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to heaven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죽지아니하며

on the way to heaven

주님을만난사람들

[스크랩] 근대 인물한국사 313

샤론의 수선화 2012. 5. 19. 11:16


  근대 인물한국사 313     

민경배
        
 제1장. 주기철 생애의 시대적 배경

 일제통치시대와 기독교 신앙
 유년시절과 신앙훈련
 오산학교에서 만난 거인들

 제2장. 목사가 되기까지

 연회전문학교 상과 진학
 곰내에서의 4년반
 평양장로화신학교에서의 신학수업

 제3장. 개혁과 신령의 목회 초창기

 격동의 1925년에 평양신학교 졸업
 부산 초량교회 목회
 마산문창교회 시대
 순교의 길목에 선 주기철

 제4장. 목회의 정점 산정현교회 시절

 한국교회사의 산정현교회와 주기철
 교회내 민족주의운동의 숙정의지
 시간의 시련 이겨낸 승리자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기독교학교의 폐쇄

 제5장. 마침내 순교하기까지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한국교회들
 마침내 무너지는 한국장로교회
 변질되어 가는 교회들
 주기철목사의 첫 구속
 주기철목사의 2차 검속
 주기철목사의 3차 검속
 주기철목사의 마지막 투옥
 마침내 순교의 길로

 제6장. 맺음말

 주기철 연보
 참고문헌 및 자료

   머리말

 주기철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 해방 1년을 앞두고 옥고 끝에 형무소에서 순교한 신앙인이지만, 일제하의 한국 민족사에서 고귀한 정신적 유산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하의 한국 현대사는, 근대화나 민족의식의 개발 및 현대국가 건설의 자료 확립이라는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것은 반일민족운동의 거대한 정신사로 일관되어 있다. 우리의 일제에 대한 저항은 그들 구제의 핵심에 대한 도전이었고,m 민족의 저력은 그것을 수행해 내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의 국체는 헌법의 중추를 이루는 천황제와 신사제였다. 이 두 근원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의 민족 반일운동도 그 핵심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여기에 한국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절대자 여호와하나님께 대한 최후 충성의 신앙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가 있다. 일제하
기독교는 한국민족 수난과 다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상황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통치시기 전체에 걸쳐 기독교 신앙의 철저화 그 자체가 다이내믹하게 반일로 현상화하였던 것이다. 역사 참여나 사회화를 표방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저절로 강경한 반일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기독교였다. 그것은 민족 주체나 해방을 위한다는 목표와도 사실상 아무 연결이 없다.이것이 한국기독교의 민족사적 구조다. 그때는 신앙동기 자체가 민족사의 정수에 그대로 일치하였고, 그 당시의 한국교회사는 바로 민족사였던 것이다.주기철은 이런 역사적 구도의 한 표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는 철저한 보수주의적 성서적 신앙인이었다. 민족운동을 표방한 인사들의 교회출입까지 막았던 신앙지상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는 네 번 구속에 통산 5년 7개월이란 긴 세월을 옥고에 시달리다가 순교하였다. 신사참배 반대가 그 명분이었고, 천황제의 변혁이 그 죄목이었다. 천황제에 대한 도전은 그대로 일제에 대한 반역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의 자주성, 제국주의의 죄악성, 프롤레타리아의 전제, 이런 사상과 열정이 지조요 투쟁목표였던 반일운동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유일신사성처럼 일제 국체의 중추에 정면으로 도전한 핵심적인 저항은 다시 또 없었다. 주기철이 그 정신사의 정점에 서 있었다. 우리는 주기철의 생애가 전부 '순교사'로 점철된 것을 안다.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그렇게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신앙의 문제였다. 믿어서 무엇을 한다는 목표지향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그 신앙의 객관성, 그분에 대한 신앙의 의무감, 그런 것에 집착되어 있었다. 인간에게는 지고의 가치나 규준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그가 5년여의 극단적인 고문과 고독과 허기의 고통을 겪어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당하면서까지도 지켜야 했던 가치였다.


 그가 우리 현대사에 높이 솟아 추앙을 받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 사회가 지금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이 '의무'의 부재에서 온 것이다. 하루도 아닌 5년여 동안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변혁과 희망의 한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물로 인해 많은 분들께 진실된 삶과 참다운 가치에 대한 소개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크게 기쁘게 생각한다. 따라서 동아일보사의 20세기의 주요인물에 대한 조명작업에 감사드리며, 자료와 사진 등을 기꺼이 제공해 주신 주기철목사님의 아드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남기고 싶다.

 1992년 3월
 저자 민경배 씀

   제1장 주기철 생에의 시대적 배경

 대한제국은 지금 아주 비상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물밀 듯 밀려오고 있습니다.
 H. G. 아펜젤러, 1897년

 목사 주기철은 순교자로 후세에 알려져 있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하, 특히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인 압제와 전시 총동원의 시련 속에서 이 민족의 아픔을 함께 걸머지고 가다가,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에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형고 끝에 순교한 인물이다.

   일제통치식대와 기독교 신앙

 그때 과격한 무장민족운동으로 일제의 형벌에 세상을 떠난 애국자들도 많았고, 국외에서 독립투쟁을 하다가 전사한 투사들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신앙과 양심으로 충성을 다하다가 그것이 일제의 국체에 도전이 된다 해서 목숨을 잃게 된 사람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민족의 전통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신성한 명분은 많은 우국지사들의 헌신과 순국의 기개로 지켜져 왔다. 그러나 신앙 자체가 일본에 저항하는 명분이 되고,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정열이 죄로 인정되어 반역의 형벌로 순교하였으되, 민족사에는 민족 최후의 얼을 지키기 위한 순혈의 공헌으로 숭앙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주기철도 그런 사람이다. 세상에는 불의에 직접 저항하는 운동이 있고, 그것은 훨씬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하여 공격적 자세를 취하지 않음에도 그 쪽에서 도전과 반격으로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지만 밑바닥으로부터 서서히 동요를 일으키는 막강한 힘이 되는 것이다.
 

주기철은 기독교적 유일신의 신앙으로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것이, 일제의 천황에 대하여, 또는 신사라는 국혼적 이런 의미에서 일제 말 한국기독교의 불가피한 역사적 위상을 시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 전체가 다 그런 순교의 길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어느 한 시대에서 개인의 행동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만, 조직이 나 기구는 국가가 정한 법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제한을 받는다. 가령 학교나 교회, 그리고 그조직의 전국적 기구 같은 것들은 행동의 자유가 거의 없다. 자폭이나 해산의 방법이외에는 양심의 자유에 따른 행동은 상당히 제한된다. 그런 한계내에서의 행동 규범을 따르고 마는 경우를 훗날 역사는 대개 전향, 변절 또는 협조라 부른다. 한 사회의 조직은 그 사회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표현기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회적 구속 아래에 있다는 제한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양심의 선포나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길은 자의든 타의든 그 사회 안의 조직으로 설립, 인정되는 기구에서 격리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격리는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인데도 불구하고 '이질'로 정죄되면서 진행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기구는 오히려 불의편에 동맹한 모습으로 이 쪽에 역공을 해오는 것이다. 주기철이 신앙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일제와의 의로운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힘든 형극의 길이었다.

   유년시절과 신앙훈련

 시해된 민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고 국장이 1897년 11월 21일 엄숙하게 치루어졌다. 그동안 한국은 1897년 10월12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는 등 국내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1월9일에는 대원군 부인 민씨가 서거하고, 대원군 역시 2월23일에 서거함으로써 파란만장의 근대조선이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고 '대한'일 출범하였던 것이다. 이 여명의 날인 1897년 11월25일, 곧 광무 원년에 주기철이 경상남도의 창원군 옹천, 곧 웅읍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기철을 낳을 때 아버지의 나이는 44세였고, 주기철의 첫 이름은 기복이었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많아 맏형인 기원이 항상 보호자 구실을 하였다. 연회전문학교의 학적부에도 보호자가 맏형으로 되어 있었다.주기철의 가계는 멀리 남송에까지 소급한다. 주자의 증손 주잠이 신안 주씨의 시조가 되는데, 주잠이 아들 여경을 데리고 1224년 송나라를 떠나 고려 고종 때에 전라남도 금성 곧 오늘의 화순군 능주면에 피난 이거한 것이 그 해 겨울이었고, 그때부터 주잠이 이름을 적덕이라 개명하고 능성 주씨로 살아갔다. 주기철 가문은 이 중에서도 웅천 종파로 계보상 분류되고 있다.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훈련 받아

 주기철을 신앙의 용사로까지 성장하게 한 데는 교회장로이던 부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침마다 그의 부친이 드린 기도와 찬송이 어린 주기철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것이다. 그러한 바탕은, 그의 맏형 기원의 신앙적인 동요로 1913년 영수직을 사임하는 시련 속에서도 결국 완전히 굴하지 않고 굳건히 지켜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어린 날의 신앙생활은 엄격함과 열정으로 일관되었다. 그 것은 당시 웅천 북부리교회의 엄격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기철의 아버지는 1930년에 장로직을 사면한 일이 있고, 두 형 기원과 기정이 '주일을 오래 지키지 아니한 죄'로 책벌을 받은 일이 있으며 기정은 '형편에 의하여' 영수직을 사임한 일이 있다.
 

이것들은 이들의 신앙적 동요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아울러 이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상의 치리를 하였는가 하는 사실도 아울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경남노회는 1917년 '신앙과 정치에 위반됨'으로 85명을 책벌하고, 110여명을 출교시켰으며, 1919년 3.1운동의 시련기에도 책벌 151명, 출교 26명, 1920년에는 책벌 90명, 출교 30여명, 도합 125명을 엄격히 처리하였다.이 엄격한 신앙훈련이 어린 주기철의 몸에 배어 훗날 가차없는 정통확립의 정열로 꽃피게 된다. 이 웅천 마을에는 주기철의 일가 주기효가 1906년 설립한 개통학교가 있었다. 수업 연한 7년의 심상학교였다. 설립되던 해에 주기철이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9세 때의 일이다. 교사 중에는 김창환, 유수성, 이규설 같은 민족주의에 불타는 이들이 있었다.주기철은 이들에게서 강력한 민족애를 익히게 된다. 역사교사이던 김창환은 고사를 들어서 삼포, 곧 부산포(오늘의 동래), 염포(오늘의 울산), 제포(오늘의 웅천)가 왜인과의 교역으로 개항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이곳들을 차지하고 횡포를 부리던 일들을 환기시켜,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한일관계의 역사적 모순을 일깨워 주었다. 흰 백지와 같은 어린 영혼들의 심지에 새겨진 이 역사감각은 주기철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에 흔들리 수 없는 신념이 되었다.

   반일을 골격으로 한 신앙관 형성

 그 시대는 이미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한국을 보호령으로 차지하고, 1907년에 다시 정미칠조약을 맺어 본격적으로 내정간섭과 주권침해를 향해 치닫고 있던 때였다. 우리의 국권수호 의지가 아무리 충천해 있었다 하더라도 물리적인 힘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점차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면서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일제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이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하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 정신사의 개벽을 의미하였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민족사에 공헌하는 첫 페이지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힘을 권력과 무력에 두지 않고 신앙의 힘에 둔다는 변혁적 사고였다. 기독교가 이 정신적 변혁기의 주도역을 담당한 것이었다. 무형지강의 슬로건이 굽이굽이 이 강산 도처에 나부꼈다. 1905년 말부터 시작된 대부흥운동이 원산과 평양을 거쳐 1907년 초에는 서북지방을 휩쓸고 곧이어 기호와 영남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내적인 힘을 갖추자는 것이었다.

 이 날은 기회의 날입니다. 때가 왔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여 나타나는 힘과 권능의 날입니다. 조선이 그 날을 맞고 있습니다.

 선교사업에 착수한 미국교회의 1907년도 연례보고서에 나타난 한 구절이다. 겨레는 이제 새 세계의 질서, 강력한 정신적 힘의 질서에 대한 확신을 몸에 익혀가고 있었다. 그것은 필경 종말론적인 구원, 그리고 메시아적 구원의 유토피아를 목전에 보는 듯하였다. 이 격랑과 격동은 정신사에로의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추천시키고 있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한국에서 선교하던 스왈슨(W.L. Swallon)이란 미국 선교사가 1905년 부른 이 노래에 시대의 아픔과 희망의 숨결이 메아리치고 있다.주기철은 개통학교에서 이 물결에 휩쓸렸다. 어린 나이에도 그곳 윤강회에서 진해되는 학생들의 토론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때에 따라서는 그가 깊이 관여하기도 하여, 그의 총명과 지각 그리고 표현력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때의 교우로 지수왕이나 배운환이 있었고 후배로서는 전인선과 주상수와 같은 이들도 있었다. 주상수는 물론 해방 이후 소위 재건파의 '제사장'이 되었던 부수 강경파의 투사, 바로 그 사람이다. 주기철이 웅천교회에 입교한 것은 1910년 12월25일, 한일합방이 있은 담음 첫 크리스마스날이었다. 14세의 순정과 낭만으로 그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을사보호조약의 전국적 혼란기에 심상학교에 들어가고, 한일합방의 국치에 입교한 그의 신앙은 자연 반일을 모티브로 그 골격이 짜여지게 되었다.

   오산학교에서 만난 거인들

 1912년 봄 전국은 '105인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합방을 이끌어낸 일본은 한국 통치의 장애물을 발본색원한다는 의지로, 그때로서는 가장 강력한 전국적 조직의 신민회와 그 배경이 된 기독교회를 말살할 계략을 꾸몄다. 신임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하였다는 엄청난 사건을 날조하여 전국에서 600여 지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그 중 105인을 무서운 고문으로 자백시켜 법정에 세웠던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이 중에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던 남강 이승훈이 있었다.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창설한 것은 1907년 12월24일의 일이다. 이승훈은 개교식에서 오산학교의 교육이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 온 강토를 원수인 일인들에게 내어 맡긴다는 것이야, 차마 있어서는 안된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제일 급무이다. ...옛 성인의 말씀대로 인필자모이후 인모지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 이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을 가르쳐 만분지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지 교육과 애국의 뜨거운 열정으로 이 학교를 세운 이승훈의 인품에 주기철이 연계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주기철이 개통심상학교를 졸업한 것은 19192년. 상급학교로의 진학문제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춘원 이광수가 오산학교를 소개하는 전국 순회강연차 마산으로 가는 길에 웅천에 들른 것이다. 그때가지 이광수는 오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다.이광수는 강연에서 이승훈이 세운 오산하교는 구국의 동량들을 모아 훈육하고 있으며 전국의 기백있는 청년들의 진학을 문 활짝 열고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애국과 민주주의의 교육이념으로,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는 대망의 열혈 청년들이 운집해 온다는 사실은 주기철을 크게 자극하였다.주기철은 오산학교로의 진학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복에서 기철로 바꾸고 호를 여강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기철로 이름을 바꾼 데에 그의 신앙적 결단의 순연함이 보인다. '기독교를 철저히 지킨다'는 신념이 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성조차 주씨였기 때문에 피로써 신앙에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 된다. 그의 이름까지도 이처럼 민족수난사에서 그 뜻이 특별하였다.

   남강 이승훈에 크게 영향받아

 1913년 초봄, 주기철은 종형인 주기용과 함께 곰개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가, 거기서 기차편으로 정주에 갔다. 경남인이 서북 교세의 중심지에 간 것이다. 서북지방은 그때 이미 전국 교세의 3분지 2이상을 점하는 막강한 지반으로 그 세력을 굳혀가고 있었다. 주기철은 15세에 장차 그가 순교할 지역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주기철이 오산에 가도록 결심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광수는 그의 비기독교적 문학이나 행동에 비판을 받다가 1914년 대구 감옥에서 복역중이던 이승훈을 찾아가 사직서를 내고 오산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주기철과 이광수는, 이광수가 지방여행이나 강습 등으로 일정이 밀리다가 대국 감옥에 다녀간 1914년까지 오산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 탓으로 별로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강 이승훈이 주기철에게 남긴 영향은 대단히 깊고 컸다. 남강은 민족의 교육뿐만 아니라 산업에 있어서도 자주성과 발전을 확립하려 한 거대한 정신적 지주였다. 겨레를 살리는 길이를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1908년에는 도산 안창호와 함께 평양의 마산동에 근대식 도자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회사운정체제를 확립하기도 했다. 그런데 안창호는 여기 덧붙여 민족문화 유산의 계승이란 원대한 포부도 실현할 심산이었다.

 선조 때에 만들던 고려자기를 우리는 왜 못만드냐.이승훈은 합방 직후 물밀 듯 밀어닥치는 일본자본에 맞설 길은 민족자본의 광범위한 규합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외친 것이 관서자문론이다. 민족자본 규합의 첫단계로서 우선 비교적 중산층이 많았던 서북지방 곧 관서에서의 합자를 추진하고, 그 다음 호남은 호남대로 영남은 영남대로 자본 단합을 하여서 마침내 몇몇 거대한 민족재벌의 형성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교육, 산업, 그리고 신민회를 통한 민족 에너지의 결집, 이것이 이승훈에 인도된 것은 직접 남강에게서 받은 교육 때문은 아니다. 주기철이 오산에 왔을 때 이승훈은 105인사건으로 수감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춘원 이광수의 흔적이 남아 김억이나 백인제 같은 이들이 그 제자로 세상에 알려지게도 되었다.
 

오산학교에서는 이승훈의 기독교적 정신과 이광수의 휴머니즘이 병행하여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선교사가 설립하지 않은 민족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자유의 폭이 넓었고, 신진 그룹들의 향학열이 이광수의 형태의 문화로 흡수되고 있었다. 이 두 형태의 이념적 양립성이 이 학교의 한때의 정신사를 형성하였다. 주기철이 그 와중에 있었다. 주기철은 신앙과 함께 휴머니즘의 문화에 동시에 인도되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인품과 신앙의 균형을 잡아주어서 건전한 정신과 합리성으로 신앙과 역사에 마주서게 하는 자세를 확립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광수의 사상은 점차로 강력한 저항을 받아서 마침내 그는 오산을 떠나게 되었고, 뒤를 이어 조만식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경건한 신앙적 분위기를 되찾게 되었다.

 주기철이 오산에서 남강과 더불어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15년 3월, 남강이 형기를 마치고 돌아와 채 1년이 되지 못하여 주기철이 이 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기철은 이 학교에 배어 있는 남강정신에 흠뻑 젖어 있었다. '생지옥의 식민지 현실을 지상의 천국으로 바꾸는'정신이 그의 일관된 열망이요 꿈이었다. 기독교적 메시아니즘의 민족구원이 그 이상이었다. 그 꿈과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의지로 버티어지고 있었다. 남강이 자신의 기념동산 제막식에서 남긴 말에 그 정신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내가 오늘까지 오는데 내가 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이끌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남강이 1919년 3.1 운동 때에 다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석방되었을 때에 한 말도 꼭 같았다.

 주여 이때까지 이기고 오게 하여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그와 같이 이후에도 이기고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남강의 이 두 축, 다시 말하면 절대적인 하나님 신앙과 민족산업을 통한 민족구원의 메시아니즘, 그것이 주기철에게도 미완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두 개의 축으로 싹을 갖게 된 해 그의 오산에서의 수학은 끝나게 된다. 그의 진로는 이제 이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면 두 축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제3의 길을 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오산의 교육은 청년의 푸른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순정과 꿈 그리고 다짐으로 새겨져 그의 생애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목놓아 부르던 오산의 교가는 그의 지순한 마음의 밑바탕에서, 그가 고문과 형극으로 말년을 보내던 고난의 나날에도 샘처럼 흘러 청순한 정신의 환희로 남아 있었다.

 네 눈이 밝구나 엑스빛 같구나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네 인격 높구나 정성과 사람
 네 손발 가는 데 화평이 있고
 무심한 미물도 다 믿는구나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땅과 하늘, 역사와 현실을 꿰뚫어 창조적 기개로 개혁과 개조를 추천하는 청년상은, '말련다'로 다짐한 결단의 의지와 사태를 주도하는 위압감으로 차 있다. 이 노래가 주기철의 젊은 영혼에 호흡처럼 살아 움직인 것이다.

   순백의 영혼에 거인들의 정신 새겨져

 주기철의 생애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한 사람은 유영모였다. 주기철은 오산에서 1년간 유영모의 경건과 신비주의로부터 특별한 감화를 받았다. 유영모는 경신학교 출신으로, 그곳에서 언더우드(H. G. Underwood)로부터 과학기재 다루는 법을 배웠고, 한말 경무관으로 일한 바 있는 김정식으로부터는 YMCA를 통해 기독교와 애국정신에 대하여 깊은 훈도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북간도를 왕래하는 독립투사들과도 인연이 깊이 맺어져 있었지만, 국내에서 인간성의 무한한 가치를 개발하고 민족교육에 헌신하기로 하였던 완곡한 애국지사였다. 훗날 함석헌도 그에게서 심대한 정신적 영향을 받은 바 있는, 영혼의 깊은 샘을 가진 인물이었다. 유영모에게서는 자제와 금욕의 기상이 신비주의적 기행으로 나타난 일이 많았다.

 

그는 과격 독립운동의 방법을 취하지 않고 국내교육에서 독립의 기상을 성취하려고 하였던 만큼, 그 자세에 항상 매서운 훈련과 수행의 모습이 배어 있었다. 이런 유영모는 오산하교 창립 70주년을 맞는 1974년의 기념식에 참석할 정도로 오래 살았다. 그의 규칙적인 금욕적 생활이 그의 건강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르친 주기철은 이미 오래 전에 순교하여 그 자리에 없었다. 역사의 발전은 반드시 전향적이라 단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기철은 선생의 신앙과 삶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배워 그것을 민족의 역사의 제단에 스스로 바침으로써, 배운 것이 언제나 더 큰 것에 의해서 초월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주기철이 이러한 유영모에 대하여는 특별히 많은 말을 남기지 않은 데 반해 고당 조만식에 대하여는 여러 곳에서 스승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말을 남겼다. 그가 순교하던 때 시무하던 교회가 산정현교회인데 조만식이 당시 그 교회 시무 장로여서 둘의 관계가 그의 말년에까지 지속된 인연 때문인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산에서 주기철은 조만식의 사상적 훈도에 깊이 이끌렸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만식이 오산에서 가르친 과목은 법제, 지리 등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리 강의는 '지리민족사'라고 일컬을 수 있을 만큼, 민족 생존권 개념으로 체계화되었던 것이어서 학생들의 감동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의 씨앗이 이때부터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세계 제1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세계가 경제적 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계속되는 이북의 홍수와 이남의 한발로 농촌의 핍절과 궁핍화 현상이 전국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가혹한 세금, 농산물가격의 폭락, 금융시장의 정체가 겹쳐 미증유의 경제적 시련이 목을 조이고 있었다. 조만식이 얼마 후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는 물산장려운동의 계기는 바로 여기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여기 더하여 1915년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여서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구실 아래 기독교교육의 전도를 봉쇄해버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기독교계 학교들은 당시 총독부가 세운 공립하교에 비하면 그 규모나 재정의 영세성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독교계 학교가 지방교회의 부속기관 형식으로 운영되던 때에 시설의 상향조정이란, 농촌을 발판으로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실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이런 상황을 덜미로 하여서 기독교 교육기관을 정비하고 철저한 제국 신민의 양성에 박차를 가하려고 하였다. 이런 위기 속에서 고당 조만식은 민족 생존의 방향을 경제입국에 두고자 한 것이고, 따라서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이 이 나라에서 경제관념을 부양시키지 않는 사실에 심히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보수주의적이어서 사회구원의 신학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조만식이 기독교와 경제, 이 두 동력에 의한 민족 갱생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물산장려운동으로까지 구체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정신적 원형이 주기철의 오산 재학시절에 뚜렷한 윤곽으로 나타나 어린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주기철은 꽃다운 소년의 감수성을 가지고 15세의 나이에 오산에 왔다가 18세 되던 해에 그 곳을 떠났다. 3년을 거기에 머문 것이다. 거기에서 그의 순백한 영혼의 심지는 한때 자유분방한 문인 이광수에게서 자연주의적 휴머니즘의 모습을 멀리 바라볼 수 있었고, 규칙과 신비의 기인 유영모에게서 신앙의 초월적 차원을 알게 되었으며, 민족자본의 규합과 산업진흥으로 민족구원의 길을 모색하던 이승훈에게서 기독교의 역사적 차원의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실생활로서의 신앙 전개를 역설하고 경제적 자립에 의한 민족구원을 염원하던 조만식에게서 역사참여적 기독교의 투사적 모습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오산학교가 주기철에게 준 이 거대한 사상은 그의 순박한 심지에 아로새겨져서 그의 생애 어디서나 경각심과 활기를 주었고, 재삼 재사 그의 신앙노선을 극복과 승리에로 이끈 저력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주기철의 인격이나 신앙이 이들의 영향을 한데 모아 묶어 놓은 총체가 아님은 두말할 것 없다. 그의 본연의 뼈대가 있었고 그의 독자적인 품격이 있었는데 다만 이들의 영향이 본체와 연합하여 그나름의 독특한 인격을 생성해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주체마저도 사물의 본질처럼 고정되어 있거나 또 영구불변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항상 나 아닌 저쪽에서 이쪽에 대고 손짓하는 거대한 힘에 도전과 부름을 받아 그때 그때 응답하고 반응하면서 자기 길을 결정해야 하는, 기다리고 있는 존재요 열려진 존재인 것이다.주기철은 인격 형성기에 만났던 여러 거인들의 영향력, 일제의 교육 제한, 경제적 파탄, 세계대전의 발발,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진로를 모색하는데 많은 번민을 하였다.

