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은 주기도문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주기도를 드린다”(루터, M. Luther). “이 여섯 조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이 총괄되어 있다”(칼빈, J. Calvin).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도신경 및 십계명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인도하는 삼대지침(三大指針) 중의 하나입니다.
주기도문은 유대인들의 사람 상대의 외식적인 기도와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반복적인 기도의 잘못을 시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려야 할 올바른 기도에 대한 교훈이요 표준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님 자신이 드리는 기도문이 아니라, 제자들이 기도에 관해서 가르쳐 달라고 하는 요청(눅 11:1)에 대하여 주님께서 모범적인 기도문으로 손수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이라는 말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라는 명칭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의 비교 이 세 가지는 다 성경에서 추출된 것으로써 그 특징을 각기 달리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믿을 바 내용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뽑아내어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만든 것(사도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해서 「사도신경」이라 부름)이요, 「십계명」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약의 율법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 규범 중 가장 핵심적인 것 10개 항목을 받은 것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를 대조해 보면, 「십계명」은 구약에서 추출된 하나님의 백성의 요약된 행위 규범(어떻게 할 것인가? 의 문제), 즉 ‘윤리’라고 한다면, 「사도신경」은 신약에서 추출된 그리스도인의 요약된 신앙내용(무엇을 믿을 것인가? 의 문제), 즉 ‘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본질상으로 위의 두 가지의 대조적인 것과는 다르게 성격상 ‘기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2대 부분은 ‘하나님 나라’(전반)와 ‘인간 생활’(후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앞부분의 ‘하나님 나라’는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교리’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뒷부분의 인간 생활에 관한 언급은 ‘윤리’가 함축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전반은 교리로서 사도신경과 연결되고, 후반은 윤리로써 십계명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며, 이렇게 볼 때 주기도문은 실로 사도신경과 십계명의 종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구약의 윤리로 모세가 받은 것이요, 「사도신경」이 신약의 교리로써 사도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때 이 두 가지를 종합한 뜻을 함축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사도들을 종합 완성한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할 내용(what)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기도의 방법(how)을 가르쳐 준다는 점입니다. I.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잘못된 두 가지 종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잘못된 두 가지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인 기도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마 6:5) 2. 중언부언하는 기도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 의미 없는 단어의 기계적인 반복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II. 주기도문의 특징 1. 주기도문은 모범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무엇을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하는데,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주권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따 라서 주기도문은 무엇을 먼저 기도하고 무엇을 나중에 기도할 것인가에 관해 완벽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주기도문은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불과 몇 분이면 끝나는 짧은 기도문 속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하나님 사역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내 생활 속에서 나타나기를 원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원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3. 주기도문에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 문제에 관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떡의 문제”, “용서의 문제”, “보호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절대로 필요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히브리어 ‘아빠’(אבא)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우리 말의 ‘아빠’와 같은 말로, 단순히 어린아이가 자기의 모든 요청을 들어주시고 신뢰할 수 있으며, 강한 팔로 안아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 앞에 나와 “아빠”하고 부르면서 시작하는 단순한 기도입니다. 4. 주기도문은 완전합니다. 순서에 있어서 완전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완전합니다. 또한 이 기도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과거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미래에 다가올 미래의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III.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비교 누가의 주기도문 (11:2-4) | 마태의 확장된 주기도문 (6:9-13) | (2)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 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 (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 사옵나이다 아멘) |
이상의 두 기도문을 비교해 보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원어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이 두 주기도문을 비교 분석한 결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더 오래된, 원문에 가까운 형태라고 주장합니다. IV. 주기도문 내용 분해 구 분 | 성 경 | 성 격 | 대상의 부름 Address |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 하나님께 대한 청원 “Thou” Petitions | 제1청원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미래적 종말론 | 제2청원 | “나라가 임하시오며 | 제3청원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우리의 청원 “We” Petitions | 제1청원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현재적(실현된) 종말론 | 제2청원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제3청원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사탄의 시험에 관한 것 | 송 영 Doxology |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 주기도문 이해
우리는 '편집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천천히 읽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주기도문과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주기도문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마6:0~13; 눅11:2~4).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점들을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납니다.
