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서/하박국서/스바냐서/학개서/스가랴서/말라기서
<나훔서>
“위로”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선지자 나훔은 주전 7세기에 앗시리아를 향한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책의 어조는 거칠며, 구체적인 시기에 한 구체적인 나라를 향한 메시지는 다른 많은 이들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으나, 심미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이를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함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굉장히 중요함을 볼 수 있다.
역사적 배경
- 저작권 : 엘고스 사람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아는 게 거의 없다. 더욱이 엘고스란 고장에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확고한 증거가 없다. 네 가지 가설이 있으나 불행히도 순전한 추론의 영역이며, 책 이해에 거의 아무런 도움이 없다.
- 시대 : 주전 7세기를 시기로, 664년의 테베의 멸망 언급(3:8)과 이 선지서의 초점인 612년의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에 의해 확정된다. 즉,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주전 652년(내전이 일어난 시기)부터 바벨론이 앗시리아의 지배력을 흔들어 쓰러뜨리기 위해 긴 전쟁을 시작한 626년 사이로 보는 게 가장 좋다. 이 선지서의 초점은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이다. 8세기 후반과 7세기 초엽은 앗시라아의 주도권 팽창 시기다. 여러 능력 있는 지도자들 하에 제국의 지배력을 선례가 없을 정도로 제고시켰다. 이들의 힘과 문화는 앗수르바니팔의 초기에 정점에 이른다. 그러나 652년에 이미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바벨론은 앗시리아의 정치적 속국이었으나 골칫거리였다.
고대 근동 역사는 형제들이 권좌를 놓고 서로 싸우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에살핫돈은 자신이 죽으면 한 아들(앗수르바니팔)이 왕좌를 차지하고 다른 아들 샤마쉬-슘-우킨은 바벨론의 왕좌를 차지하게 지시했다. 그러나 652년에 샤마쉬-슘-우킨은 갈대아인들을 이끌고 자기 형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앗수르바니팔이 이기긴 했으나 대가가 컸다. 앗시리아의 힘이 기울고, 멸망을 향한 길고 느린 나선형 추락이 시작되었다. 바빌로니아 기록을 통해 나보폴리살이라는 갈대아 지도자가 자기 백성을 선동해서 앗시리아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 전쟁은 612년에 니느웨가 멸망하면서 절정에 치닫는다.
문학적 분석
- 문체 : 시적인 문체가 상당히 뛰어나다. 그 아름다움은 거친 메시지와 아주 대조적이다. 비유적인 표현들이나 짜임새 있는 평행법들을 통해 나훔은 자신이 탁월한 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 장르 : “책”은 나훔의 예언이 다른 것들과 다소 상이함을 시사하여 여러 시적 기교들은 귀보다 눈에 호소한다. 또한 기록 문헌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설교집처럼 보이는 다른 선지서들과 달리 잘 구성된 구조를 갖고 있는가를 밝혀준다. 또한 “이상”을 담고 있어, 전부가 이상은 아니나 이상을 담는 두 개의 주목할 만한 문단(2:3-10; 3:2-3)이 들어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 표시는 “신탁”으로, 이 단어는 이 선지자가 이방 나라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할 때 주로 사용하기에 너무 막연한 번역이다. 따라서 “전쟁 신탁” 혹은 “이방 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신탁”등을 의미하는 고대의 용어처럼 보인다.
- 구조 : 표제(1:1)-용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시(1:2-8)-용사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리하시고 구원하신다(1:9-2:2)-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이상(2:3-10)-사자에 비유해서 하는 조롱(2:11-13)-니느웨에 대한 저주의 신탁(3:1-3)-마술사, 창녀에 비유해 하는 조롱(3:4-7)-테베와 니느웨의 역사를 비유해 하는 조롱(3:8-10)-니느웨에 대한 계속적인 모욕(3:11-15c)-메뚜기에 비유해서 하는 조롱(3:15d-17)-결론으로서의 장송곡(3:18-19)
신학적인 메시지 : 1:7-8에 중심적인 메시지 요약.
신약으로의 접근 : 나훔서의 영속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위대한 찬송인 1:2-8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용사로서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고대하는데, 그리스도 역시 신약에서 용사로 빈번히 묘사된다. 구약의 여호와는 이스라엘 육신적 원수들과 싸우시며, 불순종한 이스라엘과도 싸우신다. 바울서신의 그리스도 죽으심, 부활, 승천은 사탄 및 그의 군대에 대한 전쟁의 절정인 것으로 되어 있다(골 2:14-15; 엡 4:7-11). 전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묘사아 사탄과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은 계시록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계 19:11-21).