   제2장 목사가 되기까지

 지금은 한국에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왔다고 봅니다. 도처에서 진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W.G. 그램, 1917년

 주기철도 한국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그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대한 뚜렷한 결단이나 그 동기의 진술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만을 칼빈주의의 엄격한 하나님 주권 신앙에 깊이 인도되어 있었다면 그것 역시 자신의 인생편력에 한 가부간의 서술을 삼간 계기가 된다. 어쨌든 그가 오산을 졸업하고 났을 때의 한국은 1915년 일제가 서울에서 개최한 산업박람회의 여파로
급격한 산업 인식이 널리 펴져, 교회마저도 1917년을 '산업혁명을 해'로 판단할 만큼 산업화의 길로 치달았다. 세계가 그런 산업사회에로의 이행을 역사의 필연으로 보고 있을 때 주기철 역시 한국의 생존이 산업발전에 있다는 시대정신을 깊이 수긍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미래는 이 산업입국의 역군으로 민족사에 뛰어든다는 자각으로 차기 시작하였다.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살리는 길, 그 길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주기철이 오산에서 떠날 때 조만식 앞에서 한 말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1916년 3월, 19명이 함께 형설의 공을 세우고 오산의 교문을 나서게 되었다. 그 중에 김주항이 있었다. 종형 주기용 그리고 이약신이 있었다. 주기용은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남강 이승훈의 사위가 되었고, 오산에 돌아와서는 오래 교장일을 맡아보았다. 이약신은 웅천에 돌아가 개통심상학교의 교원을 지내다가 신학을 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는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오래 시무하였다. 한국 여성운동의 지도가 이효재가 그의 딸이다.


이들 동급생 중에는 남강의 둘째 아들 이택호도 들어 있었다.다들 흩어지고 난 다음에 남는 것이 이들이 역사에 남기는 흔적들이다. 더러는 잊혀지고 더러는 후인의 흠모와 존경으로 기념도 되고 기억도 된다. 하나님이 불러서 지시하신 일에 누가 더 충실하게 봉사하고 헌신하였는가 라는 단 하나의 표준밖에 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소명을 청취하는 예민한 감수성과 그 소명에 대한 외경심, 그리고 비범함 도덕적 결단에 의해서판가름난다. 위에서나 밖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을 만큼 열려진 겸허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다.주기철이 오산을 떠날 때에는 그 역시 이들 젊은 웅지의 청년들과 꼭 같은 길을 떠났다. 주기철은 아직은 불타는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로의 민족구원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 속의 일원에 불과하였다.

   연회전문학교 상과 진학

 주기철은 오산하교를 졸업하고 1916년 3월23일 서울에 갓 세워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다. 연희전문하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6여년의 노력 끝에 설립을 본 기독교 대학이었다. 오늘의 연세대학교는, 1885년 설립된 제중원의학교의 수신인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회대학교가 1957년 병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둘 다 기독교 재단이었기 때문에 굳이 분산 운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회전문학교는, 보수주의계인 평양의 모페트(S.A. moffett)가 세운 숭실전문학교 재단의 심한 반발 때문에 출범이 쉽지 않았다. 목사 예비학교 정도의 의미를 지닌 데 불과한 숭실은 성서문학 외에, 한국의 실정을 고려한 농학과 중심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한국 고등교육의 원형이란 자부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성서학이나 목회학과는 거리가 먼 상과, 수물과, 운용화학과, 문과 중심의 일종 세속적 종합대학을 지향하고 더구나 서울에 위치하여서 근대주의적 사조와 병행하는 대학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이것이 숭실계의 반발을 산 것이다. 당시 숭실계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한국측 대세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숭실계의 반발이란 바로 한국 주둔 장로교 선교사들의 반발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보수계 서북 선교사나 교회의 반발을 산 까닭은 또 다른 심각한 정치적 국면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개정 사립학교규칙을 발표하여 기독교계 학교의 존속을 위협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기독교계 학교의 설비 기준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성서교육이나 채플을 교과과정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고, 더구나 신설하는 교육기관에서는 종교교육을 절대 할 수 없다는 조치였다. 일본 제국의 충성된 신민교육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국체에 정면 대립되는 성서의 유일신 사상이나 민주주의 정신, 인간존엄의 기본정신 교육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연회전문학교가 설립을 보게 된 것이 1915년인데, 기독교계 대학에서 성서교육과 채플을 없애는 조건 아래에서밖에는 대학 신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보수계가 연회전문학교 신설을 완강히 반대했던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더우드 자신의 불만이요, 대학설립 추진의 저해요인이기도 하였다.이러한 여러 악조건을 무릅쓰고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언더우드는 마침내 1915년에 연희 전문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우선 대학의 설립허가를 얻기 위해서 언더우드는 뉴욕의 장로교 해외선 교부의 동의를 얻어냈고, 한국 현지에서는 장로교의 반대로 인하여 결국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호주 장로교 선교부, 그리고 북감리교. 남감리교 선교부와의 에큐메니칼 경영 형식으로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재단설립의 실질적인 재원은 타이프라이터를 세계에서 처음 발명, 판매하고 있던, 미국의 문방구상이요 재벌인 그의 친형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의 회사로 충당하여, 이 거대한 사업을 실로 그 개인 한 사람의 피땀으로 이룩해 놓을 수 있었다.

 다만 개정 사립학교규칙의 저촉사항은 그 전문학교 안에 신학과를 설치하여
신학과의 교과과정 형식으로 성서교육을 하게 하고, 이울러 그 개정령이 기존
기독교 학교에 대해 실행의 유예기간을 10년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
경신 학교의 대학부 형식을 취하여 개교할 수 있었다. 연회전문학교는 이처럼
완전히 언더우드가의 외로운 고투에 의해서 설립된 근대시 대학 교육기관이었다.
 이렇게 한국교회에서는 세속적인 대학이라 지목되던 연회전문학교에, 그것도
상과라고 하는, 그 시대로서는 아직 인식이 안되어 있고 더더구나 경멸하여 보던
학과에 주기철이 진학한 것이다. 주기철의 상과 진학은 그 나름대로는 이승훈이나
조만식의 투철한 산업정신과 경제입국의 이상에 민족구원의 대도가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지만, 연희전문학교 설립이 6년을 끌어오면서 겪었던 곡절을
모를 리 없었던 그에게는 그래도 대단한 결단을 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성직에의 소명 같은 것이 없이 다만 오산에서의
충격과 꿈을 실현한다는 이상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목사가 될 마음이 없었다.

   갈 길 아님을 깨닫고 1년만에 중퇴

 그의 신상에 관한 기록은 연세대학교 학적과에 보관되어 있으나 학적에 관한
기록은 남은 것이 없다. 입학하고 나서 채 1년의 과정을 마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난 것이 확실하다. 그의 지병인 안질 때문이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가 서울 종로2가에 있는 YMCA회관에서 임시 개강하였다.
연희전문학교가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얏골에 학교 건물 언더우드관을 짓고
이전한 것이 1918년 4월이었기 때문에 주기철은 이 신촌 교사에서는 공부를 해보지
못한 셈이다. 동향인 지수왕 역시 종로 교사에서 1년 가량 공부하였을 따름이다.
 연희전문학교 개설 당시의 학생수는 상과 100명, 문과 100명 신학과 60명, 농학과
60명, 수물과 50명, 응용화학과 30명 등 400명이었으나 주기철이 입학하던
학년도에는 91명에 불과하였다. 신학과 학생은 가능한 평양신학교와의 갈등과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모집하지 않았고 다만 연희전문학교에서의 성서교육의
정당성을 주기 위한 장치로 보존되어 왔다.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따로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기철이 연희전문을 떠났을 때, 연희 설립을 위해 그야말로 노심초사 심혈을
기울이던 언더우드 역시 지친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체미 치료하다가 연희의 역사의
횃불로 영원히 남았다. 그러나 주기철은 '연희'의 정신과는 다른 길을 갔다.
 주기철이 연정 상과에 다니던 무렵은 교장 언더우드가 미국에서의 치병차
부재였고, 또 초창기여서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어수선하였다. 그것을 이끌고 간
교수가 백상규, 김상옥이고 일본사람으로 쓰다란 이가 있었다. 주기철이 이 상과에
한 학기 이상 다닌 것이라면, 수신 일본어, 영어, 상업산술, 경제원론, 상업지리,
상업학, 상업부기, 민법 그리고 체조와 교련을 배웠을 것이다. 이들 과목들은 어딘지
주기철과는 이질적이고 동떨어져 보인다. 그의 안질이 학업을 중단할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다른 생의 계기가 그를 다른 길로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를 '한국기업가열전'에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민족산업의 어떤
기도도 봉쇄당하던 일제치하에서 금융조합 관리나 소시민의 생업경영으로 돈을 꽤
모은 시민으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연희전문학교의 초창기에 진학하였던 주기철은 그가 장차 몸바쳐 섬겨야
했던 평양교회나 산정현교회, 그리고 순교의 길에까지 가게 하였던 신앙노선,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생의 골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이 그의 갈 길이 아니란 사실들이 여러 각도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연희전문학교는 근대사에서 눈부신 교육의 결심을 이루었지만, 그때는 보수주의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었고, 언더우드가 서거가 주기철의 생의 변화를
재촉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비친 것이다. 책 보기도 힘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몸의
'가시'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적인 변화에로 이끌고 간 것이다. 그의
눈은 볼 것이 따로 있었다. 연희전문학교가 보여주는 것을 보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육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다는 영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꿰뚫어 보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직 뚜렷한 내적 변화의 전환 의식은 없었지만, 연희전문학교를
중도에 떠난 것이다.
 1916년 늦게 주기철은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안질이 상징한 새 세계로의
길은 아직 더 강렬한 동기를 필요로 하여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걸리는 신앙',
그것을 그는 앞으로 뼈를 깎듯이 체험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생애의 전환기를 꽤
오래 겪게 한 섭리였을 것이다. 그것을 그 자신이 지각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평양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4년 반 가량을 그는 그대로
고향에서 지냈다. 뒷날 그의 감옥생활이 통틀어 5년 반이었으니 두 경우가 우연히
비슷한 길이의 시간이었던건,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을까.
 주기철이 우리 신앙사나 사상사에 남겨준 공헌이 여럿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시간'속에서의 인간정신의 위상이다. 개개인이 신앙이나 신념을 '시간'속에서
변함없이 보다 훌륭하게 지키는 것도 힘들지만, 격한 형극의 길에서 한초 한초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끈질기게 시간의 지긋한 모습을 직시하면서 내일 또 내일,
고백과 결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그는 보여주고 갔다.
앞당겨졌으면 하는 시간도 결코 서둘러 지나가지 아니하는 시간이 초나 분이 아니라
한달, 1년, 5년을 지긋이 갈 때 거기 맞서는, 이 초인적 삶의 질고와 고귀성을 그는
보여주고 간 것이다.
 그 첫 번째 시간을 그는 곰내에서 맞이했다.

   곰내에서의 4년반

 곰내에 돌아온 주기철은 마산 진해까지 다니면서 안질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연희전문학교 복교에의 길이 멀어져간 것이다. 몸과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교남확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오상근과 함께 지방청년들의 교육에 힘썼으나 좌절감은
깊어갔다.
 그런데 그가 곰내에서 지내던 1917년 무렵은 한국 근대사에서는 결정적인
변혁기였다. 선교부가 그 해를 '산업혁명'이라 부를 만큼 사회경제적 변혁이
가시적으로 강행되고 있었다. 일본자본의 침투는 전근대적 경제구조의 몰락을
재촉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상품의 홍수에 눈뜬 전에 없던 소비자세, 그런
데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반사회적 발산 등이 팽배하였다.
 또한 물가고에 따른 아녀자들의 직장 진출, 그로 인한 전통적 한국 가족제도의
동요, 취업 지망 청년남녀의 수평이동, 농촌인구의 계속적 격감, 이런 여러 현상은
근대 사업사회에로의 변신이 사회에 가용하면서 사회혼란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1917년 말 현재 전국의 공장수는 780여개에 이르고 있었고, 그 자본금은
2100만원이요, 생산고는 총 4600만원에 이르렀다. 더구나 450만 명에 이르는
소작인들의 생활은 기아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무직과 기아, 추위, 고물가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는 선교연례보고서가 남아 있다. 생활의 빈핍화로 해외로
나가는 이민의 수도 1918년 간도에만 1만500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다 일제의 반사회적 정책 강행도 우리 민족에게는 전레없는 비참을 안겨다
주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유곽업 창기취제' 규정을 발표하여 공창제를 실시
서울에만도 50만불을 들여 홍등가를 설치하여 한국 청소년들의 도덕적 해체작업을
시작하였다. 더구나 1918년에는 총독부의 공식 예산 18만2000불을 아편재배항목으로
배정해서 이를 전매하게 하는 범죄적 행위를 불사하였다. 주초의 총독부 세입은
한때 전 세입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총독부가 공금으로 공창, 마약, 주초를
확대공급 전매하여 이 사회의 병폐화를 가속화시켰으니 식민정치의 죄악성치고 이
이상의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도 그때에는 초기의 정열과 순수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비판되었다. 이광수는 교회의 독선화와 미신화 그리고 그 고루성을 비판하여
문명사와의 합류를 권고할 정도였다. 기독교가 기대와 흥분으로 근대화의
견인력이라 해서 촉망되던 시대가 가고 있다는 정표였다. 기독교는 제2시대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기철은 청천을 뚫고 들려오는 하늘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일정한 기간의 불확실성이란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가 늘 애매성으로
심판과 방임의 경계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러나 주기철은 그 기간을 가다듬고 겪고 거쳐야 할 노정의 공간으로
보았다. 주기철의 생애가 우리들에게 위대한 감명과 호소력을 가지되, 거리감 없이
친근하고도 인간미를 그대로 풍겨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안갑수와의 결혼

 주기철은 만 20세가 되던 해인 1918년, 김해의 안갑수(1900__1933)와 백년해로의
혼인을 하였다. 안갑수는 서울 정신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매결혼이었다.
 안갑수는 목사부인으로나 한국의 전통적 가정의 어머니로서 아주 훌륭했던
인물이었다. 성경 읽기에 힘을 기울였고 감정이 섬세하며 경건의 부덕을 갖춘
여인이었다. 그의 모친이 김해의 합성학교를 설립할 만큼 개화된 가정에서 자란
규슈였다.
 주기철목사의 자녀들은 다 안갑수 부인의 소생들이요, 안갑수와 사별한 후 재혼한
오정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주기철과 안갑수 사이에 장남 영진이 1925년 10월 23일, 차남 영만이 1922년 11월
5일, 삼남 영목이 1925년 1월 9일 사남 영해가 1927년 11월 13일, 장녀 영덕이
1930년 3월 5일, 오남 광조가 1932년 3월 18일생이었다. 안갑수가 떠난 것은 광조가
한 돌 두달째 되던 1933년 5월 16일이었다. 30대 초반에 5남 1녀의 어머니로, 그리고
목사의 부인으로 살다 간 안갑수에게는 고생과 수고의 날밖에 없었다. 주기철의
순교에 씨앗을 남겨 그의 가통을 잇게 하는 모든 준비를 다 마련하고 간 것이다.
 안갑수의 사후 주기철이 재혼한 오정모여사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 주기철의 순교행로에는 어떤 의미에서 더욱 힘이 되었고, 주기철의 가정에
대한 끈을 순교의 결단으로 끊을 수 있는 객관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적격의
배필이었다. 그것은 섭리였다. 그것이 주기철 순교의 경륜이었다. 여섯 아이를
키우며 가정의 정을 심고 살던 가정부인 안갑수에게서 순교의 결단을 돕는 정서적
용단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갑수는 1920년대 한국교회 목사들 부인의 한 전형적 이미지를 보이고 갔다.
조용히 아이들을 키우고 뒤에 숨어 전면에 나타나기를 삼가면서 여인으로서의
환희도 당시 여성들의 한계보다 더 깊이 제한하고 은폐시키며, 그러다가 병약에
시달리고 말없이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져 간 목사부인의 생애, 그것을 그대로
한편의 시처럼 남기고 간 것이다.

   김익두의 부흥회를 계기로 성직 결심

 3.1 독립운동이 창원에서 터진 것은 좀 늦은 3월23일 있었다. 그것이 5월에
이르기까지 시위와 만세 고창으로 계속되었고, 진동에서는 과격시위로 주재소와
우편국이 습격당하기도 했다. 칠원읍 교회의 직원 전원이 피체되어 복역하는 일을
비롯한 교인들의 수난이 이런 시위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곰내에서의 만세운동은
과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가 격은 피해, 경남노회 지역에서만도 총살자가 날 정도의 일제만행이
준 충격은 컸다. 주기철 주변에서도 상해로 가는 사람들, 10월 혁명의 반제공산주의
운동에 기우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국내에서의 실력양성이란
현실적 자구운동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등으로, 민심이 세 부류로 흩어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상 폭력이 과격투쟁을 할 수 없어 대개 제3의 방법인 잔류하는
쪽에 동참하였다. 이들 기독자들은 신앙의 메시아니즘을 민족 구원에서 실현하려 한
사람들이었지만, 동기는 역시 종교적 차원에 집중되고 있었던 종교인들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다만 그러한 종교적 자세가 그 자체의 다이내미즘으로 일제의
침략통치에 저항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기독교의 본질상 얼마든지 있는
일이었다.
 3.1운동을 겪은 기독교회는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억압당하고 있는
겨레에게 영원한 복음의 축복을 기약한다는 소박한 신앙에로 민족사적 위치를
정립하였다. 기독교로 구국 해방한다는 정치적 목표가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도로만
영생의 축복을 받는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복음주의였다.
 이러한 신앙의 정착에로 주기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이기선(1878__?)이요 다른 한 사람은 김익두(1874__1950)였다.
 이기선은 평북출신 목사였지만, 1917년 경상남도 울산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다가
3.1운동 직후인 1920년 김해읍교회에 부임하여 1930년까지 목회한 유명한
부흥목사였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의 골수 주도자로 일제 말기 갖은 옥고를 다 겪고,
해방 후에는 신사참배 반대자들만의 순수한 신앙인들로 한국교회를 재건하려던
열정의 신앙 지도자였다.
 김해에 가끔 나가던 주기철은 이기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뚜렷한 성서중심적인 보수주의 신앙에 매료되었다. 그의 신앙은 이제 명목과
의례에서 벗어나 영혼 속에서 지각되고 고백되는 생명력 넘치는 것으로 형성되어
나갔다. 이때 이약신(1898__1957)이 웅천의 개통심상학교 선생으로 부임해 와서 둘
사이의 교우관계가 깊어갔고 신앙의 지기로서 서로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주기철에게 3.1운동 이후의 정신적 동요를 가라앉히고 신앙의 싹을 틔워
단연 그리스도를 위해서 몸바치는 일생을 살아가도록 자극하는 결단의 날이
다가왔다. 한국교회 희대의 부흥목사요, 3.1운동 이후의 한국정신사에서 가장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며 만연되고 있던 회의주의와 패배주의 그리고 도덕적 퇴폐와 사상적
혼란을 불타는 확신으로 밀어 막아서던 김익두가 이 지역에 찾아온 것이다. 1920년
5월 27일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그가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기대와 여망을 한 몸에 받아오던
김익두의 마산 집회는 성령의 불기로 공전절후의 영적 감동을 이 지역에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주기철과 지수왕, 그리고 배운환이 함께 참석하여 깊은 신앙적 깨달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생애를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완전히 전환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주기철은 신학을 통한 구국이념이나 정신적 실향자로서의 길에서 뛰쳐나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미
옛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21년 7월에 북부리의 권찰 일을 맡아 하면서 신학
지망의 구체적인 길을 모색해 나갔다. 그리고 1921년 12월13일 경남노회가
문창교회에서 정기노회로 회집되었을 때 주정택, 홍수원, 강상은과 함께 신학교 입학
시취에 통과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기철은 1922년 3월, 25세의 나이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굴곡없는, 그래서 순교로
종착되는 첫 발을 디뎠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의 신학수업

 주기철이 신학교에 입학할 무렵 평야장로회신학교는 입학 조례를 제도화해 입학
자격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신학교가 학문적으로
월등하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견실한 일꾼을 길러내 세계교회사의
기적을 낳을 만한 교회 지도자로 활동하게 하는 데에는 자랑할 만한 신학교였다.
재적 학생수도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의 신학교 교수진에 대해서
김인서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평양신학교는 주목사 재학시대가 황금시대였다. 태산같이 진중한 나부열박사의
공관복음 강의는 세계적 수준이라 할 만했고, 어도만박사의 구약학 강의도
해박하였다. 덕풍이 높은 부두일박사와 업아력박사의 역사신학 강의와 왕길지박사의
라틴어. 등 고전어 강의도 고명하였다. 평양교회의 개척선교사 마포삼열박사는
학문이나 인물이 위대하였다.

 강의과목은 1학년 14과목 중 7과목이 성서학, 4과목이 목회학 계통이었고, 2학년의
16과목, 목회학계가 5과목의 배정이었다. 전체 47과목 중 34과목이란 압도적 비중이
성서와 목회학에 집중되고 있었다. '성경 보고 목회 잘하기'가 그 신학교육의
목표였을 드러내주고 있다.
 교수진은 전술한 사람들 이외에 곽안련, 배유지, 이눌서가 있었고, 최초의 한국인
교수님 남궁혁이 박사학위를 하고 1925년 초 부임하였다. 주기철은 1925년 3월에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남궁교수의 강의는 듣지 못하였다.
 주기철이 신학교에 다닐 때 남겨 놓은 흔적이 하나 있다. 지방색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그것이다. 그때 신학교에는 지방 출신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여럿
마련하였는데, 가령 경사도 숙사, 함경도 숙사, 이런 식으로 출신도별로 함께 기숙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던 것이다. 여기 대한 개선을 주기철이 학교측에 건의한 것이다.
그것이 막연한 지방색 배제의 의도에서 그러하였는지, 아니면 이미 한국교회의
지병인 지방색 암투의 비극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러하였는지 그 자신의 술회가
없기 때문에 불분명하지만, 지방색 문제가 1924년 말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박승명목사 때 터진 일이 있어서, 그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마산 문창교회는 주기철과도 인연이 깊었던 곳이다. 그 병폐의 잡음이 주기철에게
알려졌던 것이 확실하다. 주기철의 지방색 제거의지는 그래서 확고했으며 그것이
교수회에서 수락되어 학생들은 뒤섞여 기숙하게 되었고, 기숙사동의 이름도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평양신학교의 학생시절 주기철에게는 하나의 큰 부담이 있었다. 힘은 들었으나
보람있는 첫 목회 경험이기도 했다. 평양에서 멀리 경상남도 양산의 교회에 전도사
아니면 조사로 일을 보았던 것이다. 양산교회는 창립 15년이 되던 교회로 정준모,
이영간, 금석호 등이 주요 멤버였고, 후에 신학적인 문제로 일대 격론을 벌여야 했던
조용학과도 그때 친분이 두터워졌고, 동경제국대학을 다닌 이일우와도 산 기도를
함께 다니며 교제를 굳혀갔다.
 평양과 양산의 거리는 한국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거리인데, 1920년대 초반의
교통시설 형편에 매 토요일마다 와서 주일 교회 일을 보고 다시 평야에 간다는 일이
사뭇 피곤한 일이었고, 따라서 주기철은 아주 고달픈 신학교 생활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신학생들은 예외없이 대개 이런 형태의 왕래 교육을 받고
있었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준비 내지는 방법에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시대나 상황으로 보아서 교회에서 할 일이 쌓여 신학생활만의 진지한 추구가
힘들었다.

