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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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말씀 사진

[스크랩] 재독화가 황수잔의 명화산책

샤론의 수선화 2018. 12. 11. 20:43

 

 

 

 

 

 

 

예술은 훌륭한 작품일수록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 어느 화가의 독백처럼 뮌헨 태생인 민화화가 스피츠웩은 진솔하고 소박한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그렸다.

 

 

독일풍의 짙은 작가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여전히 독일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시인'(Der arme Poet) 유화그림은 유례없이 특별한 인기가 있다. 이 그림은 당시 가난한 시인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잘 표현한 그림이다. 

 

구멍이 뚫린 천장에 비를 피하기 위해서 우산을 펼쳐놓았다. 가난한 시인은 책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곳에 드러누워 명상에 잠겨 시를 구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벼룩을 잡아 엄지와 검지로 누르는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 속에서 가난과 인간의 외로움 그리고 소박하고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는 그림이다.

 

1855-1860년에 그린 그림 '영원한 구애자'(Der ewige Hochzeiter) 는 19세기 중엽 독일미술양식으로 그린 스피츠웩의 대표작이다. 좁은 골목길, 아치형 통로의 포도넝쿨 돌계단으로 되어있는 목조건물들이 소박한 당시 정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에서 하이라이트는 고지식하고 성실해 보이는 정장차림인 젊은 청년이 집 앞에서 물동이를 내려놓은 귀여운 아가씨에게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쳐다보면서 아름다운 꽃다발을 주는 장면이다. "이 꽃은 말린 꽃으로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내 사랑도 그렇게 영원히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라고 사랑의 고백을 한다.

 

당시 남여 교제는 몰래 숨어서 하는 봉건적인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대낮에 한 청년이 집 앞에서 아가씨에게 용기를 내어 애정고백을 하는 모습이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아낙네와 청년이 창문에서 내려다 보고 있고 물동이를 이고 가던 아가씨들도 걸음을 멈추고, 물동이를 내려놓고 그들을 비판적인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대단한 사건이라고 심각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당시 문화적 배경과 시대적 정신을 조감 할 수 있다.

 

스피츠웩의 작품들은 전체가 결정적 분기점인 화이트, 레드, 그린 칼라로 작가가 프랑스여행에서 돌아온 후 당시 유행했던 바비종(Barbizon)양식으로 표현했다.

 

1860년에 그린 '연애편지'(Der abgefangene Liebesbrief)도 재미있다. 위층에 살고 있는 청년이 창문을 열고 아래층에 살고있는 아가씨에게 연애편지를 끈에 동여매여 신중하게 내리고 있다. 

 

바로 옆집 지붕에는 사랑을 속삭이는 행복한 비둘기 한 쌍이 보인다. 청년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래층에 있는 아가씨는 창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바느질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 곁에 있는 하인이 갑자기 위에서 무언가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놀라 입을 헤벌리고 있다. 

 

세 사람은 과연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퇴색된 조그만 초록색창문, 문양이 있는 목각집, 모두가 인간적인 소박함이 깃들어있다.

 

 

 

 

1850년에 그린 그림 '책벌레'(Der Buecherwurm),는 제목자체가 재미있다. 백발 노안의 학자가 자신의 서재 후미진 곳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오른손에, 왼손에 책을 들고 시선은 오직 책에만 두고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책은 옆구리에도, 무릎에도 끼고 있는 모습이 '책벌레'를 연상케 한다. 열쇠구멍으로 보인 것처럼 그린 희미한 불빛정경이 황혼의 원로학자와 어우러져 유모러스하다.

 

스피츠웩은 체계적인 학교의 미술교육보다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립한 독특한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들은 어떠한 제도적인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함과 유머와 해학적인 풍자로 필치를 특징으로 담고 있다.

 

스피츠웩의 작품들은 진지하고 순수하고 재미있다. 그림속의 구석구석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삶 그 자체에서 초월적인 자세보다는 현실에 좀 더 가까이 있고 싶고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느끼는 그러면서 감상자와 이해를 공감할 수 있는 그림, 그 속에서 실망하지 않고 모든 희비극을 긍정적으로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그의 작품들은 항상 따뜻함과 사랑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피츠웩의 그림들과 가까이 하고 싶고 그 그림 속에서 인간의 깊은 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스피츠웩의 아버지는 독일 Oberbayern 시골에서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어머니는 뮌헨에서 과일 도매상을 하는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뮌헨에서 섬유도매상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업가였다. 

 

그들 사이에 둘째로 태어난 스피츠웩은 가정의 풍요로움 속에서 모든 면에 성실하고 근면한 모범적인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전형적인 독일인 이였다. 청년시절의 스피츠웩은 아버지의 계획대로 순종하며 안정된 직업인 약사가 되었지만 스피츠웩은 그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화가의 길을 택했다. 

 

개성이 강한 작가는 체계적인 미술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창작세계를 독학으로 이뤄냈다.

 

 

 

 

같은 시기에 같은 뜻을 가진 화가 동지들을 많이 알게 되어 1824년 그들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시민예술연합모임' 을 탄생시켰다. 회원이 된 스피츠웩은 독일과 스웨덴, 스위스, 비엔나 등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하였다.

 

1858년 스피츠웩은 그가 살던 Dienergasse에서 Neuhauser Gasse로 옮긴것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아틀리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스케치와 유화작품들을 남겼다. 1867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미술박람회(Weltausstellung) 에 4개의 작품을 출품하여 화가로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71-1880년은 스피츠웩의 전성기였다. 그는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와 사랑을 받은 민화화가로 많은 작품들이 팔려나갔다. 1885년 4월25일 스피츠웩은 그의 자택 Heumarkt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거리를 걷다보면 스피츠웩 애호가들의 경영하는 약국 'Spitzweg-Apotheke' 라고 쓴 간판이름을 볼 수 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초산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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