<하박국서>
이 선지자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은 없고, 그의 이름은 오직 책의 표제들과 그의 이름을 담고 있는 시 속에서만 나온다(1:1, 3:1). “껴안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서 파생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름이 정원의 식물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단어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배경 :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난 시대(1:6), 즉 주전 7세기 후반이나 주전 6세기에 쓰였다. 앗시리아는 주전 625년을 전후로 급속히 쇠퇴했고, 이것은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바벨론의 권좌를 차지하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 느부갓네살은 아버지가 죽은 후 갈그미스 전투를 전후한 사건들의 와중에서 바벨론 왕이 되었다(604년).
그리고 바벨론 군대는 한때 위대했던 앗시리아 제국의 남은 도시국가들을 무찌르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나라들로 주의를 돌렸다. 598년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의 왕가 및 지도층의 시민들과 더불어 유다 왕 여호야긴을 사로잡아갔다(왕하 24:8-17; 대하 36:9-10). 갈대아인들의 발흥에 대한 언급(1:6)은 625년에서 604년의 연대를 시사해 주는 반면에 바빌로니아 군대가 거둔 수많은 정복에 대한 언급(2:5, 8-10)은 다소 후대의 연대를 시사해 준다. 앤더슨은 주전 605년부터 575년의 시대를 제시하며, 어쩌면 예레미야, 스바냐, 나훔, 그리고 요엘의 동시대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학적인 분석 : <개관> 표제(1:1)-1. 최초의 대화, (1) 선지자의 불평(1:2-4) (2) 하나님의 응답(1:4-11)-2. 두 번째 대화, (1) 선지자의 불평(1:12-17) (2) 하나님의 응답(2:1-5)-3. 압제자들에 대한 저주의 신탁, (1) 노략자가 노략될 것임(2:6-8) (2) 정복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9-11) (3) 건축자가 헛됨(2:12-14) (4) 수치가 없는 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15-18) (5) 우상 숭배자들이 잠잠할 것임(2:19-20)-4. 하박국의 순종의 시, (1) 기도(3:2) (2) 용사이신 하나님의 등장(3:3-15) (3)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3:16-19)
이 책 첫 부분(1:2-2:5)은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1:2-4와 1:12-17에서 선지자는 애가의 양식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불평들을 늘어놓는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멸망과 사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진군하는 갈대아인들을 들어 세우심으로써 유다의 악을 심판하실 것이다(1:5-11). 이는 위로가 아닌, 선지자의 질문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악을 심판하실 때, 악보다 더 악한 악을 도구로 사용하시고, 더 악한 이들은 번성할 것이다. 이 문제는 선지자의 두 번째 불평을 도입한다(1:12-17).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 역시 심판하실 것임은 이후 다섯 개의 저주의 신탁들을 통해 확약되었다(2:6-20). 3장의 시는 고어체적인 히브리어로 쓰여, 어떤 학자들은 이 선지자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나열하면서 의도적으로 고어체적인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어떤 이들은 이 시가 현존하지 않는 좀 더 방대한 고대의 서사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즉 1장은 이전에 주어진 예언에 대한 불평이며, 2장은 “신탁에 대한 질문의 보고문”, 3장은 시 형태의 예언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인 메시지 : 많은 학자들은 악의 번성과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들을 욥기와 비교한다. 욥처럼 이 선지자도 아무리 현상이 반대로 된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 보여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온 땅의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함을 배웠다(3:16-19). 그는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2:4). 재난에 직면해서 이 선지자는 자신의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신약으로의 접근 : 수백 년 후에 다시 악과 불의가 흥왕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위협 당하고 있었다. 이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상징되는 성전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마 27:41-43).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으며, 다시 한 번 악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으며(마 27:43, 히 10:35a),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그를 변호하셨다(롬 1:4).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으며,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었다.
또한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데서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들은 주변의 모든 상황이 다 믿음은 보상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었기에 칭찬을 받았다(히 11:2-40). 우리 역시 동일한 신앙의 삶으로 부름 받았는데,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장차 오셔서 자기 이름을 수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계 19:11-16).