   제3장 개혁과 신령의 목회 초창기

 교회를 진리로 튼튼하게 세우고자 합니다.
 경남노회보고, 1925년

 1925년 주기철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할 때는 그의 나이 30세로 접어들고 있었고,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격동이 1925년에 평양신학교 졸업

 그 첫 변혁이 사회공산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정면 공격의 시작이다. 그들은 국내
반일투쟁에서 스스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고 판단하고, 또 국제 공산당 본부의
지령도 있어서 한국에서 기독교를 자본주의의 주구, 그리고 개량수정주의의 나약한
순응자로 낙인을 찍고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서울에서
전국주일학교대회가 열렸는데 한양청년동맹이란 공산주의 단체가 바로 건너편
광장에서 이 대회를 방해 공격하는 대대적인 반종교대회를 개최하였다. 불법으로
개최된 이 공산주의자들의 소란을 경찰이 제재하자, 이들은 기독교가 일제와 제휴한
것이라 하여, 당시 "개벽"에 기독교 중상의 난문들을 파격적으로 게재하였다.
김익두가 이들에게 고등 무당으로 매도되고 간도와 이리에서 부흥회 도중 폭행을
당해 강단에서 끌어내려지는 수모를 겪은 것도 이때였다.
 묘하게도 1925년 가을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선교사 비행을 폭로
지탄하는 글들이 거의 연일 연재되어 선교사들의 저간의 헌신적인 업적들을
무산시켰고, 기독교의 반민족성을 규탄하는 여론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타도운동과 타이밍이 맞는다는 의미에서, 그런
신문기사는 어떤 형태로든 반기독교운동과의 접착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해 11월의 '제1차공산당사건'을 계기로 국외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만주와 시베리아, 북간도 등지에서 계속하여 기독교인들을 밀정이니 일제
주구니 하며 학살하고 있었다. 남만 종성동에서는 기독교 목사 두 사람을 껍질을
벗겨 살해한 일도 있었다. 해외의 한국교회가 일본의 만행에 시달려 가령
노루바위사건과 같은 잔학행위에 전율하면서도 1925년대 이후 차라리 일제 군경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1925년대 이후 차라리 일제 군경의 보호를 받으면서 공산당들의
박해를 모면하였던 역사는 우리 민족사의 서글픈 모순을 상징한다. 그것이
공산당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일제와의 타협이란 공격의 목표로 삼게 하였지만, 한국
기독교가 걸어온 길이 험준함을 이 이상 더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다시
없었다.
 1925년은 또 한국내에서 민족주의에 기이한 반선교사운동이 기승을 떨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대구의 이만집(1875__1944)을 비롯하여 숱한 자치적 조선적
기독교의 표방이 잇달았다. 서울의 신흥우가 지향하고 나선 반서복, 반교권의
적극신앙단 분파운동 역시 이 시기에 속한다. 신학의 전통이 오래지 아니한
한국교회에 동기가 모호한 여러 자주적 교파나 종파의 창생은 이제 겨우 성숙단계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커다란 짐이 아닐 수 없었다.
 1925년은 또한 사이비 문화정치를 표방한 총독부의 소위 산업제일주의가,
한국인의 정신을 산업주의에 몰두하게 하여 일제에 예속화시키고 거세하려는
기만정책으로 둔갑하면서 한국경제를 침식하던 때였다. 1913년부터 시작된 총독부의
공공연한 한국 청소년의 정신적 신체적 해체작용에 촉매 구실을 한 아편, 공창
그리고 주초의 폐해는 1925년 오긍선(1878__1963)에 의해서 사회문제로 제기되어
악랄한 일제 식민통치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15년 10월15일에는 서울 남산에 5년 6개월여의 대공사 끝에 총공사비
시가 156만 4582원을 들인 조선신궁이 세워져 우리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진행된 해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주기철이 싸워 이겨야 할 신사의 본영이 주기철이
힘을 갖추고 준비하여 가슴을 펴고 신학교를 졸업하던 날에 함께 이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국체의 본체요 그 정점으로서, 한국 통치의
실질상의 권좌였다. 그것은 군국 일본과 그 천황제를 지탱하던 실체였다. 그 신궁의
출발과 함께 주기철이 저 멀리 거리를 두고 대결과 격돌로 평행선을 가다가 19년이
지난 다음 가장 무서운 힘으로 도전하는 한국의 양심, 하나님의 총선된 종으로, 제단
위에 바쳐지리라고는 누군들 짐작이나 하였으랴.
 주기철은 이렇게 순교한다. 그러나 그것이 승리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세계
역사를 주도한다는 사실이 그의 순교 1년 후에 입증된다. 1945년 8.15 행방과 함께
우리 겨레는 이 신사궁들을 전국에서 일제히 파괴하고 불태워버렸다. 해방 이후 단
한 주일 만에 전국 신사 163건이 소실되고 파괴되고 짓밟혔다. 더구나 미군정
당국은 일본인 철퇴에 대하여 '군인, 창기 및 신관'에게는 특정일을 지정하여
퇴거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일제의 신사를 군인 및 창기와 함께
부도덕의 타기할 만한 대상으로 비하시킨 조치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이 세 직분이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이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25년은 또 일본의 제국의회에서 치안유지법이 통과되어 국제의 변혁에 대한
형량이 언급되다가, 1928년에는 그것이 사형과 무기징역으로 결말이 났다. 국체란
말이 처음 일제 법령 속에 등장하여, 이것이 장차 사상통제나 일제에의 희생에
거대한 파괴력과 위협을 발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조선일보"가 그 위협을
고발하였다.

 치안유지법령의 내용이 지극히 가혹삼엄한 것은 거세의 물의를 초한 바이라...
장차 조선에 파급될 바의 여러 가지 변태적 혼란은 더욱 우리의 각오에 임할
바이라.

 이 글에 주기철이 순교할 징조가 보이고 있다. 겨레가 각오로 임할 것, 그러나
기독교 신앙적 의무감 없이는 그 신사에 대결할 각오란 갖기 힘들었다. 신사는
아무리 국가의례라 명분은 고집하였지만, 결국 종교행사였고, 따라서 일제치하의
모든 민족운동의 저항은 천황제나 신사나 다 종교적 양심이 기초가 도지 않고서는
핵심적 도전이 될 수 없었다.
 주기철의 외로운 투쟁은 이처럼 신사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주기철은 신학교 졸업 후인 1925년 12월30일에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에 시무하였으며 위임은 다음해 1월10일에 하였다. 그의 전임 목사는
정덕생(1991__?)이었다.

   부산 초량교회 목회

 정덕생목사는 민족주의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이다. 부산 백산상회의
안희제(1885__1943)가 정덕생의 지도로 신앙에 인도되면서 동시에 혁명투사의
자질을 형성한 배경이 초량교회였다. 초량교회의 중진 한 사람이던 윤현진 역시
정덕생이 아끼던 인사로 독립운동자금 거출에 공이 컸던 인물이다.
 그러나 안희제의 그 이후 향방으로 보아 일제치하 독립투사들의 교회내 활동이
신앙적 동기의 외연 형식이 아니라, 조직과 방어 속에 일단 자리잡는 형식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운형이 한때 서울 승동교회의 전도사였다든가, 이동휘가 간도에
건너가기 전가지 함경도에서 순회 전도사로 일하였다든가 하는 사실들이 다 그런
유형을 설명해 준다. 당시로서는 교회만한 전국적 규모의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우산 속에서 은폐하여 활동하던 부류가 많았다. 안희제가 1940년에 대종교의 총본사
전강의 요직에 앉은 사실이 그들 투사들의 종교 편력성을 여실히 입증한다.
 본심이 각각 다른 이들 몇 사람이 초량교회 정덕생목사의 비호아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정덕생목사 자신도 1922년 평안북도 중강진 경찰서에 압송되어
16곳의 유치장을 거쳐 50여일만에 방면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 기록이
총회록에까지 기록되어 남겨진 것을 보면 그의 독립투쟁 면모가 총회에까지 알려진
것이 확실하다.
 이런 형편이라면 초량교회 자체 안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교세가
타지방에 비해 훨씬 약하다는 자성론이 대두되면서 교역자 교체론이 당회에서까지
논의 상정되었다. 정덕생은 1925년 11월 10일 결국 사임하고 부산진교회로
전임하였다. 그가 초량에서 한 일은 1만 3000여원을 들여서 70평 연와 양제의
예배당을 신축한 일이었다. 떠나기 3년 전에 완공을 보았던 예배당이다.
정덕생목사는 결국 다른 교과를 세우도 또 광업에도 종사하는 일이 성직에
부적격이라 여겨져 1933년 총회에서 목사 제명처분을 받았다.

   엄격한 처리로 교회의 본모습 찾아

 이런 교회에 주기철이 위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우선 할 일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의 정치적 요소들을 숙정하는 일이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뚜렷한 본상을 갖추어야하며 그 종교적 소임에 우선 충실해야 한다.
 이런 일을 위해 주기철이 처음 한 일이 몇 가지 행정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일이었다. 신앙은 그 전통과 구조 없이 내용상의 발전과 외연적 공헌을 할 수 없다.
관할 구역의 새로운 조정, 5일(금요일)기도회를 통한 체계적 예배행위와 성서연구 및
공동체 의식의 강화, 그리고 재정집행에 대한 계절별 감사제도의 도입이 그
일부이다. 예산을 조정하여 교회 선교방향과의 일치를 수시 검토하고, 예산집행을
내실과 유예로 하는, 지극히 말초적인 행정조치가 혁신적으로 취해졌다.
 이런 구체적인 목회방향은 주기철 신학의 역사적 실재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신령과 금욕의 피안적 경건으로 은퇴된 것이 아니었고, 세상일을 이원론적
거리감으로 무시하는 신비주의로 기운 것도 아니었다. 냉엄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육체적 수요에 따라 살아가면서, 거기서 고귀한 차원을 향해 뚫고 올라가는 극복과
초월의 신앙을 성취해 가는 순례의 길이었다.
 초량교회에 있을 때 주기철은 이만식이란 사람의 집 한 칸을 세들어 살았는데,
그때 4남 영해가 태어나고 1930년에는 딸 영덕이 태어났으며 1928년에는 삼남
영묵이 병사하였다. 그는 이 가난과 아버지로서의 비통을 안고 그의 첫 목회를
지그시 수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가난과 궁핍은 전국적이었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930년도 연례보고서에
이런 글이 있다.

 남한 지역에서의 경제적 곤경은 극심하다. 그것이 교회에도 예민하게 감지되고
경험되고 있다. 목회자들을 지탱 못하게 하기도 하고, 교회의 여러 활동을
마비시키고 있다.

 초량교회에서도 이 궁핍의 물결은 마찬가지였다. 주기철은 서리집사로 양성봉,
강누식, 손기찬, 양천호를 각각 임명하고 성서적인 의미의 집사(diakon) 일을 감당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회 재정을 긴축하면서 교역자 봉급의 하향조정을
단행하였다. 그러면서도 상회비나 선교비, 그리고 신학교 재학 출신 학생들을 위한
보조금은 변경하지 않았다. 부인 안갑수의 재산 논 6000여평도 이때 처분하여
교회재정 일부에 충당하였다.
 주기철은 교회를 엄격히 처리하였다. 그는 100명 교세의 교회에서 가정의
순수성과 결혼의 신성을 모든 가치 위에 두고, 이에 저촉된 어떤 형태의 행위에도
엄격히 처리를 가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의 급작스러운 이런
처단이 한편 쉽게 용납되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이내 그러한 경건이 교회의
생명력으로 타올라 교인이 300여명으로 증가된 것을 보면 시책의 정당성이 인정된
셈이다.
 더구나 그는 신령주의적 광신 형태의 신앙현상을 경계하고 이를 철저히
봉쇄하였다. 이적과 기사에 편중하여서 그것만이 고답적 신앙의 형태라고 생각하는
온갖 분파적 독선을 단호하게 치리한 것이다. 심리학적 분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신앙 역사로 보아 잘잘못의 경험도 없던 당시로서, 이런 과단성 있는 판단과
척결은 그의 용기와 결단의 신앙, 계속적인 기도, 그리고 깊은 성서적
신앙에서밖에는 힘을 갖출 수 없었던 것이다. 교인 김모씨의 안수기도를 책벌한
것이 이때이다.

   철저한 교육으로 신앙의 기반 다져

 주기철 목회는 교육에 대한 강조가 또하나의 커다란 특색이었다. 한국교회
제2세대가 도래됨에 따라 새로운 교회발전을 기약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1927년 경남노회가 주일학교 확장을 대대적으로 계획한 데 자극을 받아 주기철은
초량교회에 그해 3월 유년주일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에 양성봉을 임명하고 5월에는
장년 주일하교를 발전시켜 교장에 방계성장로를 임명하였다. 양성봉은 주기철이
특히 아끼던 인재로 1930년 장로직에 장립하였다. 그는 일제치하에도 계속
초량교회를 지키다가 한때 수감된 일이 있다. 해방 이후 1946년 초에 부산시장에,
1948년 강원도지사를 거쳐 1949년 경상남도 지사로 취임하였고,
6^3456,12,15^사변시에는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남비상사태
대책위원회위원장을 맡아 난국을 이겨나갔다. 1935년 환도 직후에는 농림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양곡관세 사건에 연루되어 1년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방계성과 주기철의 관계도 있대 맺어지고 깊어졌다. 평북 철산이 고향인 방계성은
1920년 부산에 이주하여 초량교회에 다니다가 1925년 주기철 부임 이전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주기철의 시무이래 아주 가깝게 지냈으나 1931년 주기철이 마산으로
떠나자 그 역시 광주의 양림교회로 이적하였다. 그 이후 제주도 만주 안동 등지를
거쳐, 1936년 주기철이 시무하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돌아와 다시 주목사와 만났다.
그들은 맥을 같이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40년 검거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에는 이북에서 이기선목사와 함께 혁신 복구운동을 산정현교회 중심으로
벌이다가 공산정권의 핍박을 받던 중 6^3456,12,15^사변 와중에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주기철과는 실로 20년을 신앙의 동지로 손잡고 형극의 길을 가던 중, 하나는
순교로 하나는 행방불명으로 각각 인간으로서는 가장 쓰라린 길을 갔던 것이다.
  초량교회에서의 목회는 이처럼 그에게 한국 현대사를 빛낸 거인들과의 만남으로
그의 가난하고 어려운 목회를 보람과 감사로 이끌어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끼쳤다. 그는
경남성격학원에 출강하였는데, 그의 신앙적 고백과도 같은 열강, 성서에 대한 심오한
주석이 여럿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끔 하였다. 그때 저 유명한 순교자 손양원,
한국보수주의 신앙의 영도자 이정심, 위대한 전도목사 전재선, 그리고 박손혁 등이
주기철의 명강에 자극받은 많은 사람들 중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손양원과 이정심은 당시 25세 정도의 열혈청년들로서 해방 후 둘 다 공산당에게
학살된 교회 진리의 수호자들이었다. 손양원은 여순사건 때 그의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이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에 희생당하고 자신도 6.25때 총살당한 우리 교회의
성자였다. 전재선은 1924년 주기철이 한때 전도사로 있던 양산교회에 같이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어서 구면이었다. 전재선은 1934년 희년기념 전도사업단을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 전국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그 운동은 해방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김익두 이후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순회여행을 하면서 부흥집회를 가진 전재선의
신앙은 주기철의 복음주의에서 이어받은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 복종이
그 핵심이었다.
 그 밖에 주기철의 신앙적 감화를 받은 인사로는 일본 순사 출신의 김석진,
구포교회에서 신앙에 입문한 노진현, 그리고 구영기 등이 있다. 김석직은 1918년
총독부의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를 지냈다. 1927년 주기철을 만나 회심하고,
1928년 초량교회에서 주기철을 도와 전도사 일을 보다가 평양신학교를 수학했다.
1935년에는 부산진교희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하여 장로회총회 부총회장을 역임한
바도 있는 지도급 목사였다.
 주기철이 초량교회에 있을 때 이미 그의 순교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1931년 초여름 경남노회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신사참배 반대안을
결의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인 발행의 "부산일보"가 이 사건을 '완미한 양귀 끝내
신사참배 거부'라고 대서특필하여 공박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논박은 양귀란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이런 엄청난 저항적 행동을 한국교회가 독자적으로 해낼 수
없으리라 보고, 그 배후에서 선교사들이 조종하였으리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쓴
글임이 드러난다. 우리로서는 굴욕적인 글이다.
 이 저항운동의 주동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경남노회에서는
가장 주도적인 교회가 초량교회였으니만큼, 그 교회 목사 주기철의 선도 없이 이런
일의 진행이 가능하였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주기철은 이제 그의 가야 할 길을
분명히 투시하고 그 길을 따라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마산 문창교회 시대

 마산의 문창교회는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교회다. 주기철은
목회로 유명하고, 또 주기철 순교이후에는 그의 정통 신앙 고수를 위해 취한 일련의
단안들이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을 끌어, 한국교회 정통사에서 주역을 담당한 교회
정통 보수의 열정이 교회 공동체 신학을 극복하면서 순수 목표의 달성을 위해
배타성을 가리지 않을 수 없어 피차간에 연관이 전혀 없는 문창교회로 갈라선 터에
역사 해석의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창이란 이름은 이제
한국교회에서 그 확고부동한 신앙 정조를 고수한 희생적 교회상으로 길이 남게 된
것이다.

   갈등과 분열로 상처난 문창교회 부임

 이 교회에 주기철이 청빙을 받은 것은 1931년 6월이었다. 이수연목사 사임 후
교회가 아주 어지러워지자 경남의 여러 원로목사들이 주기철이 아니면 그 교회의
치리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여러 주일 기도한 후 주기철은
초량교회에 사면원을 냈다. 그리고 그것은 힘겹게 수리되었다.
 주기철은 교인들이 마련한 예복 한 벌을 석별의 정으로 받고, 400여 교인이 각자
부담한 석별 간친회를 7월 27일 저녁에 가졌다. 후임으로는 이약신목사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기철은 그의 첫 목회지였던 초량교회를 6년 시무
끝에 떠났다.
 그가 떠나던 1931년은, 한국교회가 사회기독교에로 방향 조정하는 것과 그런
사회화에 반대하는 신령주의의 운동이 급속히 전개되던 때였다. 복음의 사회화에
대한 요청이 컸기 때문에 YMCA나 총회 그리고 총리원의 농촌운동. 사회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 전국 기독교회 유지들이 망라된 신우회가 1929년 조직되면서
선지자 아모스의 사회정의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수행한다는 매니페스토를
대대적으로 시해하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세속화되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고요한 영교만이
영적 해방과 천국의 열복을 찾는다는 신비의 신비 신령주의의 물결이 이용도나
백남주, 황국주, 그리고 문인 박계주의 이른바 원산신학산파를 중심으로 국내와
간도의 한인 이민교회에까지 파급되었다. 전영택도 한때 여기서는 그의 순수문학을
꽃피웠다. 이런 현상은 그런 신앙형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교회의 급격한 사회지향적 구조변화 때문에 신앙의 초월적인 차원의 약화를
가져왔을 것이고, 따라서 피안의 세계에의 도피감정이 아니더라도 인간 본성의
갈망을 채워줄 신부주의에 기운 경향이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일제의 군국파쇼화가
진행되고 만주사변 등으로 전시체제가 굳혀가던 시대에 식민지 겨레들에게 이 영적
위안에의 초대는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사회화나 신비화의 두 극단을 가지 않고 성육적인 기독교신앙을
이 역사 안에서 대결과 참여로 지탱해 나가야 할 신앙인군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주기철이 가던 신앙의 길이 그런 길이었다.
 주기철이 문창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1년 7월이었다. 당시 그 교회의 장로는
이순필, 박경조, 신상익, 이숙현, 이운춘 등이었다.
 그런데 주기철이 부임한 지 두 주일 가량 지나서 당회는 설립자 명의를
이자익(1882__1961)에게서 이순필로 변경 계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여러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더러는 사면하였다. 교회가 복잡한 어떤 문제에 휘말려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 복잡한 문제란 박승명목사 사건이었는데, 그는 1924년 12월30일에 문창교회에
위임되었다가 1년이 채 못되어 1925년 11월5일에 사면해야 했던 실덕의 인물이었다.
 박승명은 이른바 서북 출신이었으나 이 교회에 부임하자 곧 7계의 범죄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고, 박승명은 그것이 남도인들의 서북인에 대한 무고라고 총회에
고소하였다. 이것은 서북 교원강화 과정에 있던 장로교 총회의 즉각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따라서 문창교회 지지의 경남노회와 박승명 지지의 장로교 총회의
긴장으로까지 몰고 갔다. 그러자 문창교회의 일부 신실한 교인들이 손덕수와 함께
이탈하여 독립교회를 만드는 일까지 새겨 교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이 과정에서 장로교 총회는 특별위원회를 임명하여 문제를 처리하려 하였는데,
그때 위원중 함태영과 김화식이 경남노회 입장을 대변하였다 해서 특별위원직을
박탈당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자 그때 경남노회장으로 있던 이자익이 이 시끄러운
교회를 자신의 명의로 설립자 계출을 하였던 것이다. 함태영이나 김화식은 이
폐해를 해소하고자 충정으로 노력하다가 오히려 견책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함태영이 1927년 12월에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와서 교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1929년 떠났다. 그 뒤를 이수현목사가 이었으나
그 역시 일년여 있다가 1931년 6월에 떠나고 말았다. 한 사람의 실덕이 그렇게 오래
남아 누를 끼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기철이 문창교회에 부임한 것이다. 그의 신학과 목회 유형이 이
구체적 도전에 대한 응답 내지는 응전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목사의 위신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확립하는 일이었다. 목사도 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교인들과 그리고 일반사회는 그에게서 성자상, 수도자상, 목자상
그런 것을 기대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이미지 충족이 될 때에 교회도 사회도 그를
존경하고 따른다. 성직에 나간 사람이 세상사람과 같은 욕정과 관심과 인품을
가진다면 그는 길을 잘못든 것이다. 성직의 길은 자기를 위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희생과 헌신과 봉사 그리고 제사장과 같은 대속적인 일까지를 해내야 했다.
 다음은 신앙의 정통을 수립하고, 훼손된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가 평양신학교 다닐 때 건의할 바 있는 한국교회의 서북 비서북
지역성의 타파와 하나의 교회의 기독론적 확립이었다.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교인들의 심령에 상처를 안겨주어 신앙 자체에 금이 가게 한 근본원인이 이
지방색의 교권내 작용이었다. 주기철은 평양신학 때 이미 박승명 오욕의 모든
치부들을 알고 거기 분개하여 기숙사 배치의 개선을 요구하였던 적이 있다.
 그는 이런 중대한 교회의 모습 확립과 역할이 순교로 가는 길만큼 어렵고 고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교회가 사회적 여망의 대상으로 부끄러움이 없으려면 일단
거듭나는 신앙적 전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을 안 것이다. 전쟁 체험이나 일신상의
격변이 그런 계기가 되겠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전환이 어떤
경로로 찾아오게 할 수 있는가. 주기철의 문창 목회에 대한 도전은 이렇게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엄청난 심각성을 띠고 있었다.

   엄격한 처리로 교회 다시 일으켜

 그 무렵의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연례보고서는 이런
위기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에서 지금 선교사업이 종말에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정황이 특별히
난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남만에 흘러간 조선이민들을 따라 선교활동도 함께 따라가
계속하였지만 조선민족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심각합니다. 공산주의자들과
혁명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간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내외의 사정이 이런 혼미 속에 있을 때 한국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소리가
도처에서 격렬하게 퍼지고 있었다.

 현대 교회는 냄새가 나고 몰락 퇴폐하는 현상이라, 도모지 그 안에서 지내기가
신앙을 생명으로 삼는 성도로서 견딜 수 없는 바이오며, 튼 낙망을 가지게 하나이다.
과연 이 보조 나아가다가는 조선 교회의 운명도...

 이 글은 주기철이 곧 대결해야 할 소위 '신진리파'계의 고발로 주기철의 주목을
받았던 글이다. 주기철이 특별히 구상해서 꾸려 나갈 목회 유형이 이런 도전 속에서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하나가 교회의 신성성의 확보였다. 그는 이 점에서 아주 철저하였다. 부임 즉시
강당과 강대의 설치규준을 정하여 개조하고, 교회의 정문을 개수하여 주일과 수요일
예배시간 이외에는 개방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일학교 강당을
따로 신축하여서 학생활동이나 주일학교 교육을 그곳에서만 시행하도록 규제하였다.
이 교육관 건립은 그 시대로서는 아직 생소한 것으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예배당의
신성과 정숙을 고려한 조치였다. 이 교회당의 신성성의 개념이 그의 교회 지성소
신학과 연결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그의 신앙과 기독교의 거룩한 차원에 대한
고양과 보존의지로 전개되었다.
 그 다음이 주일학교 교육의 강화이다. 그는 1931년 부임 즉시로 마산 전역에 걸쳐
교방, 삼남, 만정, 오동동, 월영, 산호, 석전, 회원 등지에 분교 형식의 주일하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 주일학교들이 후에 교회 신설의 기초가 되었다. 교회들이
주일학교에서 파생 건설된 경우가 여기서 생긴 것이다. 이 주일학교 교육을
전체적으로 지도한 사람이 이순필이었다. 그때 교사로 일한 사람은 유년주일학교에
주영신 등 25명이었고, 장년부에 안갑수와 그리고 후에 안갑수 서거 후 주기철과
결혼하게 되는 오정모 등 12명이었다. 주기철은 이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34년 9월 평양신학교의 연구과에 가서 한두달 연수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가 이 교육에 전심한 원인이 그의 글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오늘 세계는 아동 쟁탈전을 하는 세상이다. 교회의 목사는 종교교육을 위하여,
주일학교 사업을 위하여 얼마나 열중하는가. 종교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자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고로 교직자는 그들을 후원하고 힘써 도와야 할
것이다.
 저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은 놀랄 만하다. 말로, 글로, 공장으로, 회사로, 학교로
다니며 주야로 활동한다. 욕을 해도 또 나와서, 갇혀도 또 나와서, 핍박해도 또
나와서 죽어도 선전한다.

