들이 거짓을 진실로 믿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국가의법을 매우 중요시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완전히 이루어지기전에 국가를 통해 보편적으로 다스리십니다. 일부일처제부터 노예제도폐지까지 등등 모든 하나님의 원리가 속해있는 법들이 세워지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그 법은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역할을 할수있는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 이전것들과 다르게 마귀는 동성애를 통해 온인류를 미혹하고있습니다.
국가의 법이 하나님을 배반할때 하나님은 매우 진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천년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불법자들을 막으시며 세워오신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의 죄악중 음란과 우상숭배 가난한자를 업신여긴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것도 국가법이 하나님의법에 등지는것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나라를 뒤엎으실때는 그런 죄악의 현상보다 나라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때입니다. 영적의미에서 마귀의 덫에서 자력으로 헤아나오지 못할때입니다. 사단이 일시적으로 승리했을 때입니다. 음란과 우상숭배또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택한 나라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저버렸을때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죄악은 개인적으로, 국가적 죄악은 국가적으로 다루십니다. 개인적으로 죄악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종을 건지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그리 큰 관심을 두면 안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 사이에서 보수를 지지하는것이 얼마나 욕을 먹는짓인지요.
진보성향의 사람들과 얘기할때 이렇게 통탄할 수가 없습니다. 진보성향의 그리스도인보다 세상의 보수입장을 지닌 청년에게 더 친근감이 가는것은 가장 슬픈 사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두는것이 신앙과는 그리 중요한 상관관계에 있진 않습니다.
물론 마지막때는 세상의흐름에 관심을 가지지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것입니다.
그러나 외교에 그리큰 관심을 둔다던가 정치에 소견깊에 알게되는것이 신앙의 열매와는 곧바로 결되지는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우리는 무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연약함을 하나님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운길을 마련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힘든자들 위로하는데에도 시간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먹여살리는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기에 빠르게 변하는 외교적상황과 마지막때에 국제정세에 우리가 밝게 띄여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표심이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고 이미 좌경화된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들의 탄탄한 논리를 가진지 오래며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눈앞의 문제에만 급급해 이미 문재인 대세에 눈이 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보십시오.
테스트가 어려울 때 그의 백성들을 위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동성애문제로 시험을 쉽게 하셨습니다. 외교를 몰라도 종북세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이것만 보고 따라갔더라면 결과가 이렇게 참담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비슷한 상황이 에례미야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에례미야를 읽으면서 에례미야서만 고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의 멸망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방대한 글중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호소가 이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후대에 이스라엘처럼 행동하지말고 심판만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한국을 향한 메시지에 정확히 대응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이제는 믿습니다. 이보다 더 유사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전무후무한 은혜를 부어 받은 우리나라 앞에 이제는 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싫어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심판하실 때 가슴이 찢어지는 하나님의 고통을 끌어안아 보이지 않았습니까. 심판하시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을 통해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의 부르심은 슬픔을 짊어지는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대변하는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보내시지 않았더라도 이미 심판은 확정된것이었습니다.
에례미야 에스겔 선지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정을 혹시나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을까봐 그렇게 방대하게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게하기위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방법까지 사용하십니다. 호세가 창녀를 취합니다. 혹시 누가 궁금해 할까봐 에스겔의 아내가 하루아침에 죽습니다. 혹시 누가 물어봐줄까봐 그때 대답한번 하기위해서 선지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런 슬픔을 껴안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놀라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현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과 회복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말하는 도중 회복이 다시 나오고 회복의 말씀이 이어지는 도중에 다시 심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갈구하며 기도하는 자들은 느꼈을 것입니다. 한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칩니다. 한날은 백성의 타락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지 예레미야의 표현대로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4장 19절)
슬프다 슬프다를 넘어서 아프다라고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중보하시는분들은 아시겠지만 안타까움과 긍휼의 눈물이 어느순간 육신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시는분들 있을것입니다. 애통의 영이 임해서 한두시간쯤 눈물로 기도하면 어느순간 심장 한 부분이 저며 옵니다. 그 증상이 이틀이고 삼일이고 지속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9:1)
예레미야의 애통을 이제 여러분들도 안으셔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표현대로 주야로 울 것을 작정하셔야합니다. 그것만이 남은자들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한국은 정확히 예레미야서의 시즌에 와있습니다. 예레미야시대의 부르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보냄받은 자리에서 우는것입니다. 구속사를 이루시기위해 하나님은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켰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다를것입니다. 시기는 그 상황은 정확히 동일하지만 우리에게는 예레미야 보지 못했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앞에 있습니다.