<스바냐서>
스바냐는 아주 상세한 족보와 함께 소개된 유일한 선지자이다. 그의 조상은 4대 조상인 히스기야인데(1:1), 동일 인물인 그 유명한 왕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으나, 이 점이 장황한 족보를 사용한 이유, 즉, 그가 왕족이었기에 궁정에 들어올 권한이 있었고, 그만한 지위로 유다의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외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1:8, 11-13; 3:3-4)
역사적 배경
- 스바냐의 사역 시기 : 이 책은 율법책 발견과 관련된 개혁들(왕하 22-23장)에 대해 아무런 뚜렷한 언급이 없고, 대중적인 종교의 남용 및 저열한 상태에 대한 이 책의 내용(1:4-6, 8-9, 12; 3:1-3, 7)은 대부분의 주석가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이 주전 621년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바알의 남아 있는 것(1:4)이란 언급은 바알 신앙이 이미 압제를 당하고 있었으며, 개혁 조치들이 이미 취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러 증거들이, 요시야의 개혁이 621년 이전에는 취해지지 않았었다는 것을 확실치 않게 한다. 최종적으로 그의 사역 시기의 좀 더 정확한 배경 추론은 어쩌면 불가능하다.
- 침략자는 누구인가? : 1. 많은 학자들은 예견된 적이 앗시리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이미 줄어든 사실을 반영하고 있으며(2:15), 비록 스바냐의 사역이 요시야의 개혁 이전에 이루어진 것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앗시리아가 유다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2. 스키타이인들, 즉 헤로도토스가 이들이 프삼메티쿠스 1세의 치세 때 아스글론이란 블레셋의 도시와 이집트에 침략을 감행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이들의 침략에 대해 기록한 것은 간략하며, 해변의 국제적인 간선도로를 따라 위치한 장소들에 국한되어 유다에게 주는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없었다. 또한 관련된 독특한 형태의 화살촉이 발견됨도 고대 근동에 무기 무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군사 기술이 폭넓게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그들의 기술이 꼭 그들 가운데서만 사용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3. 스바냐는 주변 국가들(2:4-12)과 앗시리아(2:13-15)에 영향을 미칠 “여호와의 날”의 재앙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다. 즉 앞의 두 경우를 제외한, 스바냐가 예견하고 있는 위험의 원천으로는 유일한 후보로써는 바벨론인데, 그러나 요시야의 사망(주전 609년) 당시에 겨우 힘을 회복하기 시작한 상태고, 바빌로니아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 침략을 시작한 것은 겨우 갈그미스 전투(604년)이후였다. 따라서 선지자적 통찰력이나 예지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이 책을 요시야 시대의 것(1:1)로 보는 입장을 거부하거나 바벨론 포로와 회복 시대를 반영하는 부분들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문학적인 분석 : 표제(1:1)-1. 유다에 대한 신탁, (1) 우주적 심판(1:2-3) (2) 여호와의 희생제사(1:4-9) (3) 예루살렘의 심판(1:10-13) (4) 여호와의 날(1:14-2:3)-2. 열방들에 대한 신탁, (1) 블레셋(2:4-7) (2) 모압과 암몬(2:8-11) (3) 구스(2:12) (4) 앗시리아(2:13-15) (5) 예루살렘(3:1-7) (6) 우주적인 심판(3:18)-3. 구원의 신탁, (1) 온 세상의 경배(3:9-10) (2) 유다의 축복과 회복(3:11-20)
신학적인 메시지 : 1. 여호와의 날. 아모스서와 이사야서에 이미 사용된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스바냐에게 이는 역사 속에 기대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역사적 행위는 죄가 이 땅으로부터 제하여지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그림자(1:3)였다. 2. 이와 병행해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라는 주제가 또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으로 모든 나라의 통치자시며, 자신의 거룩성과 자기 백성을 대함에 따라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 창조자로서 그의 심판은 전체에 걸쳐 내려지며, 모든 열방에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심판을 열방에 선포하기 위해 소집하는 그분은 자신의 은혜를 받도록 그들을 모으시며, 모든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 바울은 여호와의 날, 그리스도의 날에 대해 자주 언급(롬 2:16; 고전 1:8; 빌 1:6, 10; 2:16; 딤후 4:8)하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셔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옹호하실 날을 고대하고 있다. 요한은 용사이신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오심을 기술한다.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는 모든 열방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날을 고대했다(3:9-10).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교회(갈 3:8-9, 14, 26-29)가 볼 때 이것은 이미 현재에 실현된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역시 세상이 진정한 왕의 다스리심을 인정할 ?가 올 것임을 알고 소망하며 살고 있다(빌2:9-11).