 주기철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현실적 매력이 수없는 젊은이들의
시대적 갈망에 깊이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세상 사람들을 보고 정로 즉 예수를 소개하여 주지 아니하면 어찌 죄인이 아닐까."
주기철은 신앙에 사명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만인을 향하고
민족 전체를 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의 전파는 곡 의무요 책임이라 본
것이다. 주기철은 교회 행정과 재정의 철거하고도 합리적인 관리, 교회의 건물과
시설에 대한 영선적 조치 등에서 실로 목회행정의 구체성과 실제성을 깊이 고려한
여러 조치들을 취하여 그 시대 목회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실천적 국명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주기철 신앙의 역사성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한 일 중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이 교인들의 장례 문제였다. 그는
상사에 대한 전례없는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초량교회에 있을 때에도 그는
상사전무위원 10인을 임명하여 교인의 장례를 주관하게 하였다. 마산으로 오기 반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창교회에서도 1932년에 들어서자 상여를 하나 마련하여
교회 전용으로 쓰기도 하고 보관창고까지 마련하였다. 그의 신앙과 목회에 '죽음'에
대한 자세가 여러모로 검토되고 또 예비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1933년 4월에 행한 그의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의"는 이사야 53장을
본문으로 해서 한 설교였다. 죽음과 십자가, 그러나 주님이 우리 위해 돌아가신 그
숭고한 대속적 희생의 사랑에서 주기철은 죽음의 깊은 뜻을 명상하고 있었다. 남을
위해, 진리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죽는 고귀한 희생의 뜻을 피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의 성격에 대한 예감이 있었던 것이 여러 군데에서 입증된다.
 주기철은 드높은 신앙훈련을 목회지침으로 삼는 한편 교회 역사에 대한 기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신앙은 역사와 무관할 수 없다. 그리고 신앙은 지난
날의 성도들의 숨결, 그리고 장차 올 성도들과의 동행이란 연결고리에서 계승되고
전파되고 고백되는 신앙의 행적없이 있을 수 없는 실체이다. 그래서 역사편집작업이
기획되었다. 1933년 초 주기철은 교회의 연혁사 정도의 것만이라도 편찬하기로
제직회에서 가결하고, 편찬위원으로 이순필, 박경조, 이은춘 세 장로와 최장부,
한명동 두 집사를 위촉하였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역사를 쓰게 된 것이다. 신앙의 두
정점을 그는 이처럼 뚜렷이 목격하고 있었다.

   교회의 신성과 순결을 중요시

 주기철 목회는 여기서도 강력한 치리로 교회의 순결과 신성성을 지키는 열정을
보였다. 이 치리에는 도덕적인 문제와 신앙적 문제에 저촉되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여회원들과 밤늦게 한 방에서 기도하며 유한'
것으로 권면 사면 시킨 일이 있다. 이 밖에 여자 교인의 불근신으로 무기 책벌한 일,
불신자와 결혼한 것이 흠이 되어 유아세례명부에서 제명되었다. 어떤 교인은
간음죄로 무기한 책벌하였으며 제 7계를 범한 두 교인을, 한 사람에게는 무기 책벌,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학습명부에서 제적시키는 벌로 처리하였다. 여학생과 함께
여행한 사람에 대한 견책도 있었고, 또 현용택과 박모 여인의 7계 범행으로 현씨는
무기 책벌, 박씨에게는 1년 책벌을 각각 내렸다.
 '오늘날의 교회에 경건한 태도가 결여된 것은 두려운 일'이라 경고한 주기철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사람도 사람으로 만덕을 갖춘 사람이 되라 하신 교훈의
선교적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현재 조선 청년남녀의 풍기문란한 것은 말할 수 없이 타락인데... 교회는
교회청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고 버려 두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선교회는 조선청년, 아니 조선민족의 산성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교회가 어느 사회적 관계에서나 그 토대가 아니될 것이 무엇인가... 신자 형제여
자매여 다시 작정하고 전도하자.

 한국교회의 민족사적인 대임이 도덕적 갱신에 있다는 생각은 그런 개혁을 수행할
만한 순결한 집단이 있고, 그리고 그들에 의한 선교, 다시 말하면 생의 순결을
만인이 바라보고 갱신과 혁신을 수행하도록 하는 선도적 소임이 있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남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만인을 이끌
사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진리파를 숙정하다.

 주기철이 문창교회에 부임하던 때부터 묘하게 한국에는 이단적 색채를 가진 몇
분파운동이 창궐하고 있었다. 그때로서는 비교적 신신학적인 포용성을 가지고
"기독신부"까지도 이들에 대한 질책에 나섰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모이는 이들이니만치 스스로 반성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신자들로 하여금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케 하고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약간은  그런 미로에 서서 방황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로서도 언제까지 자중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남조선지방으로는 무교파주의의 신자들이 기성교회를
훼방하여 신성치 못하다 혹은 형해만 교회라고 선전하야 신자들을 유혹한다...
서북으로는 황국주 일파와, 원산의 소위 여선지를 중심한 일파와, 평야의 이용도를
중심한 기도단의 일파라 하겠다.

 우리는 이제 이 무리들을 '이세벨의 당'이라고 하고 싶다.

 여기 남선지방의 무교회주의자들이란 것이 바로 주기철이 대결해서 치리해야 했던
신신학설이었다. 그 신신학설의 주창자가 백남용이었다. 그는 1935년에 최태용과
함께 복음교회를 창설한 사람인데. 1920년대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동안 저명한
무교회주의 창설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흠뻑 받아서, 현실교회의 형해화와 그
비복음성을 비판하는 신학설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함석헌,
김교신과 같은 신앙의 동지들이 역시 같은 무렵 귀국하여 무교회주의 신학의 확장에
진력하고 있어서 대세가 전통적인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고
있었다. 소설가요 목사인 백도기가 백남용의 아들이다.
 1931년 백남용은 김해의 대지교회 초청을 받고 신학 강연을 하게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주기철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대지교회는 그 당시 조사 김형윤이
대담한 신신학 표방으로 교회혁신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런 주목받던 교회에
백남용이 초청되어 와서 주장한 신신학은 역시 당대로서는 대담한 것이었다.

 1. 예수는 욕이다. 소위 순욕설이 기독론이다. 그러나 욕 역시 하늘에서 내려왔다.
 2. 현대인도 성신의 은사를 받아서 글을 쓰면 그것도 성서이다.
 3. 십계명은 현대에 불필요하다.

 이 주장은 보수성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만 문제시될 성질의 이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대교회 시대의 네스토리안설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신학이었다.
더구나 '성서 지상주의'를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원리로 전수받고 교회에서 누구든
성령의 지도로 글을 쓰면 그것이 다 성서라고 하는 주장은, 신비주의적 오류의
전형으로서 성서의 일회적 계시성과 객관적 권위를 부정하면서 주관적 체험의
절대시라는 심각한 오류로 파급될 수밖에 없었다. 십계명의 불필요성도 다 이
주관적 경험의 우위성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주관적 체험에서의 성령이란 필경
그 주관 체험속의 한 '경험'으로 내재한 것으로 체험 감각 속의 모든 개인에게
따로따로 현상화한다는 곳에 이 이설의 가공할 만한 오류가 있다.
 바로 이때 주기철이 경남노회장의 중책을 맡아 이러한 이설의 처리에 임하게
되었다. 1932년 9월에 모인 장로교 총회에서 주기철은 경남노회장의 노회보고서에
이런 대목을 특서하였다.

 본 노회 경내에서는 백남용씨가 창도한 예수 순욕설이 유행하여 거기 감염된
전도사와 교인들이 있어 교회가 다소 어지러운 중에 있사오며...

 주기철은 이 이설이 이단사설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공분 과 진리에 대한
충성이 사태의 무난한 무마를 용납할 수 없게 하였다. 그것은 밖에서 기독교에
도전하는 공산주의 무신론 그리고 이교의 압력에 저항하는 강도 이상의 철두철미한
숙정만이 해결한다고 믿었다.

 말세에 희롱하는 자들이 일어나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지금 세계 도처에 큰
세력을 잡고 있는 신신학 사조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성경속에 있는 모든 초인간적
기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부인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는 그들에 대한 심판은
염연히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신신학을 심판으로 연결시킨 주기철의 소박하고 순결한 고백적 신앙은 타협을
거절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바로 돌아오기만을 수없이 피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933년 7월에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신학 수양회를 개최해서 이 문제를 교회의
공동체적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 결말을 지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신학 이설의
쪽에서 보았을 때는 주기철과 전통교회가 오류 속에 있다고 단정하였기 때문에
양자간의 타협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은 결국 '사도적 전승'에서 상징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과 전통의 신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기철은 결론은 이들을 숙정하는 것으로 지어졌다.

 영원한 불더미 속에서 고초 받는 지옥은 분명히 있다. 반기독자는 물론 교회에
출입하던 거짓 교인도 거기 있고, 이단사설로 남을 미혹케 하던 자도 거이 있다.
 두려울전저,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주기철은 마침내 1933년 7월3일 경남노회장으로 노회의 결의를 거쳐 전도사와
장로 10여명을 해임하고 처벌했다. 이 결의에 반대 한 사람은 조승제와 호주 선교사
두 사람이었다.
 이때 해직된 이들, 혹은 스스로 물러난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김형윤,
오성문, 배철수, 조용학, 박종원, 구종철, 박찬규, 배재환, 금석호, 안영과, 김덕봉,
홍성만, 우봉석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전도사, 조사 혹은 장로직에 있던 사람들로
다들 신진 그룹에 속한 청년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선구자들로서의 긍지를 잃지
안고, 오히려 구시대적인 종교재판을 받았다고 자변하고, 교회의 고루와 편견 그리고
무식을 조소하였다.
 사실 이들 중 조용학은 배철수와 더불어 쓸모있는 인재로 알려진 촉망받던
청년이었다. 그의 아들 조인제 박사는 현재 의사로서 사회에 크게 봉사하고 있는
덕망있는 기독교인이다. 조용학은 주기철이 양산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
친숙하게 알고 지내던 인연으로 해서 주기철의 중매로 그곳 교인 신차영과
결혼하였던 지기였다. 그 역시 비록 이 신진리파 사건에 연루되기는 하였지만
한국교회가 신명을 다해 수호하려 한 진리를 위해 1940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순교까지 한 이 나라 교회의 한 희생양이기도 하였다. 결국 책벌한 주기철이나 책벌
받은 조용학이 하나의 진리를 위해 비록 거리는 있었지만 함께 순교의 길을 갔던
것이다.
 여기 묘하게 주기철과 무교회주의자들과 기연이 눈에 뛴다. 오산학교의 이승훈이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을 교사로 썼고, 함석헌이 거기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 하여 근년에 "뜻으로 본 한국사"로 개제한 예언자적 민족사를 탈고,
출간할 수 있었다. 무교회주의자들의 기관지 "성서조선"이 이승훈 서거에 임하여는
그 기념호를 발간할 만큼 이들 사이는 친밀하였다. 더구나 김교신은 일제 말기
어려울 때 한동안 진영에 있는 조용학의 집에서 우거한 일도 있었다. 그때 조용학은
그곳에서 진영조달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교회주의자들이 이 백남용 일파로 지목되던 그룹으로 경남노회의 치리를
받은 데에 거센 반발이 일각에서 튀어나왔다. 그 반발은 장도원이 썼다.
"경남형제들의 소식"이 그것이다.

 경남노회 회원 제위는 깊이 반성하고 회개함이 있어야 할 줄로 안다...
 김형윤 배철수 등 제씨는 경남노회가 대신임하는 이씨와 같이 일본인
우치무라씨에게 망취한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며, 모신학박사의 비판과 같이
환몽입신의 신비주의자도 아니며, 문화지상주의의 지상 천국 건설 운동적
근대주의자도 아니다.

 '경남 형제들'이란 구절은 무교회주의자들과 이들과의 신앙적 연결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들이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경남노회
처사를 교권행사의 차원에서 인식하려 한 자체가 이미 이들이 무교회주의 관념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노회장 주기철을 비난 공격하지 않았다. '경남노회가 대신임하는
이씨'나 모신학박사가 거명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배철수가 활동하게 된 울산교회는 곧 경남노회 탈퇴선언을 냈다. 그 탈퇴 이유가
이렇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도 부인자가 아니요, 무교회주의자도 아니요, 성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도 아니다. 또 불건전한 신비감흥자도 아니다. 교리학상으로
보아도 아무런 이단자가 아니다. 그리고 불순한 인간 운동으로서 조선교회를
파괴코자 하는 야심은 결단코 없었다. 이는 현재적 직감에 있어서도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는 바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구출하여 그 본질을 만회코저 하며 현대적 호흡 속에서
신약성서적 산 신앙을 재인식코자 하는 자들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선언한다.

 이 글은 "성서조선"까지도 충격을 받았던 글이다. '현재적 직감'을 교회전통에
선행시킨 것이나, '교리학상' 스스로 전통에 자처한 것, '기독교를 구출 만회'한다는
발상, 신약성서만을 산 신앙의 대상으로 보아 구약성서, 그래서 십계명 무용의
이론에까지 간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대담한 선언'이 교회역사 2000년의 모든
전통과 신조 및 신학을 제외시킨 것, 이런 것들은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당성으로
구원을 소리쳐 외친 것이다. 진리보다는 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살려고 하는
그 사람이 여기 앞세워져 있다.
 이들의 진심과 그 중심이 대조되는 주기철의 말이 여기 있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낮아지심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나를
어디까지 낮추어야 당신 앞에 합당하겠습니까...
 주여, 당신의 얼굴 빛 아래 내 심령의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시어 나로 하여금
애통하고 회개하게 하옵시며, 내 신경을 긴장케 하고 당신의 완전을 향하여
달음질하게 하옵소서.
 오 주여, 나는 당신의  겸손을 사모하옵고 당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중세기 교황의 권좌에 오른 성직자들은 수도사 출신의 경우가 교회 권위와 신성을
수호하는 데 가장 빛났던 시기요, 그때 이단치리의 돌풍도 억세었다. 수도사적
경건이 악과 허위에 도전하게 한 것이었다.
 주기철이 진리 앞에서의 순종과 겸손이 이러한 대담한 치리를 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무한한 두려움과 사랑이 그를 진리 수호의 길에 나서게
하였던 것이요, 그것은 실제 스스로의 생명을 바치는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33년 7월 주기철이 이단을 처리한 날은 실상 그가 순교의 길에 나서는
첫날이기도 하였다.
 '담대하게 선언'한 이탈 그룹은 먼 인연이 있었던 조용학을 제외하고는, 진리 수호
위해 한국교회 선도적 입장에 서서 다들 순교 옥고의 길을 간 '경남노회 제씨들'과는
달리 수난의 길을 모면한 이유가 그들로서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공개되어 알려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산신성인의 에큐미니칼 정신

 주기철은 그의 문창교회 시무시기에 자신의 에큐메니칼운동(ecumenical,
교회합동운동)을 구체화하였다. 가령 그곳 성결교회 김목사의 가친이 별세하였을 때
제직회가 부의금을 전달하기로 의결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면식관계에서 된
일이 아니고 교회가 나서서 공개적으로 한 일이다. 한국교회에서 성결교회는 교계
예양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고, 전도의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는 독자적인 자유
전도를 수행하고 있어서 장로교나 감리교와의 관계가 항상 경쟁적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은 이른바 장로교 구역이었다. 따라서
이런 결정은 한국교회 관례를 벗어나는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김목사 역시 문창교회에 일이 있을 때 연보를 한 일이 있었다 마산에서는 교파간의
에큐메니칼 관계가 이처럼 주기철의 결단에 따라 성숙되어 갔다.
 이 에큐메니칼 신학은 주기철의 문창 부임 전에 떠난 교인들의 독립교회와의
대등한 관계 형성과 친교 구축에서 나타났다.
 주기철은 이들의 복귀를 염원하였고, 따라서 여러 명이 복귀하였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덕스럽게 진행되어 잡음과 불만이 전혀 없었다. 우선 첫 단계로는
돌아오는 교인들을 따뜻하게 맞아 '당회 앞에서 장로교 헌법과 처리를 복종하기로
서약하고 나서 교적부에 재기록' 하는 의식을 절차상 분명히 하여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갔지만, 날짜별로 당회록에 일일이 새로운 일인
것처럼 상세히 기록해 나갔다 사실의 중대성과 의미를 개인마다에 부여하고자
함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독립교회에 계속 남아 있는 이들과의 교회론적 친교의 성립이다.
그것은 신앙과 전통의 이질성을 시인한 채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전제를 거치는
것이었다. 1936년 1월27일, 이날은 마산의 교회역사에서 한국교회사에서 우뚝 솟은
날이다. 즉 한국교회가 분열될 때마다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일치의
고귀한 사명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날이 되었다. 주기철은
문창교회와 독립교회와의 '양교회 제직 연합간친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예산과 인원의 동원과 준비로 소홀함 없이 용의주도하게 일을 성취시켜 나갔다.
 주기철이 부임하던 날, 그를 멀리하고 이적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섭섭함이
극복되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제를 새롭게 일구어 갈 수 있었던 날이
그날이었다. 주기철은 이제 하나님만을 위해 모든 것 다 희생하는, 그런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하나의 커다란 희생을 겪게 된다. 그의 조강지처 안갑수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강지처 안갑수와의 사별

 목회자로서의 내심이 다져지는 동안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의 견디기 힘든 슬픔이
다가왔다. 조강지처 안갑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넷째 아들 광조가
태어난 것이 1932년 3월 26일, 그를 낳은지 1년이 겨우 지난 다음해 5월 16일이었다.
마산시 상남동 87번지에서 남편 주기철목사와 이 세상에서의 인연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불려 올라간 것이다. 1900년 5월 21일 생으로 주기철로 다 두 살 반이
연하인 이 정숙하고 정에 넘친 여인 안갑수는 서른 네 살의 꽃다운 나이에 아들
넷을 지아비와 함께 남겨놓고 홀로 먼저 떠나버렸다. 가난과 다산으로 주목사를
돕고 자녀들을 돌보는 일이 힘겨웠던 그녀에게 남편의 순교마저 보지 않게 하신
하늘의 뜻이 계셔서였던가 보다. 주기철 생애에 그의 얼굴을 밖으로 내민 흔적이
없고 그의 한 말이 들려온 일이 없었다. 그저 목사의 뒤에서 여인의 아픔과 노고를
견디며, 사랑의 속에다 숨기고 가리운 채 말은 일만 어렵게 어렵게 견디어 내다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사랑과 아픔을 두고 간 것이다.
 그의 병명은 뚜렷하지 않다. 1933년 봄, 안갑수는 언니의 급작스러운 병사 소식을
들고 김해에 갔다가 피곤에 겹쳐 탈진되어 남편과 함께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코밑에 조그만한 종기 같은 것이 빨갛게 나타나 있었다. 날마다 쌓이는 피로를
풀지 못한 데다가 가정 안의 상사로 마음마저 상한 것이 겹쳐 부인의 건강이 지탱될
것 같지 않았다. 마침 교회의 이순필장로가 의사여서 그 종기를 떼버리자고 했다.
주기철이 그 말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칼로 이 종기를 따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치명상이었다. 거기다 친정 모친이 회복을 서두르기 위해 인삼 달인 것을
주었다. 그것을 마시고 나자 안갑수의 신열이 갑자기 올라가더니 백약이 무효하여,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갑수는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남편에게 "죽음이 무섭지 않나, 다만 당신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그것이 안타깝다"고 걱정을 했다. 아내는 어머니다운 데가
있다. 돌보아주고 마음을 써주어, 그 남편이 세상에서 소신껏 살아가도록 뒤밀어
주는 거대한 힘이 아내에게는 있다. 그것이 이제 없어지게 된다는 자책감이 부인의
죽음을 스스로 슬퍼하게 한 것이다. 그녀는 앓아누워 있으면서 어느날 오정모를
불러 자기 사후에 주목사와 결혼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한다. 그것이
오정모에게는 유언으로 들렸다.
 아내를 잃고 어머니를 잃은 가정의 서러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그
일은 다른 무엇에도 비교되지 않는다. 견줄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주기철과 그의
자녀들이 겪었을 때는 더욱 내면화한 것이다. 주기철이 남긴 설교, 기도, 글 그
어디에도 아내를 잃은 아픔을 언급한 곳이 없다. 목사의 가정상의 비애는 교회
앞에서 사려져야 했다. 그가 어두운 곳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할 때도 그 비애가
하나님 앞인지라 일언반구 말해서는 안되었다. 다만 그의 가슴 속 손에 닳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엉기고 눌러 골수 속에 가리워져야 했다.

 본 교회 주목사님 영부인 장의 준비 일체는 본교회에서 이를 담당하기로 동의
가결하다.(1933. 5. 16)

 이것이 장로교라는 것이다. 곧 칼비니즘이다. 위의 글은 교회 제직회 공식
회의록인데 사사로운 글이나 정이 들어갈 수 없다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거기
정이나 인간사의 감정이란 추호도 끼어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그
무엇인가. 칼비니즘의 '하나님께만 영과'이란 신학이 이 글귀 이상 더 모질게
보여주는 것이 어디 또 있을까. 한 여인은 갔다. 그것으로 뒤에는 말도 없고 눈물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 그 분만 경륜, 그리고 영광만 이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것이다.
 안갑수의 장례식은 1933년 5월19일 낮 한 시, 제직회의 결정에 따라
문창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무학산 공동묘지에서 행렬을 멈추었고,
모든 행사도 다 끝났다. 안갑수는 이렇게 갔다.
 그러나 목사의 목회는 계속되어야 했다. 목사의 격무나 사명은 가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특히 아내의 헌신적인 협조와 이해, 그리고 동조 가운에서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재혼은 불가피하였다. 아내를 사멸한지 2년이 지나 주기철은
결국 오정모와 속현을 하였다. 1935년 여름의 일이다.

   '사랑'을 느끼게 한 오정모의 재혼

 오정모는 1903년 10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정의여학교를 마쳤다.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문창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소년면려회의
지도교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예민하였고 체질은 병약한 편이었다.
그러한 병약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서른 세 살에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아본 적이 없고, 전실 자식 넷을 훌륭히 키우면서 남편 목사의 교역과 사명
수행에 커다란 보필을 하였다. 그의 신앙심과 아내로서의 헌신, 그리고 신앙
동료로서의 가이없는 격려와 사랑을 생각하면, 훗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주기철의 생애가 이제 제2기에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갖게 하였다. 오정모가
아니었던들 주기철이 그렇게 시련과 고통을 받으며 인내와 다짐을 둔화시켜 가는
상황 아래에서 순교의 길까지 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주기철과 오정모의 속현은
주기철의 순교 노정의 출발, 그것을 의미하였다. 그 순교는 오정모 옆에서만이
가능한 어떤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기철의 한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이 재혼이기도 하였다.
목사로서의 제2기 생애의 길이 가혹하였던 만큼, 그만한 일에 기초를 마련할 수
있는 보상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의 속현이 그에게 기쁨과 행복을 준 것이다.
"연애는 인생의 재미있는 사실"이라 스스로 말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연애'란 말이 그가 스스로 쓴 것이다. 파격적이다. 스스로도 그러고 나서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가 '사랑'을 부부지간에 연애의 차원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때 교인들까지도 목사의 연애를 말할 정도로 그가 고된 목회에서 되찾은 인생의
감미로움에 환희 웃었던 것이다. 그것을 부끄러워한 흔적이 없다.
 여기 주기철을 인간사회 안의 한 소박한 모습으로 대하는 길이 열린다. 그는 이
환희를 행복으로 누리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는 평범하고 겸손하고 소박하였다.
일상에서 느끼는 친근감으로는 거리에서 스치는 어느 누구와도 다른 데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순교의 특별한 점, 그 위대성을 설명한다.
 "여러 자식을 가진 홀애비가 처녀에게 후취하면 처녀의 교만을 참아야 한다"고
주기철이 술회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 오정모의 깔끔하고 결백한 성품과 행동
유형이 피력되어 있다. 그와의 동반관계는 운명적이었다
 그의 생애 제2시가 시작했을 때는 그의 신앙의 스승이던 부친 주현성장로가
1934년 여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1933년 아내를 여의고 1934년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 한국교회는 50년 역사의
희년을 맞았다. 한 시대가 가고 있었다. 세 시대가 열리고 그리고 주기철은 새
집안의 동반자 오정모와 함께 그 앞길이 불분명하지만 사명감에 찬 새 생애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가장 명확한 죽음이란 사실을 위하여 어떻게(할 것인가를)준비하는 인생이 적은
것은 마귀의 속임을 받아 안심한 것인가 한다. 신자여! 죽음을 준비하라.

 1934년 이미 주기철은 그가 갈 길이 뚜렷한 시점을 찍지는 못하였지만, 순교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사참배가 그 계기라는 것도 짚어 알고 있었다.

   순교의 길목에 선 주기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역사는 한일합방과 함께 시작한다. '105인사건' 때 실형이
선고된 정주 신안학교의 한 교사는 일본 천황의 사진에다가 예배하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거절한 것이 그 죄목이었다.

   합방과 더불어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사

 그런데 1920년 9월25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동아일보"에 소위 3종의 신기
모독사건이란 것이 터졌다. 문제가 된 사설의 일부는 대략 이러한 내용이다.

