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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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만난사람들

[스크랩] 영화 `Deer Hunter`주인공- 요셉 같은 기적의 주인공(前 백악관 안보비서관 임종덕 장로님)

샤론의 수선화 2018. 11. 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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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헌터 (1978) - 마지막 러시안 룰렛 [한글 자막] The Deer Hunter

 

https://youtu.be/OcfIu8fdeC0

디어헌터 (1979)

https://youtu.be/34ZiVJjcjww

https://youtu.be/SsBTCAN2uH8

https://youtu.be/U_O3MRkFVZs

The Deer Hunter theatrical trailer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51213000202&md=20151216003851_BL

 

 

 

 

 

 

 

 

 

 

 

 

 

 

임종덕씨는 미국 육사 교과서에 기록 되었고 영화 'Deer Hunter'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절대 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요셉 같은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6.25 전쟁 때 인민군에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고아가 된 14세 소년 임종덕은 서울역에 100여명 고아를 먹여 살리기 위해 미군 장군 소매치기 하다가 붙들리고 미군장군의 양자가 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고 하버드 대학 정치학 박사로 졸업, 이후 평화를 위해 월남전 지원하였다가 동료를 살리기 위해 포로 되어 죽을 고비를 기적적으로 탈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되어 대통령 안보비서관으로 닉슨, 존슨, 카터 대통령을 모시면서 탁구공 외교로 미국 중국 평화회의를 유도하고 한국 이민자를 위해 LA에 동양선교교회를 개척하여 미국 최대의 교포 교회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한 분입니다.

 

6.25 전쟁과 북한군에 부모를 잃고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 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가서 교실 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 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지프차가 집 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분자 이기 때문에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거지대장에서 소매치기가 되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 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 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 몇 가지를 교육받았다.

 

1)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하루에 같은 집에 두 번 가지 마라.

4)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 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디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미 공군 사령관의 하우스보이에서 양아들이 되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 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하루는 미군 장군 찝차가 서울역에 왔다. 순간 임종덕은 불과 몇초 사이에 뒷좌석의 가방을 소매치기 하고 사라졌다.. 그 장군은 625전쟁에 공군을 총지휘하는 제 5공군 사령관 스티브토마스 화이트 중장이며 그 가방은 당시 미 공군 특급작전계획 1급비밀 문서가 던 가방이다. 미군은 즉시 한국경찰에 의뢰하여 경찰에서는 소매치기 왕초인 임종덕의 소행으로 알고 조사를 했다. 임종덕은 가방에 카메라와 서류가 있어서 서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카메라는 남대문 시장에 팔았다고 하여 경찰이 쓰레기장에 가서 서류를 찾았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경찰서에서 조사 받는 동안 수십명의 전쟁고아가 우리 형님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하였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여기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 죽는다고 했다. 화이트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보이로 일하게끔 명령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화이트 중장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 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하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 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물었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 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 형무소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 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 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양아버지의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 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 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 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 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이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 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 쓰는 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 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 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 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 더 불타올랐다

 

1957년 하버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 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버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 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버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버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군입대월남전 참전- 두 번의 포로생활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 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짚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임종덕은 먼저 포켓 성경을 꺼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을 찢어 몸 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이 포켓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 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 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성경의 시편 1~ 3장까지 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 덮혔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 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 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실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 북한군 몇 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 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며 계속 영어를 사용했다. , 자신은 중국계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 군으로 인정 할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도 “오마이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하면서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영화 ‘디어헌터’의 주인공이 되다

 

그 후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 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리볼버를 몇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대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리볼버에 다행히 총알 있으면 즉사하고 산다. 그러니까 베트공들은 돈을 걸고 즉석 생존 확률 1/6의 『러시안룰렛』을 한다. , 임종덕의 삶과 죽음에 따라 돈을 걸고 놀음판을 벌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파리목숨의 게임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대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격발하였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 하루 일과가 너무나 심심하니까, 이『러시안룰렛』놀음판을 매일 한 번씩 하는데 어떤 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 『러시안룰렛』 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고 도망칠 계획이다. 4초란 것은 1초에 한 명씩 박살내고 100미터 떨어진 메콩 강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갔었는데 한 달이 되었는데도 자기 차례가 오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해졌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4초 탈출” 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듯 한 달간 4초 탈출”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 달간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시려 훈련할 시간을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권총 찬 4명이 서로 둘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 따라 여자 경호원은 소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고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마냥 떨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한 달 동안 훈련시키신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꼭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리볼버에 장전되게 해주세요. 최소한 베트콩 한 명이라도 사살하게요”

 