<학개서>
이 선지서가 제시한 정보 외에 선지자 학개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스가랴와 같은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 들 중에 하나로, 학개란 이름은 “축제, 절기”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하여, 이는 그가 이스라엘 절기들 중 하나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역사적 배경 : 에스겔의 예언들이 이 짧은 책보다는 많은 수의 연대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학개서는 모든 선지서들 중에서 연대에 대한 언급들의 밀도는 가장 높다. 이 책을 구성하는 네 개의 신탁들은 선포된 연대를 밝힌다(학 1:1; 2:1, 10, 20; 참고, 1:15). 이 모든 연대는 다리우스 1세 제2년의 사 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에 포함된다. 많은 학자들은 학개와 스가랴가 말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다리우스 치세 초기의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많은 소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해 왔다(학 2:6-7; 슥 1:11-15; 2:7-9). 이방 나라들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고 다윗 왕조를 회복하겠다는 희망들을 자극시킨 것은 바로 이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정국의 불안정 때문일지도 모른다(학 2:20-23). 제건 공동체는 이사야가 선포한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들과 함께 살았다(사 40:9-10; 41:11-16; 43:1-7; 44:1-5. 21-23). 고레스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자로 예정되어 있었다(사 44:28-45:1-4, 13). 이 책에 알려진 그의 네 달 동안의 대중 사역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학개의 운명에 대해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
문학적인 구조 및 신학 : 학개서는 다리우스 1세 제2년이라는 연대가 주어진 네 개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다른 선지서들은 선지자들의 신탁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인 반면, 학개서는 직접적으로 설파된 신탁들이 산문으로 된 내러티브 틀(1:1, 3, 13, 15; 2:1, 10, 20)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마치 학개의 말들과 청중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보고서인양 보인다. 한편 어떤 이들은 학개 자신이 이 책의 저자며, 자신의 기록의 객관성과 역사성을 제고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신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삼인칭 내러티브로 된 틀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신탁(1:1-11; 주전 520년 8월 29일)은 간략한 논쟁과 더불어 심판의 말씀을 담는다. 귀환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고, 곡물 경작 등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흉작, 물가 상승, 가뭄 등의 일을 겪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된 듯이 보였다. 학개는 이런 헛수고가 그들이 성전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이 선지자의 말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열정적으로 반응한다(1:12-15). 일은 이삽십 일 후에 시작되었다(1:15; 520년 9월 21일). 두 번째 신탁(2:1-9; 520년 10월 17일)은 성전에 대한 작업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못되어 주어졌다. 일꾼들이 일을 시작한 지 삼 주 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두 번째 성전이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처음 성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그 당시 일흔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선지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주고, 이 두 번째 성전의 영광이 첫 번째 성전의 영광보다 뛰어날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2:6-9).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신탁(2:10-19, 20-23)은 같은 날(주전 520년 12월 18일)에 주어졌는데, 성전 작업 세 달 째 되는 날이었다(1:15). 제의적인 부정 혹은 더러움은 전염성을 갖고 있어, 성전도 이 백성의 부정함으로 더럽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이 하나님의 인정과 포용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아마 일이 시작된 이래 세 달 동안 백성들은 약간 낙심한 듯하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실 것임을 천명함으로 그들을 격려한다. 네 번째 신탁은(2:20-23)은 스룹바벨에게 주어져, 여호야긴의 한 후손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인장 반지가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흔드실 그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자였다(2:6-7, 21).