 우상숭배의 제일 현저한 자는 나무나 진흙으로 우상을 새겨 얼굴과 전신에 분을
바르고 신이 여기에 있으며 혹 영이 여기에 있다. 하여 이를 숭배할 뿐만 아닐, 때로
이에 대하여 강신강복을 기도함이니 이는 확실히 우상숭배라 할 것이오... 혹은
거울로 혹은 구슬로 혹은 칼로... 모양을 만들어 모셔두고 신이 여기에 있다 하여
이에 대하여 숭배하며 또는 기도함은 모두 우상숭배라 할 것이니 대개 이러한
이치는... 현우를 물론하고 사람의 지각을 갖춘 자는 반드시 확연할지니...

 여기 언급된 거울과 구슬과 칼은 소위 일본의 황실의 상징인 신기였는데, 이를
우상이라 단언하고, 바보일지라도 이 이치를 모를 사람이 없다고 한 데 대하여
일제도 이것이 국제모독이라 하여 처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속간하자 다시 신사참배 문제의 소위 경조 관념을
질타하였다. 1925년 3월18일자 사설예서이다.

 당국자들의 말에 의하면 다소 불명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 여하간 신사라는 것은
일본인 선조를 존경하는 기관이라 볼 수 있으나... 일본족 이외의 선조를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니, 신사에 대하여 일본인이 그러한 숭고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일본민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인만 위하는 신사에 대하여 일본인 이외의 민족이 일본인과 같은
감정으로 신사 존중하기를 바라지 못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만일 조선인이
일본인 아동으로 하여금 조선인의 선조의 분묘에 가서 신사에 대하는 감정으로
참배를 하라고 하면, 아마 상식 있는 사람은 조선인이 소위 동화정책을 비소하는
이상의 비소로 반박하리라 믿는다.

 신사참배의 허를 민족의 양심으로 통쾌하게 꼬집은 글로 이 이상의 선언이
당시로선 다시 없었다. 상식 차원의 문제성을 거론하는 것 역시 한국 지성의
예리함을 드높였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총독부의 자세에서도 우왕좌왕하며 주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소위 조선신궁의 궁사 다카하시 총독부 내무국장의 조선신궁에 대해서
약간 비관적인 말을 한 것을 문제삼아 총독과 총감 연석회의 제창하고, 또 신사에
대한 참배도 총독, 총감의 참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칙임관들의 참배도 손가락으로
헤일 정도라 하여, 이를 동경정부에 문제삼겠노라 협박한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
궁사는 총독부의 행사에 자신이 초청받은 일이 없음도 총독부의 신사정책에 큰
하자가 있음 때문이라 고발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31년 6월의 만주사변은 한국 안에서의 신사참배 강요가 정치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확립되던 날이다. 1930년대 초기의 심각한 경제위기, 농촌의 황폐화,
공산주의 반제운동의 만연, 이런 혼란 속에서 군부가 급속히 대세를 잡으면서 정당
내각을 제거하고 천황제 관료 및 거대 재벌과 연결되면서 위로부터의 파쇼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때 일제는 한국에서의 사상 계도나 병참기지로서의 충실한
사역을 위해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통제수단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문제는 심사참배가 이 민족 굴종과 압박, 그리고 착취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등장하였는데, 그것을 민족사적 차원에서 대결할 힘과 조직이 한국을 통틀어서
교회밖에 따로 없었다는 데에 있다. 민족언론의 힘은 막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검열과 간행의 취제 주체인 일제의 계속적인 통제 아래 있다가 아무 때나 폐간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신사참배 반대문제

 마산은 한국 남단에 있었다. 하지만 주기철은 서북지역에서 진행중에 있는 일제의
강력한 신사참배 강요에 예민한 감지력을 가지고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 소식들은
주기철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게 하는 경종과도 같은 것이었다. 1932년 9월17일, 평양
서기산에서 거행된 '만주 출정 전물용사 위령제'에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의 참배를
지시한 사건이 그 하나다. 이것은 시험 케이스였다. 기독교의 태도는 처음부터
무조건 반대였다. 그것은 대담한 정면도전의 처사였다. 더구나 그때가 평양에서 마침
장로회 총회의 회집기간(1932. 9. 9__16)이었는데, 그 총회가 앞장서서 '기독교
학교와 학교의 행동통일 곧 시위된 것이었다. 일제 평양 당국은 그것이 국민적 의례
이외에 아무 종교적 의미가 없다고 재삼 확인하였지만 교회는 그 말의 진실성을
믿지 않았다.
 이 첫 시험 케이스에는 몇 가지 중용한 의미가 있었다. 일제 가 이 철저한
강요에서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의 범주에 그친다는 교육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 그 하나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한국교회 주도세력인 장로교의
전국적인 모임인 총회 기간을 택하여 반응 정도를 계측하려 하였다는 것이 그
둘째이다. 다음으로는 그 위령제의 제식이 불교식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자 평양시
당국이 그렇다면 신도식으로 한다는 다짐을 듣고 교회가 안도한 듯한 태도를 보인
점이다. 이것은 교회가 일제만큼이나 신사의 성격 이해에서 혼선과 착오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총회가 1935년에 가서 신사문제 연구를 위해 연구위원(정인과, 염봉남, 이인식,
장규명, 곽신근, 이학봉, 오천영)을 임명한 것이 시기적으로는 늦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총독부와의 교섭을 위해 총회가 1932년 임명한 유억겸이나 마포삼열(S. A.
moffett) 등의 교섭위원은 1935년에 이르러 '총독부 사회과장 말씀이 이 문제는
종교에 대한 이해문제가 지금 많이 진행되고 있어서 정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기로
정치'하였다는 보고를 총회에 제출하고는 안도하였던 것이다. 총독부의 일개 과장급
인물과 만나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선교사들은 사태의 심각성과 위기감을 투시하고 있었다. 1934년 보고서에서
그들은 이 '신사문제의 10분지 1에라도 해당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없다'고
경고하였으며, 총독부 시책에 반대할 마지막 사람들이 선교사일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들의 우려는 신사참배가 분명히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여기 동서양의 종교에 대한 개념의 혼선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종교행사나 국민의례, 어느 하나로 국책적 결정이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입장은 종교행사와 국민의례가 혼연일체로 된 근대 일본 국가정신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결속 불가능의 비틀거리는 한국교단

 한국교회도 일부 그런 문화적 여유에 동의한 그룹이 있었다. 조상숭배와 효의
관념이 종교 신앙에 배치되지 아니한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신도가
기독교, 불교, 종파신도까지 망라한 단위를 신교로 규정하여 그 종속 수준에서 본
이상, 신사문제는 기독교의 사활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이기를
마다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엄연한 종교행사였고, 그 명분이 국민의례든
국민운동이든 그것은 결국 중요한 쟁점이 아니었다.
 한국교회 안에 이 위기의 핵심을 판독할 수 있는 예언자적 투시력의 동원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민족교회의 사활을 건 대운동으로 개진해 나갈 집단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직면한 미증유의 위기였다.
 그러나 1935년대의 한국교회는 스스로 여러 수치스러운 난제들에 끌려 자체
정돈이나 비전의 제시, 그리고 전력 동원이 힘들었다. 총회의 분열 조짐 때문에
전주에서 대회를 열어 몰역사적 수치만은 극복하자고 안간힘을 쓰느라 기진해
있었고, 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는 대세 주도의 장로교가 탈퇴하여 해체 일보 전에
있었다. 또한 장로교 감리교 일부 반교권 반선교사 지사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한국교회의 분산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더구나 창세기의
모세 저작 불신설, 여권 해석의 비정통성이 정죄가 불가피하였지만, 밖에서 노도처럼
밀어닥치고 있는 격류를 한 몸 한 마음으로 헤쳐나가는 결속은 급속히 약화되고
있었다. 더구나 교권을 쥐고 있는 인사들이 교회의 원로목사들의 발언을 무지로
매도하고 봉쇄하거나 제거하는 일련의 교권 경직화가 엇섞여, 적전 자해하는 구슬픈
집단으로 조락하고 있었다.
 모든 조직은 단위가 클수록 위기에 대결하기 힘들다. 충성과 희생의 기맥을
순식간에 통하기가 힘들고, 저항의지의 동질성도 제때 확보하기가 힘들다. 집단의
단위가 적을수록 저항력은 동질성도 제때 확보하기가 힘들다. 집단의 단위가
적을수록 저항력은 집중적으로 표출되고, 그리고 한 개인의 경우는 그 힘이 무한정
동원되다. 순교까지 갈 수 있다. 주기철의 출현을 기다리는 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죽음을 준비'한 그의 역사감각

 서북에서의 신사참배무제가 긴장과 위협으로 교회의 평정을 시험할 때 마산에서
주기철은 그 격류의 언저리가 예리하게 그의 신변을 스쳐가는 것을 감지하였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엄청난 대세가 태산처럼 밀려오는 것을 분 것이다.
 1934년 8월, 그는 "죽음의 준비"라는 설교를 하였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인생아, 아는가 모르는가.
너의 사망할 일자를. ...사망이란 급박하고도 용서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망할 때에는 있던 믿음도 도리어 잃기가 쉬울지언정, 없던 믿음을 그때에
찾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의 예민한 역사감각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관조하게 한 것이다. 가다가 어차피
겪는 죽음이 아닌, 준비하고 다져간 죽음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 죽음이 준비로 그는 세 가지를 가르쳤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죽음의 두려움이 죄책 때문이면, 그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비애의 죽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애는 소망이 없을 때 격해지고
깊어진다. 그렇다면 생존에 죄를 통회하고 죽을 때 찬미하며 가자는 것이다.
셋째로는 재물은 하늘에 쌓아둠으로써 죽음을 당했을 때 슬퍼하지 말라 일렀다.
 그는 죽음의 준비에 대해 일관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설교에도 그 가락이
깊이 깔려 있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 진리에 대한 절대 충성과 사랑, 현실에서의
철저한 구현, 죽음은 하늘 나라에 이르는 건널목이란 것, 따라서 죽음에 훌륭히
임하는 것,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격랑의 1935년 9월, 총회가 신사참배 문제의 성격 규명에 어수선할 때
주기철이 평야의 현장에 가있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사경회에 강사로 초빙되어
간 것이다. 그때의 설교가 그의 전기의 제목이 될 만큼의 중요성이 있다고 본 것이
김인서였다. "일사각오", 그것이 그날의 설교 제목이다. 선교 50주년 희년을 기념하여
교회는 대대적인 전국적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평양신학교에는 주기철이 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의 설교가 "일사각오"였다.
 이 설교는 요한복음 11장 16절을 본문으로 삼았다. 겁이 많고 소신이 약하던
도마가 예루살렘 베다니를 향해서 걸어가시는 주님을 보고 "우리들도 같이 가서
죽자"라고 말하는 장면의 구절이다. 의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묘사되던 도마, 그를 그
중요한 시점에 설교의 주제로 삼았을 때 주기철의 감회는 만경창파였을 것이다.
도마마저도 죽음을 각오하고 일약 용맹으로 따라 나섰다면 인생이 어디에서나
죽음을 각오 못할 형편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요, 순교가 특수한 사람에게
아주 조건이 숭고한 데서나 가능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고,
그것을 선지학교의 강단에서 전해준 것이었다.

   산정현교회에서의 세 가지 "일사각오" 설교

 그 설교는 세 가지 "일사각오"를 말하였다.
 첫째는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 것은 정말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환영하던 때도 지금은 지나가고 수고의 때가 박두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십시오.

 그는 죽음을 통해서만이 성취될 수 있는 거대한 역사의 묵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을 통해서밖에는 갈 수 없는 주님과의 동행, 여기에 그의 사도 요한적
신비주의의 정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니 가지
못하는 길, 그것을 그는 비통함으로만 보지 않았다. 은사와 동행으로 보았다.

 이 천지간 머리 둘 곳이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싫어 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받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합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여기 십자가의 신비주의가 고난과 사랑의 주님과 동행하는 체험적 주제로
피력되고 있다. 주님 가신 가시밭길, 수모와 고난과 고독의 길을 함께 가야 하는
애절한 갈망의 기도가 있다.
 둘째로 타인을 위한 일사각오이다. 기독교는 '내'가 아닌 '우리'곧 교회로서 인간을
집단화시켜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일사각오에서
사람은 비로소 역사 안의 현존자인 '남'에 대한 헌신적 자세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강림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요,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입니다.

 여기 다시 한번 요한복음적인 성례의 뿌리 깊은 의식과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남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결코 직접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가
매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끝없는 사랑의 대상인
까닭으로해서만이 우리의 헌신과 사랑, 그래서 일사각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 본체의 고귀함
때문이었다.
 셋째로는 부활 진리를 위한 일사각오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반드시 부활에
이른다. 도마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은 일사각오의 행렬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부활의 실재, 그 진리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감사하게 느끼는 사람과 두렵게 느끼는 사람과의 경계선을 그어놓는다. 죽음을
쓰라림이지만, 반드시 부활의 다음 단계가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죽음 다음의 세계에 이르는 부활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해, 희생적인 봉사로 일생을 마친 이들의 영생의 축복으로
확증된 은총의 길인 것이다.

 여러분 제군이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입니다. 신학을 말함으로 제군의
사명이 다 되는 것입니까.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사이다.

 희생과 유혈 없이 진리는 지켜지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약속하는 부활의 진리 역시 피로써밖에는 보존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시대의 어려움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통해 진리를 수호하고 새 세계의
도래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한 것이다.

   시대의 예언자적 설교로 일제에 도전

 지금 남아 있는 주기철의 설교는 대개 김인서(1894__1964)가 따라 다니며
필기하여 두었다가 정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가 스케치 형식의 주기철
전기 "일사각오"를 우선 간행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이 "한국일보"의 논설고문인
김창열이 지만, 김인서의 문필력에 풍기는 그 정신적 박력감은 대단하였다. 주기철의
숨결을 그대로 폐부에 새겨 간직했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김인서가 이 일사각오의 설교에서 주기철의 역사적 위치를 포착한 것이었다.
그의 말에 눈물이 있었다.

 대한 나라 주기철목사는 20세기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존재입니다. 주목사는 잘
살았고, 또한 잘 싸웠고 참 잘 죽었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였고, 그
생활은 억만 사람 앞에 청청백백하였고 그 죽음은 허다한 고성선열 간증자들이
보증하는 바입니다.
 이 어른의 설교는 당신의 신앙고백이오, 당신의 목숨으로 실증한 말씀입니다. 편편
복음의 진리요 순교의 정신이니, 그 고귀함은 읽어 보고서야 알리이다.

 현장에서 설교를 들을 때의 반진감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는지 김인서가
기록했다가 옮겨놓은 글에서도 역력히 나타난다.
 주기철이 시대의 예언자로 외친 설교는 나라 안팎으로 혼란과 격돌, 그리고 내적
약세가 교회 생존에 커다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던 1935년에 몇 가지 있었다.
평양에 가기 넉달 전에 한국교회는 총력을 기울여 분산될 위기의 교회세력들을
규합하고 총독정치의 가혹한 신민화 시책에 적절히 대응하는 현실적 문제를
숙의하기 위하여 금강산에서 수양회 명목으로 대대적인 집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그때 주기철이 시대의 비전을 피력하도록 부탁을 받은 것이다. 그때 설교는
"예언자의 권위"였다.
 본문이 마태복음 3장 1절에서 13절까지인 이 설교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내용의 것이었는데, 설교 도중 임검한 일제 경찰관에
의해 중지되고, 모임이 해산될 만큼 과격하고 도전적인 고발성 설교였다. 당시
금강산 목사 수양회에는 목사, 선교사들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주기철은, 목사는 그 시대의 선지자요, 시대 고발의 예언자적 직분이 있는
성직이라 그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엘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신약의
세례요한, 이 세 사람에게서 상징적인 현대 예언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던 것이다.
예언자가 필요하였던 시대에 주기철의 '소리'는 그 시대가 기록한 가장 투철한 고발
설교로 남아 있다.
 첫째 그는 엘리야의 예언자적 권위를 설파하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황폐와
퇴폐를 고발한 그의 벅찬 예언을 말하고 나서 주기철은 이렇게 외쳤다.

 엘리야의 권능, 선지자의 권위는 이러하였다. 그의 눈에는 바알도 없고 만승의
대왕 아합도 없고, 하나님이 계시일 뿐이었다.
 여러분도 엘리야의 신앙 엘리야의 기도가 있으면, 엘리야의 권능,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이다. 오늘 목사의 권위는 서는가, 못 서는가.

 이것은 1935년의 시대 공기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가슴이 섬뜩하는 발언이었음을
안다. 그는 신사가 바알이고, 아합이 일본천황임을 대담하게 은유하였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눈앞에 없다는 대담한 공중집회에서의 발언에서 그 스스로도 엘리야의
처참한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둘째는 예레미야의 권위였다. 주기철이 여기서 강조한 문맥상의 주제는
예레미야가 '나라가 망한다'고 예언한 골자의 재현이다.

 평안하다, 나라가 잘 되어간다고 집권당국과 시대에 아부하는 자는 많지만, 바른말
하는 자는 많지 못하였느니, 예레미야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발 경계하였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레미야의 입장에 서 있지 아니한가.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외치는가.

 무헌법의 군부 파쇼체제로 굳혀가던 살벌한 시대에 그는 이런 말을 대놓고 한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일제의 통치 강압은 실질적인 한국적 역사와 정신의 근원을
삼제하는 악랄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떤 형태의
도전이나 언급마저도 가차없이 척결 제거되던 공포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의 망국을 거론하는 형태의 발언이 감행된 용기는 기독교가 예언자적 종교로
정의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셋째는 세례 요한의 권위였다. 여기서 주기철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천황제를
직접 상대로 예언의 폭풍을 풀어놓았다. 그때 천황은 현인신이요, 만세일계의
통치자요, 신성불가침이었으며, 국민의 주권은 다만 그가 은사로 베풀어준 바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위 일본 제국 헌법의 중추였다. '천황'이란 말은 입밖에 쉽게
내지도 못했고 어쩌다 공식적으로 말할 때에는 반드시 그 천치구로 '외경스럽게도'
'두렵건대'란 공손을 외치고야 가능했고,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인간과
사회의 모든 움직임은 정지하여야 했다. 그리고 만사 부동이어야 했다. 그나 내린
칙어는 성물 성언이어서 범인이 그 복사문에 손댈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그 복사본이
옮겨질 때 머리숙여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였다.
 한데 이 천황을 향해 주기철이 소리친 것이다.

 요한은 임금이라도 할 말을 못하지는 아니하였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불의의
혼인을 한 헤롯왕에 대하여... 모세 율법의 죄인이다, 못한다, 회개하라고 책망하였다.
 생살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존 녹스도 일사가오했던 것이요, 루터도 일사각오였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여러분, 몰라서 말 못하는가.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천황에 도전하는 설교로 형극의 길 자초

 그는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하늘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럿의 양심, 그
골수에 찍혔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이들에게도 그의 음성은 폐부에 박혀 자책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다. 임검 경찰관이 "중지!" 하고 소리쳤다. 다들 술렁거려
혼잡해졌고, 그의 설교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그는 천황에 대한 도전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언은
주님의 말씀의 대언이다. 거기 예언자의 권위의 근거가 있다고 믿었다. 그 시대는
천황제의 사신우상성, 그리고 그 국체의 독신성을 고발하는 하나님의 종의 자세,
거기에 비로소 진실한 목사, 충실한 예언자의 모습이 있다고 보았다.
 주기철의 삶의 길은 이제 판가름난 셈이었다. 19367년부터 발효하게 되었던
'조선사상보호관찰령'과 같은 사상통제의 형극 속에서 이미 천황제에 도전한
'반역'으로 시찰 대상이 된 주기철의 길은 그 시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근원적인 신앙으로 해서 이제 순교의 길에 인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산 문창교회 목회는 끝날 날이 온 것이다. 그 교회의 당회록은 그의
이거에 한 말이 따로 없다. 다만 1936년 7월19일의 당회록 말미에 당회장으로
서명된 것으로 끝나, 그것으로 마산 문창교회 시무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제직회의
회록은 1936년 7월12일가지가 주기철의 의장 서명으로 되어 있고,8월2일 회록에는
장로 이순필이 '의장 임시대리'로 서명하고 있다. 따라서 주기철의 문창 목회는
1936년 7월 말로 끝났다. 그때 마산을 떠난 것이다. 떠난 흔적에 대하여 교회나
인사의 기록 어디에도 인정과 석별의 고사가 없다. 그는 떠났다. 그리고 가면서 남긴
말이 없다. 그리고 그 길이 그가 간 마지막 길이었다.

   제4장 목회의 정점 산정현교회 시절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이 있는지라 죽음이 그 무엇이며, 천당의 즐거움이 있는지라
세상 환난이 그 무엇이리오. 구원의 즐거움, 믿음의 대법열이 있어 세상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주기철, 1937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세계가 칭송하던 한국기독교의 거대한 중심지였다.
여기 기독교가 처음 들어간 것은 1893년 2월 모페트(S. A. moffett)가 동대문 안
판교동에 거처하며 거기서 예배를 볼 때부터의 일이다. 그것이 발전하여서 1899년에
장대현교회가 된다. 1866년 대동강에서 영국 웨일스의 선교사 토마스(R. J.
Thomas)를 순교하게 하는 데 가담하였던 박춘곤이 주요 창설자 중의 하나였다.
 이 교회가 점차 커져서 1903년 남문외교회가 나누어져 나갔고, 1905년에는 다시
창동교회가 분립해 나갔고, 같은 해에 교회가 하나 더 분설되어 나갔다. 그것이
산정현(산정재)교회인 것이다. 우선 이 교회는 마포삼열의 옛 예배당, 곧
장대현교회가 큰 예배당을 짓고 나가기 이전까지 쓰던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선교사 편하설과 영수 계택선, 이덕환 집사, 최정서, 김용홍, 정이도, 조사 한승곤
등이 새 교인 300여명과 함께 힘써 헌금하여 계동 산정재 위에 교회당을 짓고
옮겨갔던 것이다. 실제로 산정현교회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07년부터의 일이다.

   한국교회사의 산정현교회와 주기철

 이 교회에 지명 인사들이 대거 몰려든 것이 이때부터의 일이다. 그때
김동원(1884__1905)과 박정익이 집사로 일하였고 1910년 김동원이, 1913년에는
박정익이, 각각 장로에 장립되었다. 그리고 1917년에는 선천 신성학교 교사를 지낸
강규찬 목사가 안수받으면서 이 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신성학교에서 백승준,
박형룡, 정석해 등을 직접 가르치고 커다란 감화를 남겼던 인물이다. 강규찬은
1919년 3.1운동 당시 평양 만세시위의 거점이 된 숭덕학교의 대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하여 수감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1933년까지 다시 산정현에서
시무하였다.
 이 교회에 김예진(1898__1950)과 오윤선(1878__1905)이 집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부터의 일이다. 김예진은 3.1운동 이후 상해로 피신하였다가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입국하여 평안남도 폭탄 투입사건을 지휘하였던 인물인데 1943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오윤선은 평양의 7대 교회가 합동하여 설립 운영한 삼숭, 곧 숭인,
숭덕, 숭현의 실무를 담당하였고, 1923년에는 숭덕에서 분립한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자로 공을 크게 세웠다. 그 학교에서 김재준이 한때 교사로 봉직하고 했다.
요윤선의 아들이 극작가인 오영진이다.
 1921년에 가서는 고장 조만식과 유계진이 집사로 교회를 섬기기 시작하였고,
1922년에는 조만식과 오윤선이 장로 장립을 하였다.
 유계준은 주기철의 순교를 얘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호상이었고 숭덕의 재단이사장직을 오래 맡아 왔으나 주기철과의 친분, 그리고
주기철 순교 전후 그 가족들에 대한 보살핌으로 하나님의 종과 그 가족들을 지켜준
겸손하고도 용기있는 기독자였다. 그는 김예진의 폭탄 투입사건이 있은 다음 그를
피신시켜준 일이 있는 독립운동의 열정적인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4남
유기천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사람이고, 장남 유기문은 국립의료원장직에서
크게 봉사한 인물이다. 유계준은 해방 후 이북에 남아 있다가 1905년
6^3456,12,15^사변 전날 정치보위부에 구속되었다가 9^3456,12,14^ 수복 때 패주하는
공산군에게 참살, 순교하였다. 산정현교회 지도급 교인들의 모습은 이토록 고결하고
신실하였다.