ㅇ 문맥의 차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위치하는 문맥이 서로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기도에 관한 일련의 가르침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의 자세, 기도의 장소, 기도의 방법 등은 외식하는 자들과 구별된 기도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전적으로 구별되는 기도여야 한다는 입장이 부각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의하면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이 명시적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자신들에게도 기도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에 따라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눅11:1~2).
문맥을 통해 주기도문이 위치되어 있는 부분을 회화적으로 그림 그리듯 해 보면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이미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유대교 맥락 속에 파묻혀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기도, 자랑하는 기도, 자기를 내세우는 기도, 공개적으로 잘난 척하는 기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는 예수의 제자들, 예수의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구별된 기도, 따로 가르침을 받아 시행되는 차별화된 기도의 모범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 선명히 나타납니다.
이와 달리 누가복음의 주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세례요한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기도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런 측면에서 예수께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기도는 ‘기도할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의 모범’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표현(마6:9; 눅11:2)은 매우 비슷하지만 갖고 있는 속 뜻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위치하고 있는 문맥의 차이보다 주기도문의 내용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한 분 주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내용이 왜 이렇게 달라진 것이냐를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ㅇ 내용의 차이:
먼저 하나님을 부를 때 마태복음 저자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저자는 ‘아버지’라고만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하늘에 계신 우리’가 빠졌습니다. 누가복음 저자가 뺀 것일까요? 아니면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것일까요?
한편 마태복음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내용일까요? 아니면 누가복음 저자가 자기들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 보고 뺀 것일까요?
또 눈에 띄는 다른 점은 마태복음에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간구가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이 간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것일까요? 아니면 누가복음 저자가 뺀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마태복음 저자의 추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원본에 없는 표현을 마치 예수께서 가르치신 원본 주기도문인 것처럼 ‘편집’했다는 것이지요. 의심할 수 없게도 이 표현은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한글 성서본문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한글 성경 본문에 보면 이 부분은 ()안에 들어 있고 그 ()위쪽에 작은 글씨로 ‘4)’라고 표시된 각주 번호가 있습니다. 그 각주 번호를 따라 성서본문 하단에 기록된 내용을 읽으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헬라어 성경본문보다 더 오래된 본문으로 판단되는 고대 사본에는 이 내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 마태복음 본문을 기록한 저자와는 다르게, 나아가 처음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후대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이 부분이 “덧붙여졌다”는 뜻이지요.
감히, 주님의 가르침인 주기도문에 어떤 인간이 손을 댔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ㅇ 주기도문은 진짜냐, 아니면 후대에 만들어진 가짜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중에서 어느 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냐고 물을 경우 두 가지 방향에서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입장입니다.
먼저 짧은 것이 원본에 더 가깝다는 본문비평의 견해에 따라 누가복음의 분문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원래의 주기도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기도문이 주기도문 원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그런데 어법으로 보면 예수는 1세기 팔렉스틴에서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셨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어휘와 어투에 근거해 보면 마태복음의 언어가 예수께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 신약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누가복음은 대체로 마태복음에 비해 더욱 더 이방지향적으로 나타나므로 마태복음의 유대적 표현들이 예수께 더 가까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합니다.