신약으로의 접근 : 고레스 조서와 성전의 재건, 다윗 계보의 스룹바벨이 치리를 함으로 새로운 시대가 왔다. 이는 장차 올 일들에 대한 임시적 단계로,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우리가 그 영광을 보게 될 때”(요 1:14) 비로소 가시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제2 성전에 나타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시기 때문이다. 열방의 부는 이방의 현자들(마 2:1-12)의 선물들을 통해서, 그리고 공히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살아있는 돌들로 만들어진 새 성전(고전 3:16-17, 벧전 2:4-10)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 새로운 왕국이 다윗의 다른 자손을 통해 임하게 되며, 그는 지금도 다스리시며, 모든 만물을 그 발에 두신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모든 만물의 종국,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용할 수 없는 도성에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모든 눈물이 닦여진 그 때를 향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계 21장)
<스가랴서>
스가랴서는 소선지서 중에서 가장 긴 책으로, 아마 가장 어려운 책일 것이다. 또한 기독교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인데, 9-14장은 그리스도의 수난 기사에 사용된 신약의 구절들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또한 에스겔서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책보다 계시록의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 배경 : 바벨론 유배로부터 돌아온 귀환자들의 첫 세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의 밤의 이상들은 다리우스 2년의 것으로 되어 있다. 비록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539년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나, 귀환자들은 자신들이 외적인 반대(스 3:8-4:5, 24; 5:1-6:22)와 여러 인간적?현실적 난관들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작업은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백성들이 성전 완성에 몰두하도록 박차가하기 전까지 계속 미루어져 있었다(스 5:1-2).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 따라 곧 재개되었고, 516년에 마침내 공사가 완공된다(스 6:13-15). 그러므로 학개와 스가랴가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 동일한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함으로 공통적인 주제들을 갖는 것은 놀랍지 않다.
문학적인 분석 : 비평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의견은 9-14장의 저자가 1-8장의 저자와 다르다는 것뿐이며, 이것을 넘어서는 일치된 의견이 별로 없다. 또한 이 책의 후반부의 저작 연대와 배경에 대해서는 주전 8세기로부터 마카베오 시대까지의 당혹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이 책의 후반부의 연대에 대한 문제들 이외에도 또한 학자들은 이 후반부가 과연 통일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스가랴서 9-14장을 앞의 장들과 분리시키기로 일단 결정하고 나자 이 후반부 장들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파악하는 문제는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문제가 구약학 내에서 없다시피 할 정도로 난감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신학적 메시지 : 1. 스가랴의 권위에 대한 주장(1:1-6)-2. 밤의 이상들, (1) 장수와 그의 군대(1:7-17) (2) 네 뿔과 네 공장(工匠)(1:18-21[MT 2:1-4]) (3) 척량 줄을 가진 사람(2:1-13[MT 2:5-17]) (4) 더러운 옷을 입은 제사장(3:1-10) (5) 촛대와 감람나무들(4:1-14) (6) 날아다니는 두루마리(5:1-4) (7) 악(惡)이 담긴 바구니(5:5-11) (8) 네 병거(6:1-8)-3. 대제사장의 면류관(6:9-15)-4. 금식에 대한 질문(7:1-8:23)-5. 이스라엘의 적들과 미래의 시온의 왕과 목자에 대한 두 개의 이상(9-11장; 12-14장)
- 스가랴서 1-8장 : 스가랴의 여덟 개의 밤의 이상들은 다소 느슨한 교차대조법의 구조를 이룬다. 첫 번째 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종말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밤의 환상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다 분쇄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의 밤의 이상에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 내의 지성소에 국한되지 않으며, 전 도성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다. 네 번째 밤의 이상은 하나님께서는 땅의 죄악들을 단 하루 만에 제거할 수 있고(3:9), 정결케 됨은 귀환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성전을 지을 수 있게 됨을 확인시켜준다. 다섯 번째 밤은 성전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끝까지 돌보실 것이다. 비록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짓는 성전이 실망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뻐하셨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상은 한 연극 속의 두 개의 막을 올려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은 정화시켰으나, 율법 두루마리는 그들이 아직 심판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과, 회복 공동체를 목표로 실행되는 것에 대한 장애가 외적인 반대에서 내부로부터 옴을 지적한다. 여덟 번째 이상은 하나님께서 몸소 열방들을 벌하심으로 원수를 갚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 스가랴서 9-14장 : 하나의 문학적인 통일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예언적인 소망 속에서 포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 중 많은 것들을 성취시켰다. 귀환은 새로운 출애굽이고, 구원이었다. 그럼에도 장차 더 완전한 구원은 여전히 앞에 놓여있고, 이것이 주로 9-14장의 관심사다. 포로생활에서부터의 귀환은 장차 다가올 더 큰 구원의 상징이자 예시였다.