   인걸이 넘치던 꿈같은 황금시대

 미국 덴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송창근(1898__1905)이 귀국하여 1931년부터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 형식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박형룡(1897__1978) 역시 192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부목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강규찬목사가 이 30대 초반의 두
청년목사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었다. 묘하게도 한국장로교회의 양대 산맥을
상징하는 보수주의와 근대주의의 두 기라성 같은 거물들이 함께 산정현에서 같은 때
봉직한 것이다.
 하지만 박형룡이 1931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전임교수로 임명됨에 따라
송창근이 강규찬을 도와 목회하게 되어 산정현목회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송찬근은 1932년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강규찬이 떠나게 되자 박형룡이 다시 임시 당회장으로 되돌아왔고
송창근은 전임으로 이 교회를 시무하게 되었다. 보수진보의 균형을 보존하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찬근은 신학교에 출강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남궁혁이 주간으로 있는 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에 비교적 자유롭게 기고 할 수
있었다. 그때 편집책임은 김인서가 맡고 있었다. 김인서는 이때를 회고하며,
한국교회의 꿈같은 황금시대라 감상마저 느끼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박형룡,
송찬근, 남궁혁, 김재준, 이 거물들이 그때 평야에 모여 있으면서, 한 맘으로 굳게
뭉쳤던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분열의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송찬근도 훌륭히 살아가고 목회도 정성으로 마무려 나갔다. 그리고 조심하고
있었다. 송창근의 글을 편집도 하고 교정을 보았던 김인서의 총명한 눈길이 거기서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씨는 총명한 위에 다독하고, 다정한 위에 결백의 사람이다. 경건문학을 애호하여
프랜시스 연구로 조선에서 제일인일 것이다. 글로써 혹은 논변을 펴 이름을 날린
것은 동경에서 돌아온 후 "신생명"지 집필시대였고, 평야에 와서는 한 좋은 목사로서
각처에서 환영받는 부흥사였다.
 그 다애한 일면은 목회자 되기에 좋으나, 그 강직한 일면은 처세도에 불리해
보인다. 청년박사 씨의 신앙 열도는 날로 더하고, 교회 봉사의 정성이 일관하니 씨에
대한 기대는 아직 장래에 더 많다. 서도 사람이라 할만치 서도 지우가 많고, 남도
사람이라 할만치 남도 지우를 많이 가진 평양 송목사는 남북 절충의 안전판이
되었거니와...

 그때 보수는 서북을 대표하였고, 진보는 비서북, 곧 경기. 충청을 대표하였기
때문에 때로 그 대립을 남북을 표현하였다. 그 절충의 안전판이 송창근이 할 역사적
책무라는 기대가 여기 있다. 이 글은 송찬근이 산정현을 떠나게 된 사실을 알고
썼는데도 이만한 평을 하였고, 따라서 장차 남북 절충에 공을 세워달라는 간청의
고언이었다.
 그럴 만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이 때로 강한 복음주의 색채로
"신학지남"에 실렸고, 또 거리에서 "예수, 천당"만 외치던 희대의 전도자로 보수
정통 신앙의 화신이던 최권능 목사를 청하여 평양에서 전도하게 한 것은 한국교회
신앙의 모델이 거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산정현 목회에서도 송창근은
계속 박형룡과 함께 평양신학교 교수 구약학의 김인준 목사를 산정현교회에서
강좌와 설교로 봉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김인서가 이를 가리켜 '산정현 강단은
조선 고급의 강단'이라 칭송하며 부러워한 일이 있다. 한국교회 중앙강단으로서의
명예에 손상이 없었다. 송창근의 넓은 도량과 그 폭 때문이었다. 다만 "이 위에
성령의 불만 쏟아져 내리면 가히 천하를 불 붙일 것"인데, 그것이 아쉽다는 시론이
있었다.
 이런 형편이었다. 송찬근에 대한 기대가 "아직 장래에 더 많다"고 한 말에
송창근의 산정현 이임이 지니는 비극성이 있다. 송창근이 결국 떠나게 된 것이다.

   희생당한 송창근목사의 이임

 송창근 이임에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신신학이다. 한동안 그가
산정현에서 잘 견딘 것이다. 그의 호흡이 통할 공간이 여럿의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자신은 교회의 사회화나 문화운동을 질책하고 있었지만, 감리교의
유형기목사 주도의 "아빙돈 단권 주석"에 한경직, 채필근 등과 함께 번역자로 가담한
것이 그 주석의 장로교총회에서의 정죄로 불근신이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슴 아픈 지방색의 문제이다. 그는 함경북도 경홍인이다.
웅기출신이다. 그가 이임하기 1년 전 쓴 글이 그 지방색타파의 의도로 쓴 것이지만
서북 대세의 교세를 건드린 것이다.

 요즘 천하가 다 아는 것처럼 조선교계에는 무슨 당이 있다. 누구의 파가 있다고
하야 서로 노려보고 못미더워하는 터이요, 게다가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남놈 북놈
하야 스스로 갈등을 일삼으니 이 어찌함인가... 50년 희년인가 50년 희년인가.

 셋째로는 산정현교회의 새 교회당 건축기금을 둘러싼 교회와의 의견 상치이다.
당회원들은 그 교인들 중에서 여럿이 죽을 때나 은퇴 때 바친 헌금이나 재산으로
건축기금을 삼아 신축하자고 하였으나, 송창근은 그런 헌금들은 보다 뜻있는 곳에
유지를 받들어 쓰고, 건축기금은 따로이 헌금해서 쓰자고 해서, 결국 의견이
양립되었던 것이다. 당회는 추호의 틈을 보이지 않았다. 송창근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당회원들은 교회당 신성론자들이었다. 교회당 건축 이외 '보다 뜻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이런 문제는 그때만의 문제도 아니고, 또 지금도 그리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산정현교회 당회는 교회당의 장엄함, 신성성, 그리고
예배행위 장소로서의 외경심, 그런 것으론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을 확인한 경우가
되었다.
 이밖에 김재준은 송창근이 평양 일각에서 일고 있는 신사참배동조 분위기에
격분하여, 삼숭을 존속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당시 총회
종교교 육부 총무 정인과 목사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회장 밖으로 밀어내친'일이
그의 서북인으로부터의 배격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인과는 한국교회
남북대결에서 서북인맥을 지도하고 흥사단 출신 교권의 총사였다. 서북계의
보수주의도 일제 말에는 교권장악군들에 의해서 현실 타협적 생존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인과에게 가한 인신 타격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과오로
문책되었던 것이다. 김인서는 이 이임을 남천이라 불렀다.
 송찬근은 서러운 마음으로 평양을 떠났다. 떠날 때 서장대 교인들의 무덤을 하나
하나 심방하고야 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우는 교인들을 뒤에 두고 가는 북방박사의
눈물이 대동강에 떨어졌다. "처녀의 첫사랑 모양으로, 오래 포부를 안고 공부한 뒤에
처음 맡았던 교회에서 이렇듯이 떠나게 되니 가슴이 찢기는 듯하였다."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기록에 남겼다.
 부산에 간 송박사는 호주 선교부의 대리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에 우선 마음을 돌렸다. 성빈학사가 그것이다.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이 같은 시대에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한 일이
있다. 그때 그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 함께 손잡고 피와 땀으로 봉사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송창근이 이런 아픔을 겪고도 해방 이후 김재준의 이른바
기장계와 한경직의 예장계 절충 협의 일치에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6^3456,12,15^납치로 그 지도력 부재 틈에서 결국 예장과 기장의 분열이 진행되어
버렸다. "송창근이 있었더라면." 교회의 한 원로는 아쉬워하였다.

   용기와 순결의 신앙인 주기철 최후 목회 부임

 이런 상황에 놓인 산정현교회의 시무목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송창근목사가
떠나게 된 그 요인들을 다 체워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첫째 요건이었다. 그러나
차제에 고려해야 할 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한국교회의 커다란 시련 앞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려면 평양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긴박감이 있었다. 다들 평양 산정현
교회를 지키는 것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김인서의
서수론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조선교회의 반 이상이 황해도 이서에 있나니 서부교회를 잘 지켜야 조선교회는 탈
없이 발전할 것이다. 그런데 평양은 서북회의 중심인 동시에 조선교회의 중심지이다.
그런즉 조선교회를 지키려면 먼저 평양을 지켜야 한다.
 5, 6년 전 북방에는 사회주의가 창궐하고, 남방에는 무교회사상이 늘어감을 보고
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가 서점하기 전에 정복음주의와 교회 원리로써 서부교회를
지켜야 하겠다는 것이 서수론이다.
 그러나 서부교회를 살펴보건대 벌써 민족주의의 개조운동이 견고한 조직하에
세력을 잡고 있다. 중심지인 평양교회는 어떠한가...
 오호라 상호교류가 이뤄질 때에 임하여 중단되는 교회로구나.
 동서남북 교회를 살피건대 한 손으로 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를 막아내고, 또 한
손으로 민족운동자의 손에서 교회를 빼앗지 않으면 안된다.

 공산주의, 무교회주의, 민족주의, 이 세 가지를 함께 제지할 수 있는 교회만이
가혹한 일제의 교회박멸 흉계를 이겨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미 그런 자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용기와 순결과 경건의 신앙인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눈길이
마산까지 더듬어갔다. 주기철이 그때 역사의 대세 앞에서 하나님의 대명과
한국교회역사의 소명을 수행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목자로 잡힌 것이다. 박형룡은
한국교회 정통 파수의 검찰관과 같은 패기의 신학적 분석가였다. 그 역시
"길선주목사 가신 뒤, 그 유업을 이어 보수할 이는 주목사밖에 누가 있나" 해서
주기철 청빙을 강력히 후원하였다. 주기철은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를 지켜나갈
전사로 징집된 것이다. 그가 당시 한국교회의 희망이요 방파제였다.
 산정현의 장로요 옛날 오산학교에서 주기철에게 심원한 정신적 영향을 미쳤던
스승 조만식이 마산 문창에 찾아갔다. 교섭은 긴 시간을 끌지 않았다. 조만식이 이제
옛 제자를 한국교회의 대제사장으로 모시고 가려 찾아간 길에 주기철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이라 믿으며, 성큼,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 길이 무슨 길인 다 알고서
말이다. 전사는 전장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전사는 지킬 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자이다.
 경남은 그가 태어난 곳이다. 거기 친척과 골육과 고토가 있는 곳이요, 그의
아버지, 아내가 묻혀 있는 고장이다. 싸울 때도 그런 사람들 곁에서, 그런 골육의
고토에서 싸우고 싶었다. 그들이 힘이 되어 줄 것이 아닌가.
 한데 그도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그 가는 길이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순교의 길이어서, 다시 찾지 못했던
길이 되고는 그 시신 마저 북녘 찬 땅에 묻힌, 그 길을 가는데, 왜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었으랴.
 그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실상을 모른다.
산정현교회의 당회록이나 기타 문서가 지금 현존할 리 없고, 당시의 신앙기록이나
일기, 편지나 육성, 육필이 남아 있지 않다. 언저리에 꿈이라든가 한 묶음의
증언류가 수집되어 있지만 시간의 전후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역사구성에 믿고
동원하기가 미심하다. 그렇다고 총회록에 빈번히 나올 수 있는 기록이 아니었음은
그때 공교회가 일제의 직접적인 행정과 사찰 감독하에 있었기 때문에 저항과 순교의
기록들은 실리 방법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일자 미상의 설교 몇 편과 김인서가 기억을 더듬어 쓴 전기 소책자
하나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며, 그가 거쳐간 곳과 교회에 산재한 몇 문서의 몇 행
글들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순교자의 생애에 변두리 증언이 무슨 송용이
있을까마는 역사는 갈수록 현실성이 무디어 가다가 반드시 그 골자마저 흔미해지고,
다만 이름만이 가느다랗게 저 역사의 지평선에 한전 구름처럼 남게 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철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애와 순교를 현재 수집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짜맞추어 훗날의 보충수정을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여기 내놓아야 한다.
 주기철이 평양에 간 것이 1936년 7월 말이었다. 산정현 부임 때 환영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성휘 박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산정현교회 주목사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교회의 주인목사를
환영하는 것이오, 조선의 주인목사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말이 그때는 조금도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명예와
양심과 순결이 주기철의 어깨에 지워진 것이다.

   새 성전 헌당하고 참교회상 설파

 주기철이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여 처음 한 일에 새 예배당의 건축이다. 당시 이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총본산지로 조만식, 김동원, 유계준, 오윤선 등의
민족지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자산도 넉넉한데다 생활수준도 중산층 이상인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런데도 정작 교회당은 한국교회의 '중앙교회'라는 유명도에 맞지 못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오윤선장로의 집이 교회당보다 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현실과의 유기적 기능을 행사할 만큼 시설과 구조가 신학적
해석의 투영으로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기철은 기왕에 들어와 있던 6000여원의 헌금 기금과 새로 5만원의
예산으로 새 예배당 건축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성전건축에 대한 의미 및 의도가
1937년 3월7일의 그의 설교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취한다"에 나타나있다.
 첫째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영적 방면과 지식 방면으로는 물론 물질 방면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또한 시행할 바 책임이 중대합니다... 선배 선교사들이 조선교회에 잘
가르친 것이 많으니... 십일조 연보도 실행케 하였더라면 조선은 큰 복을 받(았)을
것이외다.

 1937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한국교회 전통에 십일조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십일조 개념 속에 주기철은 책임, 특히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의 헌금의 책임을 주입시킨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당시 교회의
민족사적 사명을 강조하였다.

 우리 조선사람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경제 방면에 있는가, 아니다. 과학
방면에 있는가, 아직 보잘 것 없다. 그러면 우리의 천직은 어디에 있는가. 확실히
종교 방면에 있다. 사천년 이래 하나님을 부르는 민족은 서에 희브리인, 동에
조선사람인가 한다...
 기독교를 받은 오늘에는 기독교 역사상 동양에서는 가장 혁혁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조선기독교의 장래는 세계 사람이 주목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니 하나님께서
조선교회의 진행을 내려다 계신다.

 종교의 힘으로 민족역사의 특수성을 형성해 가자는 호소였다. 그런 공헌의 역사적
실증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명이 바로 산정현교회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외친 것이다. 산정현의 역사적 위상이 주기철의 역사의식과 접합된 것이다.

 우리 산정현교회는 어떠한가. 동양에 있어서는 조선교회가 선교역사상 새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조선의 예루살렘은 평양이요, 평양교회 중에도 산정현교회가 가장
많은 은혜를 받지 아니하였는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중에 드높은 산정현, 제일 강산에 제일 위치가 산정현
아닌가.

 이 밖에도 주기철 취임 이후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되어 새 신자가 매주일
증가하였고, 신학생의 참집도 증가했다. '교회가 더워지고 교인이 증가'하여 어차피
넓은 예배당 신축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주기철이 오기 전에 100명으로 줄었던
교회가 입당 때에는 600여명의 교회로 확장되고 있었다.
 1937년 9월5일에 입당예배가 드려졌다. 그날 "새 예배당 입당에 배의 기원"이란
설교에서 주기철은 감격하였다.

 우리 산정현교회를 세워주신 지도 반세기에 이르러 새 예배당을 짓고자 기도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7만원의 연보와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총 300평, 2층
벽돌집 예배당을 이룩하매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 설교는 기도로 차 있었다. 새 예배당에서는 '주님의 영광만을 찬송케 합소서'
'하나님의 복음만이 들리게 합소서' '이 교회에 금촛대로 주님의 빛이 발하여 온
조선 온 세계에 비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예배당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합소서.' 그의 간곡한 신앙 고백이었다.
 여기 그의 교회상 곧 교회의 마땅한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교회는 하나님만을
위한 곳이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럴 역사적 필요도 있었다.
하나님께만 향하여할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주여! 우리의 죄를 사유하시고 우리에게 재앙을 거두시옵소서... 환난 날에 우리를
떠나지 마옵시고, 주님의 날에 우리를 영접하여 주옵소서. 이 새 예배당에서 신천
신지 새 예루살렘에까지 영접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통회합니다... 우리 몸의 더러운 죄를 통회하며... 우리
마음의 은밀한 죄를 주께 고하나이다.

 하나님만을 찾아 그에게만 예배드려야 할 까닭이 여기 있었다. 마음의 죄, 몸의 죄
때문인 그 하나요, 환난이 다른 하나이다. 마음의 은밀한 죄란 그때 진행되고 있는
무서운 핍박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난세에 교회를 살린다고 일제에 협력하려 한
전향을 지탄한 것이었다. 그리고 환난이란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 교회박해 가혹성의
극렬화 조짐을 두고 한 말이었다. 하나님을 위하는 길밖에, 또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주기철은 그 예배당의 우뚝 솟은 모습이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곳이라 못을 박은 것이다. 교회당은 민족을 구원하고 진리가 어둠의 권세를
극복하는 원점으로 우리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에는 어떤 간판도 달지
못하게 하였고, 못 하나 꽂지 못하게 하였다. 강단은 설교만을 위한 곳으로 엄격히
지켰다. 거기에 신앙의 정조개념이 연결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지키는 신앙정조론 강조

 한국교회사에도 일제치하 어용사 같은 것이 있었다. 불가피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자진해서 결탁한 그룹들도 있었다. 주로 큰 조직과 기관에 관계된 사람들이 그런
처세 빠졌다. 조직의 공공성 때문에 국책에 끌려다녀야 할 약점이 있을 때는 먼
훗날에도 양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조직과 공공성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에 우선 끌려 더러는 앞다투어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열의로 달려든 일도 없지
않아 후대에 수치로 남았다.
 1937년 기독교계 정기간행물에 "황국신민의 선서"가 첫 페이지에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기독교보"에 교회변절의 한 보습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는데 사장 정인과의 글임이 확실하였다.

 기독교인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고 하신 말씀이 예수의 말씀이다. 그런즉
기독교인으로서의 국민의 의무를 추호라도 태만히 한다면 국가에 대한 불충죄를
지음은 물론이어니와 왕 앞에도 역시 범죄자 됨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시기는 도래하였다. 만전을 도모하여 황운을 복돋우자... 우리는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찬송가로... 성경의 설교로 국민의 의무를 충분히 인식시키며...

 교회가 일제와 그 황실을 반색하는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황실에의 항거가 하나님께 대한 죄로까지 왜곡 타락하던 교회의 모습이
주기철에게만 부정으로 보였을 리가 없다.

 가령 어떤 여자가 그 남편이 먼 곳에 가서 돈을 모으는 중, 딴 남자와 정을
통하여 불의한 관계를 맺고 있을 대 홀연 그 남편이 큰 영광 중에 집에 돌아오게
되면 그 부끄러움과 어색함은 어떠하리오.
 그같이 주님의 신부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이 있다 해도 주님에게 향한
일편단심을 잃지 말고 우리의 정절을 고이 지켜, 주님을 부끄럼 없이 맞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한 몸된 우리는 특별히 이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만난에도 불굴하고 백번 죽어도 그 지조를
변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제단에 몸을 바친 우리들은 칼날 아래 목이
끊어지기까지 태연자약 장렬한 최후를 마친 바울처럼 최후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1937년 여름 산정현교회에서 외친 설교의 한 구절이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수난과,
그 수난 앞에서 교회가 서야 할 모습을 다함께 갖추자는 호소였다. 신앙이 축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무의 수행이란 확신으로 그의 신앙이
굳어간 것이다. 종교는 복을 비는 것이 아니고 잘 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사명이며 의무란 것을 그는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도 언젠가는 시들고
뜨음해진다. 따라서 사랑에도 어떤 의무감이 압도해야 한다.

 육체의 재앙을 피하려고, 복을 받으려고 무당을 먹이고 우상 앞에 엎디나
이야말로 재앙을 시작입니다.

 의무를 저버리면 반드시 저주가 임한다는 생각은 사람이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순결로 서' 있어야 한다는 정절관념에 강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상,
곧 신사참배나 궁성요배 의식을 우상으로 단죄하고 거기 저항하는 양심의 절규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주기철은 엄위로우신 심판의 하나님, 죄를 견책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현대식 목사가 하나님의 사랑만 말하고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말하지 않음은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순응 쪽으로 기울던 한국교회가 기만당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유약한
몰윤리적 존재로 나와 무관한 자리에 옮겨놓고 있다고 힐책한 것이다. 실정을
문제삼지 않고 그 반복을 보고도 빙긋이 웃는 목석으로 비기는 데 분노한 것이다.
사랑이 오히려 포기가 아니라면 악과 부정을 질책하여 돌아오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실로 엘리야와 같은 시대의 예언자였다. 그 시대는 의와 거룩의 하나님,
분노와 공의의 하나님이 선포되어야 했던 긴장과 결단의 시대였다. 죄 짓고 또 용서
받으리라 하여 정절의 신앙을 버리고, 뒷날의 포용을 바라는 안일한 자세가
질타되어 마땅한 때였다. 기독교의 거점인 핵심 진리가 위협 왜곡되고 변질되되,
명분은 동양화요 구실은 애국의식이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전향지향군들의 정당행위 자처요, 기독교적 교리의
실천 과업수행 의식이었다. 꺼리는 데가 없었다. 잘못된 일인데 불가피한 시대적
대세 때문이라 곧 되돌아온다는, 그나마 희기를 전제한 주저의 구석이 없었다.
여기서 주기철은 그 시대의 하나님상은 공의 임을 강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체험에서 중생한 사람이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임을 알았다고
증언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의의 하나님을 알라. 구약의 신앙이 있은 연후에
신약의 신앙이 있고,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연후에 복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역사적이다. 시대에 따라 교리해석의 행동양식이 각각 다른 차원의 책무로
전개된다. 주기철에게도 이 이전과 이후의 시대를 구별하는 간격이 뚜렷이 보인다.
한국교회 신앙의 변증법적 차원을 평면적이고 일률 보편적인 관념으로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신앙이 거쳐가는 시대나 장소의 문맥에서 구형된 다이내믹한
신앙고백과 그 표현과정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율동적 예언이 없었더라면 그 시대를
관통하여 흐르는 한국기도교회사의 맥락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신앙정조론이 체계성을 가진다. 정조는 신뢰와 함께 두려움의 동기가
있다. 순결과 사랑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할세라 초조해 하는 긴장과 위구가 있다. 그
두려움은 한계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간격의
체험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선행한다고 하지만 주기철은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길이 하나 꼭 있다고 믿었다. '성신'의 도우심이 그것이다.

   '성신'의 도움으로 '기쁘게' 순교 준비

 1937년 12월19일, 그는 평양 신현교회에서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를 하였다.
성신을 통해서만이 예수의 교훈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년 이십년 예수를 믿노라 하여도 성신을 받지 못하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지옥갈 것이니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는 예레미야와 같이 곡읍하고 있었다. 사랑과 위로가 아닌 분노와 심판, 지옥과
저주를 겨레에게 선포해야 하는 시대에 보내진 것을 그는 가슴아프게 비탄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는 순교자만이 아니었다. 고발하고 경고하는 겨레에 대한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런 비탄의 얼굴에 그는 그 나름의 어떤 깊은 환희, 감격을 비치고
있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크심에 대한 찬송과 감사가
용솟음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그 동기인 두려움의 선포는
실상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받은 사랑과 그 가이없는 은총에 대한 우리들 인간의
불미에 대한 자책의 소리요 긴장의 외침이었다. 따라서 거기 '죄인이 하나님께
사유받고 구원 얻은 즐거움, 한량없는 즐거움'이 근본적 동기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사랑에 대한 충성과 정절이 불가결이었다.

 아,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감사와 즐거움이 있어서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보다 강하고 다른 도덕, 다른 주의보다 힘 있는 것은 이 즐거움
때문입니다.

 신사나 천황제는 강요와 충성과 권세는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하나님 그분의
독생자의 유혈, 십자가의 희생이란 구원과 사랑의 엄청난 아픔이 선행하고 그것으로
구제받게 된 사람의 찬송과 감사가 있었다. 신사는 우선 그런 점에서 질이 낮았다.
모든 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기독교에만이 십자가가 있고 감사가 있다.
 이 견줄 수 없는 숭고한 기쁨을 영적 외도, 땅에서도 비도와 배신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긴박감이 그의 신앙 정조론이다.

 순교의 기쁨, 이 얼마나 거룩한 기쁨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는 기쁨입니다.

 이런 말은 이미 이 세상의 말이 아니다. 믿어지지 않고, 범인들에게는 그
진실까지도 의심될 수 있는 글이다. '순교의 기쁨', 죽는 기쁨이다. 그는 이미 1937년
말에 순교의 길을 분명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쁨과 감사가 아니면 십자가의
아픔, 순교의 형극은 동기가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그러고도 못한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감사하고, 죽음마저 다 못한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은 주기철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교회내 민족주의운동의 숙정의지

 산정현교회에는 경건한 신앙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또한
민족주의운동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 떼지어 모여 있었다. 김동원, 조만식,
오윤선이 그때 산정현의 삼대 민족주의 지도자들인데, 이 밖에 김봉순, 유계준,
박정익, 정재윤, 김찬두 및 방계성과 같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김동원은
수양동우회의 실질적인 지도세력이었다.
 당시 국내 민족주의운동은 대개 흥사단께와 동지회계의 두 큰 산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흥사단의 총수는 안창호였고 동지회는 이승만이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민족운동들은 묘하게 서북과 비서북의 양대 지역으로 그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운동이 교회라는 거대한 전국적 조직을 우산으로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여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북 민족세력 곧 동우회의 교회내 총수가 정인과, 비서북계 동지회의 교회내
영수가 신홍우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세 교회를 이 두 맥이 관통하여 두 진영으로
대립시키고 있었다. 정인과는 서북 장로교세의 민족운동 주력으로 교권까지
장악하였던 막강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북교회의 신앙적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교회의 순수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운동의
교회내 잠행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권권은 신앙을
보수주의계에 채색시키고 있었지만, 그것이 보수군의 눈에 은폐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교회는 진리의 등대임을 강조

 서북의 교회내 민족운동자들이 다 교권권에 참여하였던 것은 아니다. 거기 거리를
두고 산업, 언론, 문화, 교육계에서 그런 정신을 구현시키고 있었던 이들이 많았다.
비성직계 교인들, 특히 장로들 중에 그런 인사들이 많았다. 산정교회에 있었던
민족지도자들은 대게 그런 부류에 속해 있었다. 주기철이 교회를 숙정하여 진리의
등대로 삼고자 한 대상이 이 인사들이었다. 신앙의 정조는 거기에도 있어야 했다.
 주기철은 이 교회에 부임하자 곧 그 숙정의지를 천명하였다. 그것은 40대에 갓
들어선 목사로서 대단한 도전이었다. 그는 이들을 지목한 것이 분명한 "세 가지의
신앙"이란 설교를 한 것이다. 그 설교는 신앙의 범주에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온 사람,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하기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산정교회에도 그런 동기의 신앙인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이제라도 이 자리를 나가시오"했던
것이다. 그는 참된 신앙이란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품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신앙이라 단호하게 못박았던 것이다.