그에 따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마태복음의 어투로 바꾸면 그것이 아마도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셨던 주기도문에 가까울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누가복음 저자는 자신이 전해 받은 유대적 어투, 팔레스틴의 아람어적 어투를 헬라세계의 이방인들에게 맞도록 용어와 어휘들, 어투들을 관리(편집)했을 것이라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여 주기도문에 대해 결론적으로, “내용적으로는 누가복음이 원본에 더 가깝고, 언어나 어투, 어휘 측면에서 보면 마태복음이 원본에 더 가깝다”고 말하게 됩니다(따라서 주기도문 자체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후대의 창작품이라는 견해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저자는 왜 누가복음 저자와는 달리 원본에 없는 말씀을 추가함으로서 주의 기도를 편집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마태복음 본문 중에서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 추가된 내용인 ‘나라와 권세와 영과잉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의 부분만 보면서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ㅇ 권위 있는 고대 사본에 없는 (나라와....아멘)이 있는 이유
이 부분을 송영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송영은 예배의 처음과 끝부분에 있는 찬송가와 같은 부분인데 곡조는 없고 찬송가의 가사처럼 되어 있는 기도부분이어서 송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곡조가 붙어 찬송처럼 불리는 부분은 영광송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기를 기원하는 예배의 첫 영광송과 영광을 돌린 예배가 되었기를 바라는 예배의 마지막 영광송은 곡이 붙어 있어서 찬송가 형식을 갖고 찬송으로 불려 집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송영부분은 찬송가처럼 되어 있긴 하지만 찬송가처럼 불리는 곡조 붙은 영광송이 아니기 때문에 주기도문의 끝에 붙어 있는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송영부, 혹은 송영부분이라고 하거나 단순히 송영이라고 부릅니다.
주기도문의 끝에 추가되어 있는 이 송영부분은 초대교회에서 교인들의 응답송, 혹은 화답송 개념으로 활용된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세기 말경에 12사도 교훈집이라는 ‘디다케’가 만들어졌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직역: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이라는 송영부가 주기도문에 끝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끝나면 그에 맞춰 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반응을 보였던 화답송이라고 할 수 있는 응답부분입니다.
이 송영부는 초대교회에서 드려졌던 예배순서에 따라 주기도문이 사회자에 의해 낭송되면 주기도문의 끝에 이르렀을 때 예배 참여자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신앙을 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차원에서 행해졌던 송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곡조를 붙여 찬송가처럼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언어리듬에 맞추어 곡조 없이 화답하는 형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송영부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삼위일체 교리가 강조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옵니다 아멘’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건실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고백되는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려는 노력에 의해 생긴 결과로 보입니다. 원래의 기도문에는 없는 부분이 추가되어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뜻이지요. 특히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뒷받침하는 조직신학적 입장을 강조하기 보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신앙에 근거한 고백이 되도록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존재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대상29:10~13참조)’이라는 신앙관을 가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돌리는 신앙을 자연스럽게 고백할 수 있으며(13절) 그에 따른 믿음의 생활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이 습관적으로 암송하는 하나의 주문처럼 사용된다거나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감각없이 사용되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요청하는 간구의 성격을 갖는 기도문이라는 범주에 머물러 외식적인 기도로 변질되어 가는 기도가 되게 하기보다는 주기도문 안에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 나타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의 기도”가 “우리의 공동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이와 같은 ‘첨가구’를 추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상예수의 사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작업이라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사회자와 주기도문의 낭송이 끝나면 곧 이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아멘’으로 화답하는 교인들이 ‘우리의 공동기도인 주기도문’을 통해 서로 일체가 되는 하나 됨의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은 주의 뜻,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니 송영도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주의 뜻에 따른 기도라고 해도 별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 저자의 이와 같은 수고에 대해 ‘필요하면 언제나 말씀을 편집해도 된다는 것이냐’며 마치 자신이 갖고 있는 말씀에 대한 거룩성이 훼손되기나 한 것처럼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주의 기도가 또 다른 외식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예배의 기도로 자리 매김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더욱 더 경건한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삶 속에 육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실 때마다 무슨 주문 외듯이 하지 마시고 한 절 한 절 꼼꼼히 그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시면서 ‘누가복음에 없는 추가된 내용(하늘에 계신 우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더 높이, 그리고 추가된 내용만큼 더 강하게 고취되도록 신앙적으로 생활 속에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http://cafe.daum.net/ha3758/jGL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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