신약으로의 접근 : 나귀를 타고 의와 구원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시는 겸손한 메시야적 왕에 의한 완전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금방 포착할 것이다(9:9; 마 21:5). 그는 목자의 모습을 한 왕이기는 하지만, 또한 매를 맞은 목자였다(13:7; 마 26:31). 그는 창에 찔리고, 배반당했다(11:12-13; 12:10; 마 26:15; 27:9-10; 요 19:34, 37). 그러나 열방들을 무찌르시고(12:8-9), 사람들 속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분은 바로 이 왕이시다(14:3-9).
<말라기서>
말라기서는 십이 소선지의 마지막이며, 세 부분으로 구성된 히브리 정경의 느비임의 마지막 책이다. 그 이유는 말라기가 마지막으로 활동한 선지자이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의도적이진 않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도래를 고대하면서 구약을 매듭짓고 있는 반면에, 신약 시대의 최초의 목소리들 중의 하나가 예수께서 엘리야의 연결시킨 세례 요한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마 11:14).
역사적 배경
- 저자 : 말라기서의 표제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말라기란 단어가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진 바도 없고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도 없는 어떤 선지자의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의 생략형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데, 이 경우 그 의미는 “야(웨)께서 나의 사자이시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나(여호와)의 사자”라는 의미가 더 가능성이 있다.
- 연대 및 역사적 배경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책이 주전 475년에서 450년 사이에 쓰였다는 결론인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히 어두운 시기였다. 초로기 직후의 시기(주전 539년에 고레스의 조서로 시작된 시기)는 아주 낙관적인 시기였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재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상징인 성전이 재건되었다.
1. 잡혼(말 2:11-15; 참고, 느 13:23-27) 2. 십일조를 준수하지 않음(말 3:8-10; 참고, 느 13:10-14) 3.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에 관심이 없음(말 2:8-9; 4:4; 참고, 느 13:15-22) 4. 부패한 제사장들(말 1:6-2:9; 참고, 느 13:7-9) 5. 사회적인 문제들(말 3:5; 참고, 느 5:1-13)
문학적인 분석
- 장르 및 구조 : 표제는 이 책이 예언이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장르 표지들(“경고”와 “여호와의 말씀”)을 사용한다. 이 책의 내용들은 저자가 제의적이고 사회적인 악들에 대해 비판하며 미래의 심판 날에 신실한 자들이 구원받을 것에 대해 예언하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장르 표지들을 지지해 주고 있다.
표제에 이어 말라기는 여섯 번 이 백성과 논쟁한다. 1. 통상적인 패턴 2.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보여준 모멸에 대한 논쟁(1:6-2:9) 3.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논쟁(2:10-16) 4.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논쟁(2:17-3:5) 5. 회개에 대한 논쟁(3:6-12) 6.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말들에 대한 논쟁(3:13-4:3)
- 문체 : 산문이냐 운문이냐 하는 문제는 논쟁의 핵심이다. 이런 논의 발생 자체가 성경 히브리어에서 무엇이 운문이냐 하는 것을 정의하기가 힘들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두 가지 양식의 밀접한 관계를 증거 해준다. 아주 이른 시기의 학자들은 구약 시대의 말엽에 가서 히브리어 문체가 질이 떨어진 것을 말라기서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못하다. 말라기서는 그 양식에 있어 창의적이며, 메시지가 분명하며, 그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1:2)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자 주인이시다(1:6) 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자 창조자이시다(2:10) 4.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2:17) 5.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3:6) 6. 하나님은 정직하시다(3:13). 말라기는 단지 이스라엘이 과거 죄로 현재 회개해야 한다는 점만 지적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찬 이상을 제시해준다. 말라기는 환멸에 찬 시대에 사역을 했다. 이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방의 지배하에 살고 있었다. 말라기는 더 영광스러운 어떤 것에 대한 미래의 소망에 다시 불을 붙이고자 했다. 이제 한 날, 즉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율법들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승리를 가져오시고, 율법들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을 가져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3:1-5; 4:1-6).
신약으로의 접근 : 마가복음은 말라기서 3:1과 이사야서 40:3을 결합한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말라기의 소위 부록 부분은 이 사자가 엘리야로 밝힌다. 엘리야는 승리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서 등장한다. 신약에서 이 길을 예비하는 사자는 바로 세례 요한인데, 그는 말라기서 3:1-5에 묘사된 것과 같은 임박한 멸망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선행하며, 또 예수님의 지상 사역으로의 길을 연다. 그리고 말라기에서 예고된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엘리야가 요한이라고 밝히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마 11:7-15; 또한 눅 7:18-3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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