 돌배나무는 참배나무에 접붙임이 되고야 참배를 맺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그에게 접붙임이 되고야 모든 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 원형은 요한의 신비주의에 가깝다. 그리스도와의 성례적 일체감에 그의
신앙이 표적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수양'이나 '실력 양성', 그리고 민족독립에 대한
동력으로 전용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기철은 꼭 이 대목에서 확인하고 지나가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에게
겨레에 대한 사랑, 민족의 자주 발전, 그리고 그 날의 압제에서 해방되고자 한
민족적 염원이 있었다. 날짜 미상의 그의 설교에 "모세의 120년"이란 것이 있었다.
거기 모세를 자신의 사명과 공감시켜 푼 이런 말이 있었다.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라, 모세는 복종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이시니...
 동포 운명 위급하니 죽더라도 가오리다. 주와 함께 가오리다.

 이 글은 김인서가 설교를 듣고 요지만을 썼다가 풀이한 문장이어서 그의 필치
대강이 눈에 뛴다. 하지만 문장 구사가 독특하다. 주기철은 모세의 사명을
현재형으로 서술해 나갔다. 모세의 역사 사명에 대한 현실적 파악의 자세가 여기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민족의 해방은 죄의 자복에서 오는 것

 평야 40년의 모세에게서 주기철은 다시 한국 피지배상태에서의 해방 이미지를
투시한다.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는 크리스마스 절기마다 묘하게도 모세의 스토리를
드라마로 연출하곤 하였다. 크리스마스 사건의 홍해 그리고 애급 탈출상 부각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 민족사 현장에서는 출애급(Exodus) 해방의 사건이라는
해석이었다. 주기철의 역사적 안목에는 그것이 뚜렷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애굽에 나타났다... 그
지팡이 끝에서 재앙이 떨어지고 애굽의 사대신, 즉 뱀 소 나일강 태양이 다 힘을
잃었으니, 애굽의 운명이 지팡이 끝에 달렸도다.

 여기 다시 현재형 문법의 사용에 눈이 간다. 그것은 바로 일제에 대한 예언이요,
교회의 사명에 대한 궐기이다.

 애굽사람의 장자가 몰살하는 무서운 밤, 통곡의 애굽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유월절이오 해방이라. 이백만의 묶인 쇠줄이 하로 아침에 끊어지고, 사백년간 종의
멍에 이제 벗고 자유로다. 꿈이런가, 생시인가. 하나님의 권능일세...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서고, 믿지 않은 애굽인은 홍해에
몰살이라. 할렐루야, 찬송하세.

 이 감격이 바로 주기철과 함께 이 교회, 이 겨레가 좇아오던 햇빛이다. 이 햇빛이
지금 교회당 꼭대기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주기철은 이 해방을 역사의 뒤편에서부터 더듬어 찾아 올라가는 해석을 한
것이다. 광야 40년의 이스라엘의 죄를 그는 주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이오, 불순종이오, 야간의 도둑질, 고라의 반역, 이 무슨
해괴며, 음란과 금송아지, 이 무슨 망할 것인가. 회개하라. 통회하라.

 민족의 구원과 그 해방은 죄의 자복과 통회가 있을 때 주어진다는 역사이해요
신앙이다. 신앙의 내연이 선행하면 자연 그것이 현상적으로 외연된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으로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족운동가들의 기독교 신앙과 다른
점이다. 성결과 정절, 참회와 순종을 다 포괄하는 신앙 그것이 선행되면 동기 추구적
운동이 허구요 허위요 불신앙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간의 시련 이겨낸 승리자

 이 모세의 설교에 주기철 신앙의 가장 독특한 국면이 하나 시위된다. '시간'이
그것이다. 그는 120년을 모세 신앙의 한 시간적 거리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
120년을 3기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다. 애굽생활 40년 미디안 생활 40년,
광야생활40년이다. 40년씩 해서 120년의 세월을 그는 신앙의 한 거리로 본 것이다.
그것은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요 거리였다.
 여기 그의 문제 시각이 있다. 신앙의 예민성과 충실성은 짧고 촉박한 때일수록
높다. 긴 시간이 가져다주는 평범과 반복의 연속 속에서는 무서울 정도의 무감각과
둔화가 휩쓸어 그 정도를 점찍어갈 수 없을 만큼 무디게 한다. 하나님이 하필
이삭을 죽여 바치는데 아브라함에게 '사흘 길'을 가서 모리아산에서 드리라
하였던가. 시간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삽시간에 느닷없이 해치우기는 쉽다. 그러나
시간을 멀리 길게 잡고, 자식희생을 엄청난 행동을 곰곰히 생각하고 또 주저하다가
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참고 충성하였습니다. 40년의 146만 일을 세 번씩 더하여
하루같이 충성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모세는 '일관된'충성으로... 건국 건교의 창업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긴 시간'의 신앙적 충성과 일관성을 주기철이 이제 몸에 배게 하고 살아갈
대를 맞고 있었다. 그것을 그는 그때(1937)에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120년만큼의 시간을 모세처럼 하루 한 시간 세며 겪어나가 할 시련의 시대가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 신앙은 다시 반복하지만 하나님 그 분의 아픈, 그 아들의 십자가의
속죄행위에 대한 그 분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조와 의무,
선과 진리에 대한 끓을 수 없는 희망과 확신 이외 지탱될 것이 없었다. 그의 모세
120년은 다음과 같은 서정시로 끝맺었다.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을 바라보니
 백년 두고 그리던 땅, 요단 건너 저기로다.
 못 들어가는 이내 몸, 이 산에 누우리라.
 하나님께 드린 몸, 이 산에 누우리라.
 동포 위해 바친 몸은 분골쇄신 백년이라.
 형제자매, 저기 가서 우상숭배 하지마소.
 나의 동포 복지에서 만세 행복 누리소서.

 이 글은 모세의 심정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기철의 마음이었다.
스스로는 해방의 날을 맞지 못할 줄 안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는 가시밭길이
동포를 위한 길이라 믿어 기뻤다.
 여기에 주기철의 신앙이 외연 된 민족애와 민족운동가들의 독립운동광의 차이가
있었다. 민족운동은 그 목표의 직접성 때문에 성취량의 도수에 따라 계량감각이
우선 작용된다. 다라서 피치 의 계속되는 시간의 연장이 인내의 한계를 계속
넘어뜨리고 갈 때, 좌절과 실의를 쓰디쓰게 겹쳐서 맛보다가 결국 "하나님이 계신
세상이 이런가, 그가 어디 있는가, 대답해 보라" 떠들다가 신앙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좌절의 심리가 교회를 떠나게 한 일이 있고 더러는 일제에 전향하여
협력한 반역으로까지 몰고가기도 했다.
 주기철은 난세에 이 시간의 지루한 둔화의 시련을 이겨낸 승리자로 남았다.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기독교학교의 폐쇄

 1936년 8월 한국에는 군부 파쇼의 국체를 명백하게 밀고 나가는 미나미 대장이
새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막강한 일본 관동군의 사령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취임하자 곧 천황 국체의 명징화를 철저히 기하기로 하고 아울러
그 방법의 하나로 신사참배 강요를 체계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제 신사참배문제는
한국민족 전체의 황실 종속화를 완성시키는 일대 국책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이것은
우선 교육기관에서 착수되고, 따라서 선교사나 한국교회 경영의 기독교 학교에 대한
모진 탄압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이 지출하던 교육비용은 그들
선교예산의 반 이상에 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교기관에서 학교 폐쇄의 원칙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 시책이 강요된
것이다. 1936년 7월에 이미 강력한 교육기관을 장악해오던 북장로교 현지 선교부가
'학교 설립 목적과 이념을 보존하기가 지난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교육 인퇴를
결정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1938년 10월에는 평양내의 학교들을 폐쇄하고, 그해
3월에 폐교한 대구 계성, 서울 경신의 뒤를 따랐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정신여학교가 인퇴 결정을 한 것도 이때다. 미국 장로교
총회가 1940년 로체스터에서 소집되었을 때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형태로도
신사참배는 결코 참여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 교육에서의 인퇴는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한 선교사는 탄식으로 울먹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것을 보존하고, 일본화의 끝없는 공작에도 버티어 나간 유리한
매개체 구실을 한 것이 기독교 학교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 해방의 마지막
소망의 터전이 사라져가는 듯한 눈으로 이 교육에서의 인퇴를 바라보고 있다.

 미일전쟁을 아직 저 멀리에 있어서 미국 배경의 학교가 그래도 이만한 민족정신
구현에 임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이제 종국에 다다랐다는 비탄이었다. 남장로교나
호주 장로계 학교들도 곧 같은 길을 택하였다.
 감리교의 경우는 남, 북감리교 선교회의 차이도 있고, 또 교육선교에 전통적으로
주력해 오던 내력도 있어서, 현실적인 해결방법에서 교육에 대한 정서적 집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는 스코트의 해석에 따라 현지 결정에
일임하였다. 스코트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계속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톨릭과 캐나다 연합교회, 감리교 일부가 가능한 한 교육을
계속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 이외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계가 대개
폐쇄하여 그들 신앙의 고수를 다짐하였다.
 한국 안의 교회 일부, 그리고 언론들이 이 폐교 단행에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
"동아일보"는 1938년 6월 말, 사학 태반의 폐교가 '조선인 전반의 수치'라 지적하고
'모름지기 분발하여 붕괴 직전에 있는 교육탑을 사수해야 할 것'이라 호소하였다.
도처에서 교회나 유지가 절하된 값으로 인계를 서둘렀다. "조선사람 오묘하오, 알 수
없소"하고 한 선교사가 탄식하였을 때, 교회는 진리와 정의의 파수꾼이란
사명보다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총독부가 인계하지 아니한 것은
고등정책이다. 한국인이 다 맡겠다고 하는 판국에 나서서 관권개입이니 빈축을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산정현의 김동원도 숭실전문학교 인계에 나서고 있었다.
 이 학교의 인계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곧 나타났다. 그 인계조건에 접수자 '협약'
제1조가 분명히 밝힌 것이 있다.

 인계 후의 학교경영은 종교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와 동일히 하기로 함.

 그 시대에 일반학교와 같이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신사참배가 아니던가. 폐교의
조건이 신사참배 반대였으니 계속의 조건은 그 참배라는 연속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이 교육인계 문제가 한국교회의 역사적 인식이나 그 신앙의 고귀한 전수에서
차지했던 의미를 이렇게 밖에는 달리 계속 못했던가 하는 것, 차라리 왜 포기로
저항 못했던가 하는 것이 주기철의 뼈아픈 슬픔이었다.
 그러나 주기철이 교인의 한 사람으로 정말 단장의 비애를 느꼈던 것은 시세에
따라가는 한국교회의 전향이요 정결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때 "기독신보"의 사설을
보자.

 오늘날 우리 조선의 교회들이 얼마나 선교회의 하는 일을 알며, 얼마나 선교사의
하는 일들을 알고 있는지, 혹시 어느 일단을 아는데,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아니
진리에 부합되지 아니함을 발견할 때에 얼마나 충고하였으며 교정한 바 있는가.
거의가 예예 하여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교회는, 선교사는 으레 다 잘 하리라는
어리석은 미신에 근거한 것이다...
 금번 우리 교회가 성장하여 오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비상시기를 당하여
우리 교회들은 어찌 선교사들이 하는 태도에 맹종할 것인가. 또는 수수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전자의 행동은 야만을 면할 수 없는 어리석은 되거니와 후자의 태도는
그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무성의한 야비의 행동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피눈물나는 선교, 그들의 희생, 병사, 고독으로 인한 자살,
정신이상, 병고, 구타, 이밖에 수없는 고생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지켜오고 가꾸어
왔으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마지막 용기로 서러운 폐교를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방자한 말로 대하는 한국 일부 교회는 이제 정통사에서는 떠난,
친일협력 추행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정통신앙에 근거한 결단을 미신과 야비로
매도하고, 신사참배 가담에 교회의 성숙을 자랑하던 교회에 우리 민족사의 고귀한
정통계승은 눈 밖의 일이었을 뿐이다. 이 '계승'은 이제 주기철과 그에 따라 동행한,
손으로 헤일 만한 소수의 순교자들, 옥중 성도들에 따라 영광스럽게 수행될 수
있었다.

   제5장 마침내 순교하기까지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되어지이다.,
 주기철, 1940년

 1938년. 이 해는 한국의 민족사에서나 교회사에서 일제 말기의 가혹한 시련기에
접어드는 전환기가 된 해이다.
 그해 2월에는 '조선 육군 특별지원병제'의 실시로 한국청년들이 전쟁수행의
자원으로 동원되기 시작하였고, 3월에는 '조선교육령'일 개정되면서 철저한 황민화
정책이 강요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전폐된 것이 이때의 일이다.
이른바 일본어의 국어 상용이 강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4월에 가서는
국가총동원령이 실시되어 전시 총력체제로 모든 생활이 구석구석 노출되기도 하고,
신념과 재산과 제도 모두가 국가 주도의 목표에 공출되도록 강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험난한 통제체제 아래에서 그해 이른봄에 흥업구락부 사건이란 것이 터져,
기독교와 연결된 모든 민족사회운동의 명맥이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전해인
1937년 6월에 검거된 동우회 사건과 더불어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양대 계보가
사실상 거세된 것을 의미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한국교회들

 그러나 문제는 희생과 해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후세에 영광과
청송의 기억으로 추앙되기도 한다. 이런 시련 속에서 전향하고 변절하는 데 역사의
아픔이 있었다.
 가령 괴산에서는 그해 5월 기독교 황도선양연맹을 결성하여 충성을 황실에
바친다고 선언하였다. 보은의 교회에서는 자진 신사참배한 보도가 크게 이용되고
있었다. 그해 5월에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 청주의 기독교인들은 강요에 못이긴
것이었지만 이런 선언을 천하에 공개하였다.

 우리도 황국신민의 본분을 자각하고 전투체제, 거국일치를 완성키 위하여 종래
고집하던 신사 불참배 및 신사 경내에서 시행하는 무운장구 기원 및 기타 보국제에
불참가한 불상사를 자각하고... 자에 인구단련하여 황도를 선양하며 국가를 위하여
황실을 위하여, 기원 보국하기로 결의함.

 그런데 이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는 이런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글을 한 실었다. 곧 청주의 경찰서가 '군내에 있는 80여개소의 예배당을 문을
두드리고...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결과' 이런 국가 행사 참가를 서약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그 경찰의 협박 속에서 신앙의 확신이 없었거나 가정과 주변의
불가피한 인연으로 희생을 당해야 했던 신앙인들의 비통은 너무나 컸다. 당시
뉴욕에서 발간되던 "인터내셔널 리뷰 오브 미션"이란 정기 간행물에 이러한 실정이
포착되고 이에 대한 동정적인 언급이 실렸다.

 가중되는 압박과 박해로, 판단은 그렇지 않다손치더라도, 그 행위에서는 분명히
일반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 한국교회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나 하는 것에 대한 동정적
자세가 엿보이지만, 역시 그 변절의 사실은 냉정하게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결국 외부의 영향과는 관계 없이 그가 한 일에 대해서 마지막 책임을 지는
도리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그 공공성과 조직성 때문에 행정적 조치의 대상으로
처리되기가 쉬웠고, 따라서 교회들과 교회관계 기관들의 전향이 크게 한 흐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8년 5월8일, 일제는 조선기독교연합회란 것을 전국적
조직의 인상을 주면서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다만 경성시(서울)에 있는
일본기독자 및 한국기독자들 몇이 회동하여 결성한 유지들 간친회 정도의
어용집단에 불과하였다. 그때 일본인 중에도 몇몇 기독교인이 있었다. 니와라는
사람은 서울의 일본계 기독청년회에서 일하던 사람이고 추월치라는 사람은
일본기독교 경성교회의 목사였다. 이들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인
의식이 훨씬 앞섰던 인물들이다. 한국인을 위해서 식민지 지배의 아픔을 알고,
한국기독교에 자신을 일치시켰던 노리마쓰라든가 오다라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조직 배경이 없는 개인 전도자들로서 공교회와의 관계형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노리마쓰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오다는 해방
이후가지 살아, 이름을 한국식으로 전영복이라 고쳐 가면서까지 우리와 신앙의식을
일치시키려 하였던 기독자였다.

   '서양화' 벗고 '동양화'하자는 몰기독교적 인사들

 어쨌든 일부 일본 및 한국기독자 일단은 그날 (5월8일) 서울 부민관에서 결단식을
갖고 기독교의 중심을 이미 매몰시킨 변절의 황도종교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국시를 체'하고 '황도시민으로 보국의 성'을 다한 맹서였다. 기독교의 교리나 윤리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한계 안에 머문 기독교는
이미 그 생명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속화되는 전향의 기운은 그것을 촉진하는 힘에 의해서 추진된다.
하나는 물론 일제의 강력한 파쇼체제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전향지도군이다.
전향을 지도하는 몇몇 인사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홍병선이었다.
그의 일본에 대한 의식은 그가 황도기독교의 본체인 일본 조합교회와 관계를 가질
때부터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서 한때 동경에서 애국청년들에게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동천의 서광과 같이 뛰어난 신흥제국의 발발한 운동은 대일본제국이었다.

 문장 구성력이 좀 부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그의 일본 인식이 어떤
것인지는 이 한 문장 속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일본 제국에 대한 황홀한 선망이다.
그런 정신의 부패가 그의 기독교 인식에도 그대로 전염되고 있었다.

 조선기독교는 황국신민으로 국체명징, 국민정신총동원, 총후후원, 정신작흥
제행사를 충성으로써 행하여야 할 것이오, 행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 동양인은 조상숭배하는 풍속은 미풍이요, 또 도덕의 토양이다. 혹 그 방법
수단에 폐해가 있으면 그 점만 개량할 것이다.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서 국가의
원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재선 선교사 제씨는 반도의 사정을 재인식하여 50년 전 조선이 아닌 것을
각오하야, 그대들은 교도들의 시국에 대한 행사를 후원할지언정 무용한 태도를
가지지 말 것이오...
 우리 기독교들은 국가가 있은 연후에 종교가 있고, 종교만으로는 생을 완전히
못할 것을 깨닫고 황국 비상시에 내버린 돌멩이가 되지 말고, 집 짓는데 모퉁이
주춧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몰민족과 몰기독교의 극치에 이른 모반의 글이었다. 기독교는 일제가
없는 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요, 선교사들은 그런 것을 '깨닫게 된'한국교회를
무시하지 말라는 어투였다. 기독교인이야말로 일제 국시에 가장 높은 충성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보았다면, 그것이 기독교란 이름으로 하필 동원할 것까지 없지
아니하였을까.
 이런 일이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진행되고 있을 때, 서북교회의 중심지인
평양에서도 이런 변절의 행동군이 있었다. 오문환과 김채엽이 그 일단이었다. 이들은
평양기독교친목회라는 비교적 정직한 이름을 붙인 어용기관을 하나 만들어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민족교회로서의 역사를 조소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이 복음
진리의 수행에 앞선다고 강변하는 행동강령을 좇고 있었다.
 그 신학적인 대변인이 채필근이었다. 그는 함경도 출신으로 캐나다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한국교회 유일의 제대 출신 목사였다. 그는
기독교의 소위 '조선화'나 '동양화'를 외치면서 요새 말로 토착화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서양 기독교는 식민 제국주의의 주구요, 그것은 기독교의 진수에서 벗어난
것이고, 자신이 강변하는 기독교가 참된 것이라며 교회의 사도적 전승이란 명분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도처에 일제에 의해 대서특필되었다.

 현하에 우리 동양인은 과거 몇십 년간을 너무 지나치게 서양문명에 도취하야
동양문화를 등한히 한 것을 회오하지 않으면 안될 때에 당하였다... 가장 신성한
교육과 선교도 오늘에 와서는 서양인 자기네 명예와 이익을 안중에 두는 것이
얼마가지는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직접 간접, 유형 무형의 압박과 오만이
우리에게 쏟아져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숭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기독교는 동양에서 진정한 성공을 하려면 동양정신에 합치하도록 국민화한
연후에야 위대한 발전을 볼 것이다.

 그의 어려운 처지가 이해되기도 한다. 제대 출신이라면 침묵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강요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딱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순교의
각오가 아니면 남들처럼 시골에가 농사를 지으면서 기도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이 그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난세에는 그러니까 한
길밖에 택할 길이 없다. 순교냐 전향이냐.
 이 이른바 토착화작업 조선화의 발상이 결국 동양화를 거쳐 일본화로 가다가
황민화에까지 가서 기독교의 중추를 분해시키고, 기독교를 서양화의 표본으로
매도하여 반국가로 유도하는 논리의 간악성을 그 자신이 벌려 놓았을 때,
한국교회의 질고가 얼마나 컸겠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양심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들도 결구 이 나라 일제 말기 수난사의 피해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식'으로서의 신사참배 강요

 1938년 일제가 한국 공교회에 대하여 그 국가적 충성을 결정적으로 요구하였던
때이다. 그해 6월에 전북노회가 정기노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한 것을 필두로 그
내친 걸음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노회의 공적 기록에는 이의가 그대로
반영되었을 리가 없고, 다만 참배 동의의 형식만이 전체 분위기인 양 도도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교역자 150여명이 참석하였던 이 전북노회는 김세열 노회장의
사회로 개회 벽두에 이를 가결하고, 이어서 모두 일어나 줄을 지어 전주신사에 가서
손뼉을 치며 참배, 머리를 최경례로 숙였다. 그러고나서 총회에 낸 노회보고서에
'난국을 극복하고 신앙의 단련을 믿으며 무사히 지낸 것을 감사'하였다. 무사히
지냈다는 말에 역사의식의 무디어진 골이 보이지만 그런 글을 안써도 되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을 준다.
 그런데 노회 중에서 정식으로 총회에 신사참배 결의사실을 보고 한 곳을
전남노회뿐이었다.
 금춘 정기노회에서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참배는 국민정신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본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

 그때 노회장은 박연세였다. 하지만 그는 이 가결이 경찰의 지시에 의하였다는
대담한 표현을 불사하여, 오히려 용기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당시의 어려웠던
시세로서는 써놓기 힘든 공개적 자세의 담대성이었다.
 그러나 전남노회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가 당국의 지시에 동조할 수 있는 묘한
틈이 여기 보였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명분이다. 신사참배는 마치 국가를
부르듯, 국기계양 때에 존경을 표하듯, 하나의 국민의례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는 한국교회를 분해시킬 수 있는 길이 한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사 국민의례설이다. 그래서 일제는 일본본토의 일본 기독교대회 의장
도미타를 한국기독교의 중심지인 평양에 보낸 것이다. 한국교회 중심지에서 결전을
한다는 심산이었다. 한데 그때는 일단 구속되었다. 주기철이 석방되어 앞날을
준비하려고, 이유택, 김화식 목사들과 함께 입산, 금식기도를 하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
 도미타는 평야에 1938년 6월30일, 더운 날 도착하였다. 그리고 평양 장대현교회의
목사 김영준의 환영을 받았다.
 김목사는 프린스톤 신학 출신으로 3.1독립운동 때에는 그가 시무하던
비석리교회가 전소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5시에는
교외 파취각에서 평양, 평서, 황해 안주네 노회 주최의 환영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100여명의 목사가 참석하여 이 일제의 대사를 맞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 도미타가 주기철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들어온 것이다. 주기철과 맞대면하겠다는 것이었다.
대결은 일종의 간담회 형식으로 열렸으나 주기철이 직접 논쟁자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좌장은 이승길목사로 한때 독립운동의 거장으로 국외를 편력하였나 이
무렵에는 이미 친일로 기울던 목사였다. 통역은 일본 내각에까지 손이 닿았다던
오문환이었다. 주기철은 금식기도에서 갓 돌아와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때라
창백한 얼굴로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한 일본 기자의 주기철 평에는 주목사가
'전일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석방된 형편'이라 기록에 남기 고 있다. 이 글에 묘한
냉소의 기미가 담겨져 있다. 주목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당교회 목사'라 썼기
때문이다. 그 교회 담임목사의 성함을 내객이 모르고 찾아왔을 리가 없다. 그것을
짐짓 무시하고 '유치장' '석방' '형편'등의 표현만 쓴 것은 주기철을 은연중에 무시할
뿐 아니라 그를 죄인 취급한 것이 확실하다. 이 '형편'이란 글은 그 문맥에서
'꼴'이라 해도 될 표현이다.
 이 자리에서 도미타는 신사가 종교가 아니라고 국가에서 설명하였음에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경멸 섞인 어조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특정한 종교에
참배하라는 것이 아닌 이상 한국교회의 반응은 몰지각 아니면 과잉반응이라고
냉소한 것이다.
 좌중이 열기에 차고 분노에 차기 시작한 것을 동반한 기자 히다카가 눈치챘다.
그의 반응은 이러했다.

