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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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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베트남.소식

[스크랩] 베트남에 살아보니 39

샤론의 수선화 2018. 12. 24. 21:32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 보니 지금의 베트남 보다 훨씬 더 가난했습니다.
  사과과수원에서 태어난 나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랐습니다.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읍내 시장에서 ‘간단호쿠’라고 불렀던 원피스를 사주셨습니다.
  어머니를 따라간 읍내 장날, 가마니 위에는 온갖 진귀한 서양 옷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입혀보시더니 치맛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해바라기 무늬가 있는 옷을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한복길이와 같은 옷을 고르셨고, 그 원피스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몸에 맞았습니다.


  하얀 무명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십리 길을 걸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는 내 왼쪽 가슴은 구호판이 되었습니다.
  ‘쥐를 잡자! 산불조심! 나무를 심자! 자나 깨나 불조심! 반공! 멸공!’ 등등
  세수를 안 한 친구들은 선생님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여 하교시켰습니다.
  읍내 보건소에서 나온 아저씨는 운동장에 집합해 있는 우리에게 양치질 하는 법, 설거지 하는 법, 청소하는 법 같은 생활수칙도 가르쳤습니다.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곶감,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망태 할아버지, 그 보다 더 무서운 칼 찬 일본 순사!
  일본순사가 칼을 차고 잡으러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우리는 집안 청소도 열심히 했습니다. 칼 찬 일본 순사를 본 적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최고로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구충제를 나눠주었고 뱃속에서 나온 회충 수를 적어가야 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 받아온 변 봉투에 개똥을 넣어 제출했던 경험은 우리와 비슷한 연배라면 한번쯤은 다 있을 것입니다.
 쥐꼬리 잘라서 담아가기, 파리 잡아 성냥통에 담아가기, 잔디씨앗을 누런 봉투에 담아서 가기, 여름방학이 끝날 때는 식물채집, 곤충채집과 함께 말린 풀을 머리에 이고 가서 제출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우리나라는 그렇게 발전을 해갔습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우리도 선진국이 되려면 변소부터 개량해야 된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통싯간에 빠져 죽는 일이 종종 있었고 동네 골목은 아기들의 화장실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잘 시켜야 나라가 발전한다며 여성교육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강조될 무렵, 우리는 그 분위기를 타고 전원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1년 가까이 베트남에 살아보니 ‘약속 안 지키는 것, 아무 곳에나 버리는 쓰레기, 남의 일용품을 슬쩍하는 버릇.’ 우선 이 세 가지만 시정되어도 베트남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말을 배우러 오는 솜이 엄마에게 1억 베트남 인구의 첫 걸음으로 베트남 여성의 선진화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요즈음 솜이 엄마는 년 말 특수를 준비하느라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큰 시장을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솜이 엄마가 우리 집에 들어오자마자 밥솥부터 열고 밥을 풉니다.
  “이모, 배고파 죽겠어요. 훼사장이 없어서 밥을 못 먹었어요.”
  마치 친정에라도 온 냥, 스스럼없이 식탁에 앉습니다.
  나는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려다 정신없이 밥을 퍼먹는 솜이 엄마의 손을 봅니다. 할머니 손인 내 손 보다도 더 거칩니다.
  고운 얼굴에 비해 거친 손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잔소리를 해야 하는 선진화 교육을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습니다.



  “솜이 엄마 사진을 내 글에 올려도 될까?”
  “네, 괜찮아요. 이모.”


  솜이 엄마 같은 여성이 있는 한 베트남의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출처 : 통일한국 원로원
글쓴이 : 무궁화3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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