이땅이 완전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제 다니엘 에스겔 시대의 부흥이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사명은 칼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우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답이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백성을 위해 기도했을 때 죽음의 위험에 처하고 다시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것을 멈추라고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죽임당할 사람들을 바라볼떄 긍휼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예레미야가 다시 긍휼함을 느낄 때 하나님의 감동이 부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다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물은 기도였습니다.
이번대선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를 분명히 알게 되었음을 종전에 말씀드린 바가 있을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15:6)
어쩌면 그동안 교회에대한 대리회개의 시기가 지났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대안은 우는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실만 바라보면 처참함 그 자체이지만
정말로 성령의 중보기도의 영에 붙들린 사람은 무엇을 해야할지 묻지않습니다.
이땅을 위해 기도하는것에 지치고 다음세대를 위해 기도하는것에 지치고 나와같은 생각을 하지않는 수많은 주변사람들의 시선과
고통가운데서 이제 적당히 하고 현실에 어느정도 맞추어서 살아가자라고 생각하게 되는때가 있더라도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무릎꿇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께서 다시 무릎꿇게 하시는것입니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7:16)
다시는 기도하지않겠다 할정도로 처참하고 고통스러워도 다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지않고 살수 가 없게 하시는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아무리 기도하기 어려워도 누가 때려죽인다해도 차라리 죽는것이 쉬운 그러한 상태 그러한 중보기도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에게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이 기도의불이 붙기 시작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같은 마음으로 이나라를 위해 기도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때 이스라엘의 회복의 장면을 보면서 마지막때 완전한 회복은 이스라엘의회복으로 종결되지만 그 이전에 이스라엘회복의 전조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견해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야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동자가 지금 우리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를 회복시키려고 하나님은 이 시간도 쉬지않고 계십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스가랴 12:10~14)
2천년간 그리스도를 배반한 죄에대한 통곡이 나옵니다.
9장10장은 이스라엘회복에대한 말할수없는 기쁨이 그리고 11장에 이어 그리스도를 못박은 대가 12장 13장에 이어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놀랍게도 하나님이 대신죽게하실 그리스도에대해 나타납니다.
2천년간 이 회복을 위해 그들의 눈을 가리신것이 그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시기위함인것처럼
70년간의 남과북 그리고 동과 서로 갈라진 상처로 얼룩진 이땅에도
회복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스라엘과 너무나도 유사한 길을 걷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돌이킬수 없는 심판가운데 임할 말할수 없는 회복의 기쁨에 관한것입니다.
그 당시 그가 알 수 없도록 숨겨두었습니다. 그는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처럼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뿌린 눈물의 씨앗이 있었기에 후일 부흥이 가능했던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확한 예언들이 예레미야가 아닌 이후세대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돌이킬수 없을만큼 굳어진만큼 회복도 클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울면 소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으니까 우셔야 합니다. 우리앞에 산이 너무큽니다. 회복하기 위해 넘어야할산이 너무큽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는 것은 당장은 슬픔 그 자체밖에 없지만
반드시 열매맺게됨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은 회복이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저는 부흥을 포기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나라를 살려주십시오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이 기회는 우리의 평안을 바라는 평화통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할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님이 계획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민족을 세우실때부터 이나라를 마지막때 제사장 나라로 만들기위해 은혜를 쏟아 부으시지않았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는 우리의 잘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는 우리의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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