이윽고 장교 1명이 리볼버에 탄환 한 발을 넣고 드르륵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건네 받은 임종덕은 순간 담대해졌다.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겼다. 믿음대로 한 달간 연습한 4초 탈출”작전을 개시했다.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적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한 명이 꼬꾸라지자 나머지 3명이 권총을 꺼내기 전에 평소 익혔던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을 4초 만에 격파하고 전광석화같이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날 특수전 훈련 때 배운 대로 뛰어든 그 자리에서 10분 동안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은 헤엄쳐 도망간줄 짐작하고 멀리 2백미터 쯤 떨어진 곳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 동안 2백미터 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기적의 탈출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 강 지류이기 때문에 사나운 악어와 5미터 이상 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의 눈을 가려서 나를 보지 못하게 하옵소서”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왕 개구리를 잡아 먹었고 어떤 날은 4미터 이상 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말리며 1주일간 먹었다.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하고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콥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을 때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기는 임종덕을 발견했지만 베트공의 검은 옷을 걸친 그를 베트공으로 간주하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아군의 총탄에도 단 한군데도 다치지 않고 밀림 속에 숨었다.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워있는데 다시 그 헬리콥터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그 순간 “하나님!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기를 향해 손 흔들며 펄쩍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내렸다. "저 키 작은 동양인은 베트공의 군복을 입었지만 분명 패잔병으로 항복의사가 있구나. 그렇게 총을 쐈는데 다시 나타나다니". 그를 구출하려고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헬리콥터에 실린 임종덕은 실신된 채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 의식이 회복된 그는 그린베레 소속임을 밝혔다. 심문하던 장교가 부모님 연락처를 대라고 했을 때 그는 미국 공군 참모총장의 아들이라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심문장교는 이 동양인이 미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임종덕은 메모지에 아버지의 이름과 연락처를 정확히 적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밀림 속에서 미군 헬리콥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네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총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 중 임종덕 대위가 첫 번째로 탈출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 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 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그는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그는 1 주일 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 날 임종덕대위는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이를 즉시 양아버지께 알렸더니 그도 연락 받았다며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을 받고 백악관 안보 비서관으로

 

임종덕은 팔척 장신의 거구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며 감격했다. 보통 대위에서 6년 되야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으로 특진했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1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말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이 영화가 바로 Deer Hunter(디어 헌터 )였다.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 [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5년 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에 간다. 그리고 대통령 안보비서관으로 임명 받고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과 중국은 외교단절 상태로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다.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는 상태였기에 임종덕비서관은 핑퐁외교를 펼쳤다. 즉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로 순방하며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 번 만났는데 주은래는 그를 동생처럼 여겨 임종래 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는 모택동과도 다섯 번 만났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 정상회담을 합의하자 키신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에도 그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하였다. 임비서관은 마땅히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였고, 키신저는 한국에는 당신이 가라고 하였다. 임비서관은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너무 좋아하시면서 일 때문에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을 서시겠다고 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셨다. 그리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해졌다.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된 대로 19722월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 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 평화상 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임비서관은 LA출장 중에 우연히 한국 출신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설교자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년 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감동받았던 공군 군종감 임동선 목사님이셨다. 그래서 임비서관은 임동선목사님께 70년대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텐데, 와서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는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비서관은 장로추대를 받았으나 자신이 장로 자격에 대해 고민하였고 '장로학''장로' 란 책 두 권을 필독하고 부족함을 느껴 사양하였다.

 

함께 일한 키신저는 미 국무장관이 되었고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는 1979 양국간 국교로 이어졌다. 1974년 양아버지 화이트장군이 83세로 서거하면서 전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버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카터 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하겠다고 했을 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19일 카터 대통령을 싱글러브 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이틀 후 임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요” 하였는데 “현재 4만여 주한 미군 덕에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답변 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아무도 말 못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 두었는데도 임종덕은 싱글러브 장군처럼 파면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 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께서 사면한다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말했다. 임비서관은 대통령께 걸림돌이 되면 결례가 되므로 자진 사퇴를 건의하였다.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다가 예배당으로 들어갔는데 텅 빈 예배당에서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을 예편하면서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맺음말

 

 

서울역은 임종덕에게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고향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 앞 광장을 넋을 잃은 듯이 보고 있는 동안 임종덕의 머리에는 6ㅂ년전 14살의 전쟁 고아로 배고팠던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밥을 얻어먹지 못할 때는 종로구 내자동의 우물가를 찾아가서 물배라도 채우겠다고 샘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어느 날 허기에 지쳐 우물가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에게 외국 신문기자가 와서 영어신문 한 장을 펼쳐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임종덕 자신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즉 신문에 난 자신의 모습은 너무 배가 고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올리던 할머니에게 물을 얻어 먹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후일에야 알았지만 이 사진은 미국의 타임즈 기자가 찍은 우물가의 소년이란 기사로 당시 너무나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 기자상을 수상했던 사진이었다.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영심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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