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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해

[스크랩] [필독] 사도행전에 나오는 왕, 총독들의 역사

샤론의 수선화 2013. 9. 14. 01:48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B.C. 63 ~ A.D.135)


총독은 또한 군사적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들을 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전선이었던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의 파견부대가 질서유지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자 즉시 수리아인 총독은 한 가지 세금을 징수하도록 명령하였고, 이것은 유대인에 의한 반란을 조장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총독들은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 유대를 통치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10년간 총독의 직임을 수행하였지만 결국 A.D. 36년에는 유대인에 대하여 대단히 잔인하다는 이유로 시저 티베리우스에 의하여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A.D.41 - 44)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에 왕위를 박탈당하고 고울로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에서 대단한 사치와 방종 속에서 성장하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가자 그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남부 팔레스타인의 구석진 곳에 피신하였다. 빈곤과 파산에 직면한 그는 자살하기로 작정하였으나 그의 신실한 아내가 그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수 차에 걸친 절망적인 경험 끝에 그는 로마로 가서 그의 채권자들에게서 몸을 숨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양자인 가이우스 칼리큘라의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만사가 헤롯 아그립바 1세를 위하여 잘되어 갔지만 어느 날 가이우스와 함께 마차를 탄 자리에서 만일 황제가 죽는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 마디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헤롯 아그립바 1세를 투옥하였다.

A.D.37년 티베리우스가 죽자 칼리큘라가 계승자가 되고 헤롯 아그립바는 칼리큘라에 의하여 석방되고 그의 총애를 입어 A.D.39년에 왕으로 임명된다.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로부터 빌립의 분봉국을 떼어받았으며 얼마 후에 유대와 이두매, 사마리아도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어서도 수 년 간을 기다렸다가 그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4년간 괄목할 만큼 성공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사실은 그가 요한을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일에서 분명히 증명된다 (행12장) .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요령이 있고 빈틈이 없는 통치자였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발을 살만한 일은 피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칼리큘라가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하였을 때 이것을 저지함으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비록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예루살렘을 흥미있어 하는 것처럼 하였지만 사실상 그는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다. 그는 심각한 질병을 얻어 A.D.44년에 지겹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헤롯 아그립바 2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17살난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계승하지 못하고 후에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빌립의 이전 분봉국을 얻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네로에 의하여 갈릴리의 여러 곳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리게 되어 영토가 확장되었다.

비록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예루살렘에 저택을 갖고 있었지만 왕국의 수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였다. 유대인들은 그가 명목상의 유대교인임을 알고는 그를 싫어하였다. 유대인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의 통치는 하찮은 것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24:26-32에서 그가 바울의 재판에 참석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에 끔찍스런 유대 전쟁(A.D.66-70)이 발발하였다. 그는 A.D.100년 경에 죽었다.



제 2기의 총독들


A.D.44-66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은 7명의 총독 즉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가 다스렸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 클라우디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다. 이들 7명의 총독들이 다스리는 기간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파두스(A.D.44-48)는 자기가 통치하려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해보니 불안한 상태인 것을 깨달았다. 유대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파두스는 유대에서 강도들의 만연을 해소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의 제복을 빼앗아 안토니오 탑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변인을 보내어 그 제복의 관리권을 갖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클라우디우스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다.

처음 두 총독, 즉 파두스와 알렉산더의 행정은 비록 이따금 그들에게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온건하고 평화스러웠다. 쿠마누스의 통치는 심각한 소동으로 점철되었다. 유월절에 한 로마 군병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발발한 전쟁에도 개입하였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징계하는 대신에 그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쿠마누스의 추방을 초래하였다. 세번에 걸쳐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자행한 책임이 쿠마누스에게 있었다.

벨릭스는 유대인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의 전임자들보다 더욱 거칠었다. 시카리 즉 “단검을 찬 자”로 알려진 일단의 무리들이 사람을 죽이는 흉포함 때문에 그들로 인한 공포가 나라 안에 퍼졌다. 이 시카리 단원들은 끊임없이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메시야의 출현이 가끔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1:38에 언급되고 있다. 사도행전 24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스도의 통치 기간은 상황이 괄목할 만하게 호전되었으나 그는 유대인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환되었다. A.D.44-66년 사이에 유대인의 격분과 광란의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며 피어린 전투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과 관련된 성경 내용 


[사도행전 25:26]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누가복음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사도행전 24: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사도행전 24: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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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역사책이기도 합니다.. 

출처 : 회복교회!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
글쓴이 : 무심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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