 가장 곤혹을 당한 것은 내지(일본)에 있어서 신도와 기독교와를 묶어선 종교와
일치시킨 저작물들이 이 국어(일본어)를 해독하는 목사들에 의해서 습득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그것은 적어도 일본 기독교회의 신학자가 결코 숭인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 답변하였다. 국어(일본어)는 우리들에게 영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는 없어도 읽기에는 불편이 없는 것 같아서, 주목사와 같은 자는
통역을 중개로 지긋지긋하게 논구해 왔다.

 일본교회가 한국교회를 얼마나 경멸하여 왔는가 하는 사실이 여기에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한국 목사들이 일본에서 간행되는 종교서적들을 못 읽거나 안
읽었다고 생각한 흔적이 뚜렷하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대한 안목이 얼마나 자만으로
폐쇄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도미타는 당황하여 격한 어조로 돌변하였다.

 제군의 순교정신은 훌륭하다. 그러나 언제 우리 일본정부가 기독교를 버리고
신도에 개종하라고 윽박지르던가. 그 실례를 보이라. 국가는 구가의 제사를
국민으로서의 제군에 요구한 데 불과하다. 경관이 개인의 종교사상을 가지고 제군을
윽박질렀다고 하지만 국가는 그런 일을 승인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금압되었을 때에만 순교하란 말이다. 명치대제는 만대에 미칠 대어심을
가지고 세계에 유례없는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을 만흘히 차단하는 것은 모독에
속한다. 민간학자는 제 마음대로 글을 쓴다. 거기에 일일이 마음을 쓰다가는 제군의
방향을 잘못 잡기가 쉽다.

 도미타는 흥분하였고, 더구나 주기철의 조용하고도 차분한 논리에 당황하였다.
주기철은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작을 가지고 논란하자고 하였다. 주기철의
방대한 독서량이 이런 때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기독교측의 저서들을 지명하면서
그 소론을 인용하여 재삼재사 논박하여 왔다'는 것이 수행한 기자의 기록이다.
 주기철의 신앙에 감격과 찬송, 그리고 결단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처럼
방대한 저서들을 섭렵한 신학적 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의 순교가 남달랐던 점이
따로 있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그의 순교가 무서운 인내와 함께 명쾌한 신학적
판단에 의해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

   한국교회 사활 해치는 인사들

 그날의 토론은 끝이 없었다. 밤 깊어 자정이 지나고 한 시도 지났지만 열의와
긴장은 더해갔다.

 (이 문제는)조선 교직에는 사활의 문제인 것이다. 단지 일신의 안위뿐만 아니라
목회하는 교회원의 안위에 걸리는 일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론은 결국 밤을
세웠다.

 한국교회 사활이 걸렸다는 일본 기자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
토론에 '논의 비동'하고 심지어 '살기가 높아져서 형세불온'한 데까지 이르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심야에 결국 여러 경찰관을 파견하여 '창 밖에 운집한 군중속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주기철은 고문하고 한국교회를 핍박하던 그 평양 경찰이 보호해야
했던 기독교인들, 그들은 실로 어떤 기독교인들이었을까. 그들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이승길이 주기철의 과격한 발언을 경계하였다고 하였으니, 그가 이미 신사참배에
기울어진 것은 두말할 것 없으나, 동료 성직자를 경고한 그 자세는 벌써 겨레와
교회와 양심을 판 부정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좌중이 일제히 '좌장 횡포'라
소리쳐 사태가 실로 위험천만에 이르고 있었다. 일본 기자가 남긴 글에는 '오문환이
고소하면서 우리들(일본인)에게 통역하며 속삭였다'란 대목이 있다. 위기에
내부분열을 보이는 것이 한국인의 의식구조라고 했던가.
 그 모습이 바로 여기 있었다. 겨레가 어려운 시련을 맞고 있는데 오문환은 일제에
대고 한국인을 비웃고 있었다면, 그가 이끌던 기독교친목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교육인퇴에 따라 선교사들에게서 숭실중학교를 인계받았던 이춘섭 장로는
105인사건 때 연루되었던 애국지사였다. 그런데 그는 이 일본 교회 일행과 그들과
시종 동행한 한국교계 인물들을 위해 그 저택에서 저녁을 냈다. 일본 기자의 글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실로 산해의 진미 산적한 대접... 삼십인 접객의 준비인데
삼백인을 먹일... 결코 가장이 아닌 대접'을 받은 것이다. 이춘섭장로는 평양
창동교회의 시무장로였다.
 이 일본인 신의주를 향해 떠날 때는 평안남도의 경찰부장이 역에서 환송하였고,
경찰국의 특별고등과장이 동승하여 도경까지 전송하였다. 이 나라의 얼을 깨고
기독교의 생명을 삼제 하려던 그 경찰, 더욱이 특별고등경찰이 전송하고 동승 환송
보호한 이 기독교인들이 누구였던가. 도미타 말 속에는 언제나 자타의 전제가
있었다. '우리 일본'과 '당신'들의 대립이 전제되고 있었다. 그 우리 일본의 기독교가
당신의 기독교와 다르다고 말한 그의 신앙은 일제치하 한국기독교가 일본
기독교에게서 느낀 구슬픈 식민지 교회상을 설명하기에 넉넉한 방자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기독교 일각에서 '우리 일본'에 포섭되기를 앙탈하던 무리가 있었다.
 그 명분이 조선화요 일본화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일본 지식층의 공격

 그러나 일본 기독자 중에 양심의 표본이 그나마 한둘 있었다. 일본 중의원의 가장
행동적인 지도급 대의사였던 마쓰야마가 그 사람이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의 애매성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식민
통치에는 비교적 하졸들, 저질의 일본인들이 한국에 파견 이민되었던 것이다.
근세사에서, 해외식민통치는 나라 안에서 몹쓸 잡종들을 보내 강압과 완력으로
통치하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마쓰야마는 양식있는 기독교 정치인이었다. 그는 우선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란 말과 '신사는 종교를 초월한다'는 말의 동시 사용이 가진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이 말의 혼용, 다시 말하면 '이 사상적 혼선이 용이하지 않은
곤란을 조선통치상 야기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탁견이었다. 그의
말이 한국교회 전통에 어느 만큼의 핵심적 지적을 하였는가 알아보기 위해 길게
인용해 본다.

 선교사들( 및 한국교회들)이 주장하는 바는, 총독부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신사에서 행해지고 있는 제행사를 보면 기원 기도를 한다든가 대마를
수여한다든가 해서 종교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가. 신사는 실제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기독교 신자 수는 약 50만이라 칭한다. 더구나 그 경제적 세력도
상당히 유력하여, 특히 평안남도에서는 그것이 현저하다. 기독교를 무시하고 그
정치를 병행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신사 문제에 관해서 총독부는 합리적인 견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신사행사에
있어서 이론에 맞지 않는 불철저한 것이 있기 때문에, 혹인 실제 민중에 접하는
관리들 중 신궁은 종교를 초월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민중에 임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조화를 발견할 수 없고, 그래서 탄압을 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는
조선통치상의 중대 문제이다.
 조선통치상 곤란을 낳는 일이 이처럼 있기 때문에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견해를 견지해 나갈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상, 대신궁은 종교를 초월하는 종교라는 것과 같이 주장하는 사상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대책을 세워놓지 아니하면 안된다... 종교적 행사, 가령
기원기도를 한다든가 대마를 수여하는 일과 같은 것들은 이를 폐지하여야 한다.

 그는 중의원 대의사로서 정확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938년 8월가지만 하여도 일제의 신사정책에 관념상의 정립과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그해 8월 현재 목사로서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자 백
수십 명에 이르고 현재 형무소에 있는 자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총독부의 자의적 만행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면
일본 안에서 그렇게 극심하지 않았던 신사참배가 한국안에서는 국체명징의 한
충성표시로 일괄 강요되었다는 사실은 신사참배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제에 대한
충성의 한 테스트로서 굴종케 하는 통치의 단말마저 수단이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신사의 관념이 없었더라면 다른 어떤 해괴한 수단으로도 이와 방불한 강요로
한국교회의 근절을 꾀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신사참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교회
삼제가 문제였다. 따라서 도미타나 마쓰야마나 모두 일제의 통치이념에 기만된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그 진상을 투시한 사람이 바로 주기철이었다. 주기철은
여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민족말살의 한 걸림돌, 한 시험
케이스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읽고 그 핵심 도전한 민족의 목자였다.

   신사참배 가결한 노회 점점 늘어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총독부의 강경책은 1938년에 대개 그 결말을 짓는다는
식으로 일을 추진해 나갔다. 1938년 4월까지 교회 교역자로서 신사참배 문제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불경죄 4건에 17명이었고, 보안법 위반 5건에 5명, 구류 3건에
3명, 행정 검속 5건에 7명, 합계 17건에 32명에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행형에 있어서 대개 마찬가지이지만, 무헌법 파쇼 전쟁체제에서 공표한 공식
통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수는 실상 엄청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일제의 가혹한 민족 탄압과 교회 파괴 공작은 심화일로에 있었다.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한국에 시행하였고, 7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어
정신적 육체적 국가 징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해 9월에는 한국예수교
연합공의회(N.C.C)가 해산되었고, 전술한 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교계 지명인사를
일망타진 검거하는 가혹한 분위기가 엄습하였다.
 앞서 말한 바 있는 기독교 연합회는 7월에 이른바 전조선 확대대회를 열어
전국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모임에 조선총독 미나미가 직접 참가해서 격려사를
했다. 그래서 지방연합회 32단체 대표 71명, 그리고 서울 시내 일본인, 한국인
기독자 8000여명이 개회 벽두 조선신궁에 참배한 그 회의의 친일 전향성을
시위하였다.
 교회의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이미 그해 5월에는 신의주에서 목사 수명이
검거되었는데, 그들이 석방되는 귀로에 대거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는 보도가 그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교회 한구석에서 이 시련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한 이가 있었다. 김선두목사이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출신으로 1917년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한때는 선천
신성중학교 교장 일을 보다가 1938년에는 만주 봉천신학교의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동경에 잠입하여 기독신자들인 마쓰야마 대의사, 육군중장 닛비키, 궁내성
차관, 세키야 등을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이들과 동도 귀환하여
미나미 총독과 면회가지 하는 등 대사를 꾸몄었다. 그러나 그 역시 8월7일에 갑자기
검거되어 합법적 반대운동이 좌절되었었다. 이들 일본 기독자 정객들은 일단 서울에
와서 9월4일 총독과 정무총감 오노를 만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행정상의 조정을
꾀하였으나 별무성과였다.
 1938년 8월에 들어서면서 이제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문제의 속결을 강행하기
시작하였다. 8월10일 평안남도 도내의 장로교회 들이 '전부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개천과 강동의 목사들이 신사참배 의사를 공개 표명하도록 하였으며
순천 관내의 교회들은 '태도를 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지로 대거 참배도 하고,
장문의 성명서까지 발표'하게 한 것이다.
 8월 26일에는 평양 장로회가 신사참배는 교회에 배치되는 바가 없다고 선언하게
하였다. 서북지역 교회에 집중적 참배 강요가 가혹하게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는
서북지역과 신앙상의 기맥이 통하는 보수계의 영남지역에 그 손길을 뻗쳤다.
경남노회가 9월 2일에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이다. 공교회의 수모, 그리고 그 형극이
이만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로교의 총회가 모이는 9월9일 이전까지 신사참배를
가결한 노회는 총 27개 노회 중에서 과반수가 넘는 17개 노회에 이르고 있었다.

   마침내 무너지는 '한국장로교회'

 1938년 8월 28일, "매일신보"에 총독부 경무국의 고등외사과장회의 개최가
공공연하게 보도되었다.
 그 의제는 방첩과 교회관계였다. 교회를 첩자 취급회의와 동시에 취급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제 구체안으로 '조선야소교 장로회에 관한 문제'가 긴급 취급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9월 9일은 한국장로교 총회, 서북일대에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장로교회의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하도록 되어 있었다. 거기 대한 경찰의
사전 대책회의를 고등 경찰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열고 있었던 것이다. 총독부
경무국까지 동원된 어마어마한 계책이 총독부 차원에서 꾸며지고 있었다. 이
고등과장회의는 다시 9월 3일에도 열렸다. 그 날짜의 "매일신보"는 뭔가 자신감으로
차있는 기사를 실었다.

 이 장로교 문제는 한동안 심사참배 문제로 세상의 이목을 시끄럽게 하다가
급각도로 전환을 하야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될 총회 이후의 동정을 주요 문제로
장장 협의하였다.

 9월 초에 이미 장로교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낙관한 글인데, 그 만한
예비조치를 경찰이 취하였다는 뜻 이외 다른 것이 없었다. 차라리 그 이후의 문제를
벌써 장장 협의하고 있었던 일제 경찰에게 이미 수많은 교회의 충실한 교역자들이
검거 투옥되고 있었다. 총회 개최 하루 전날인 9월9일자에는 이런 기사가 실린다.

 신사참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명랑한 빛이 전교회에 흘러넘치고 있는
가운데에서 다시 신사참배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표시하는 성명서를 발효하여야 할
것이다.

 성명서 작성까지 미리 짜놓고 있었다는 문맥이다. 고등외사과장 회의의 결과가
무엇인지 곧 나타났다. 선교사들에게 이번 총회에서는 일본국민이 그 충성을 다하는
신사참배 문제를 의결하기 때문에 외국인으로 반론은 결코 제기 못한다 함이요,
만일 반대의사를 개진할 경우 천황 신성모독죄로 다스린다는 협박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각 노회 대표들이 평양을 향해 떠날 때에 이미 수차례에 걸쳐
협박을 해온 그 지역 경찰과 형사들이 둘씩 한 총대에 붙어 동행한다는 결의였다.
 9월 9일 저녁 8시에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는 예수교장로회총회 27회 회의가
폭풍전야의 긴장 속에서 열렸다.
 그날은 몹시 더웠고, 서천에 검음 구름이 석양을 가리고 이었다. 그 총회에는 27개
노회 총대목사 99명, 장로 89명, 선교사 35명 합계 223명이 등록되었으나, 이중에서
30명이 결석하여 193명이 참석하였다. 여기 경찰관이 97명 임석하여 총대들 틈에
자리잡아 전 회의장을 험악한 분위기로 장악하였다. 방청객은 500을 헤아렸다.
1937년 총회 때만도 있었던 평양노회 총대명단에 주기철의 이름이 없었다.
구속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참석해서는 안될 사람들은 이처럼 이날 유치장에
격리되어 있었다.
 첫날은 임원선거가 있어서 평북노회의 홍택기목사가 총회장, 경남노회의
김길창목사가 부회장에 각각 선임되었다. 그리고 첫날은 지났다.
 다음날 10일 새벽 6시에 경건회로 모였고, 9시 30분에 본회의가 속개되었다.
찬송가 6장이 봉창된 후 성경 히브리서12장 1절에서 3절까지 읽었다. 그리고
평안남도지사 이시다의 축사를 들었다. 이 총회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대담하게 침범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시 40분 회의 속회가 있자 곧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연합대표 박응률의 제안에 따라 신사참배안을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
한국장로교 붕괴의 소리가 여기 있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가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다음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이러고 나서 부회장과 각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선교사 블레어가 "신사참배는 우상"이라 소리쳤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았고, 다들 묵묵히 이 거대한 정통교회의 붕괴를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불과하다며 사소한 문제처럼 속
편히 지나가고 깊었다. 겪어야 할 것을 피해간 것이다. 천황제 문제와의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신사 문제를 애국의식의 문제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의
지혜였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국가 신도의 윤리적 변장이란 일말의
자위로 굴복하였다.

 아, 비극의 27회 총회. 통분하도다.

 김인서는 이 말밖에 따로 기록할 말이 없었다. 한국교회 역사 반세기 55년에
배절과 실조의 오점이 이렇게 남겨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양심과 신앙의 충절은 어디엔가 남아 있었다. 꺾인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흙에 묻혀 있었다. 그때 한국의 교회 양심은 대거 검거되어 감옥 안에
있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도 경찰이 곁에서 함구시켜, 저항의 음성이 표면화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조치가 마련되어 이었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한국에서 외국인이어서 말할 자유가 있었다. 그들은 신사참배
결의 무효를 겨냥한 반대안을 제출하였다. 신사참배가 장로교 헌법과 성경에
위배된다고 하여, 이를 13일 총회 회기 중에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총회는 '족히
토의해 볼 가치도 없는 자료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그대로 매장해버렸다'고
"매일신보"는 보도하였다. 이제 교회의 주체성과 양심의 발언은 봉쇄되고 전향과
변절만이 상처입은 교회의 음성으로 대변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 경찰의 총회 간섭 사실은 당시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매일신보"에 묘하게
공개되고 있었다. 총독부가 이 신사참배 가결에 공이 크다고 해서 경찰관들을
표창한 사실이 기사화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곧28명의
경관에게는 경찰부장 감사장, 41명의 경관에게는 특별상여금 지급,. 20명의 경관에는
특별승급이었다. 그 신문기사에는 이들 총 89명 경찰관의 명단이 전부 실려 있었다.
이 기사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한국에서 이런 글을 기사화하는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교회를 범죄단체시해서
마치 현상금을 붙여 사건을 해결한 경관에게 보상한 인상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뼈아픈 수모를 당시의 교회가 겪었던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가 이들에게는 물론
반국가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전체를 이런 방법으로 능욕한 것은,
이런 사실을 공개 기사화한 그 악랄한 자세와 더불어 이 나라 교회수난을 처절함을
다시 한번 눈물겹게 해준다.

   변질되어 가는 교회들

 주기철은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얼마 후에 석방되었지만, 그는 교회 안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한국교회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1939년 총회의
평양노회 총대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다만 조택수, 장운경, 박응률,
이승길, 최지화, 김화식, 김선환 등이 그 총대들이었다. 이들 중 조택수와 김화식은
해방 이후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순교한 훌륭한 목사들이었다. 더구나 김화식은
그래도 이 공교회의 마지막 숙정을 바라,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던
현실참여적 민족교회론자였다. 선교사 총대로는 산정현교회와 밀접한 연결을 가졌던
베른하이젤, 신사참배를 하면서까지 숭실전문학교 운영을 주장하던 모우리 그리고
클라크가 그대로 신사참배 총회에 남아 있었다. 다들 순교자와는 다른 길을 간
사람들이었다.
 일제는 이 한국통치의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기독교의 와해에 승전고를 울렸다.

 국내 수십년 포교와 50만의 신도를 옹하고 일면 국내 민족주의자의 아성인 감이
있었던 조선기독교가 그 다년에 걸쳐 배양되었던 민족적 반감으로서 신사 불참배의
태도를 고집하여 왔는바, 교도의 각성에 의하여 최후까지 완강한 태도를 견지하던
장로파가 본년 9월 평양에서의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과 동시에, 다년
조선기독교회에 확고한 지도적 위치를 보지한 장로파 선교사도 노회로부터 탈퇴를
가차없이 당하였으며, 일방 조선기독교연합회 및 기타 단체의 기독교를 통한
일선일체화운동 등 기왕에 있어서의 극단적인 구미 의존관념을 시정하는 등 점차
명랑한 일본적 기독교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제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에 근거가 없지 아니하였다. 1938년 10월 17일
장로교회는 '시국대응 기독교장로회 대회'를 개최하여 미나미총독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그때 총독은 의기양양, 기독교의 핵심을 해체시키는 말끝에 천황존숭,
경조숭조, 국가에의 충성을 강요하면서, 황국신민의 근본정신에 위배되는 종교는
절대로 존립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경고를 하였다. 그날 참가자 약 3000명은
'황국신민의 선서'를 제창하고 일장기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고는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한 다음 해산하였다. 조선신궁 참배 때 오건영목사는 옥관을
바치면서 무운장구의 기원을 하였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왜 이들이 굳이 보존하려
하였는지 아무도 알 사람이 없었다.
 1939년부터 장로교 총회는 황국화에의 보조를 가속화시켜 나갔다. 개회 벽두
천황이 있는 궁성 쪽을 향해 요배하고서야 예배와 회의가 진행되었다. 신사나
천황이 '절대의 도'가 된 것이다. 가장 높은 자가 된 것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그
아래 놓여지고, 교회는 천황의 은사에 눈물을 흘려 감사하여, 기독교의 신관을
내던지고 말았다.
 1939년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예수교장로회 연맹'이 결성되었을 때의 취지
성명이 이런 가치전도를 역력히 보여주었다.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양함은 황국 부동의
국시이다. 아등은 자에 익익 단결을 견고히 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능력을 발휘하여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고 다시 복음 선전사업을 통해 장기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함.

 복음 전파가 황국 부동의 국시에 협력하는 것이라는 이 성명이 나간 후 이들은
이것이 역사에 남아 심판받되, 그 귀절 일점일획도 변경됨이 없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결성식의 주도인물들은 곽진근, 조택수,
홍택기, 홍종섭, 조승제, 강신명, 최지화 그리고 한경직이었다. 향후 이 연맹이
실질상으로 총회기능을 그대로 수행하게 되어, 총회는 형식만 남았다가 1942년에
가서 마지막 회록을 남기고, 기 이후는 해체상태에 이르렀다.
 우리 교회의 황국화 과정은 1941년이 되면서부터 극단에 이르도록 강요되었다.
이제는 총회 벽두에 평양신사에 우선 참배하고 나서야 무슨 일에든 착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강도 높은 성명서를 공표하고, 국방헌금을 하고, 군용기
기금 헌납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말끝마다 혁신, 일본화, 동양화, 조선화를 외쳐야
했다.

 시국의 추이와 대세의 추진됨을 따라... 소화 15(1940)년 11월에 장로회 혁신강요과
신체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여 본교회의 구미 의존주의를 탈거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서의 귀추와 태도를 천명한다.

 1941년 총회가 채택한 총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사에서의 다음과 같은 말은 당시
교회의 역사적 위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더듬게 해준다.

 안으로 교회를 무대로 하여 암약을 호사로 하던 교계정객들의 그릇된 인식을
배격하며, 밖으로 일체의 종교적 경건과 의식을 말살하여 버리려고 하는 적색사상
내지 유물주의의 침해를 방지하며, 한편으로 선교사들의 불순한 탈선행위를
제압하여 동양적 일본적인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는 체제를 갖추어 바야흐로 국민적
자각을 촉진하여 신도 실천의 정신, 종교 보국의 이념을 철저화하며 들어와서
교회내의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팔굉일우의 대이상 실천에 미충을 다하야
익찬하여 받드는 길을 열어놓는 등, 피와 눈물과 땀이 깨피어 있는 것입니다.

 1942년 총회는 앞서 말한 대로 총회록을 남긴 마지막 총회였다. 그 총회록은
군용기 '조선장로교호'의 헌납, 육군기관총 7정을 헌납하기 위한 헌금 15만318원의
모금, 교회당의 쇠종을 떼어 바치게 한 수 1540여개, 이런 기록들도 있었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다. 일제 군사행동에 동원된 한 사회단체에 불과했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주기철목사 순교 역정의 배경이요 무대였다.

   주기철모사의 첫 구속(1938.2__1938.5)

 주기철의 첫 구속은 정작 주기철 자신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평북노회의
신사참배 가결과 간접적으로 연결된 사건 때문이었다. 1938년 2월9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막강하던 평북노회는 일제 경관 출신 목사 김일선이 노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이북에서 평안남도 인민위훤회 직원으로 일한, 변절 생태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중대한 변란을 겪으면서도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주의 은혜로 1년간 평안히 지냈다'고 하였다. 교회가
쓰는 용어의 관습성이란 것이 가지는 심각한 폐해와 불성실이 이처럼 새삼스러웠던
일이 다시 없었다.
 일제가 노회나 총회를 통해서 스스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한 동기는 신사참배
반대를 반국가행위로 치죄하기 이전, 이미 그것이 반교회행위로 자체내의 이단
책벌이란 과정을 거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세계적인 종교의
충실한 신앙으로 회생시키므로 그 희생자가 기독교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불명예를 해소하고, 스스로 반기독교적 행위로 처단된 인상을 주기 위한 음흉한
계책이었다.
 이 교세 막강한 평북노회가 앞장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데에 전국 교회가 흥분하고
격분하였으며, 어떤 방법으로든 이들에게 보복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학생 장홍련이 일단의 신학생들과 함께 신학교 뜰에 있는 김일선의
기념식수 수목을 도끼로 찍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일경의 감정을 촉발하였다.
 그런데 마침 산정현교회는 새로 예배당 건물을 신축하고 그해 2월 18일을 헌당
예배일로 정하고 감격의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경은 이 수목 도끼사건을
중대시하여, 어떠한 형태의 신사참배 반대 논의나 행동도 가차없이 척결한다는
방책을 세웠다. 그리고 헌당 예배를 며칠 앞두고, 기왕에 도전적인 설교를 하던
주기철목사를 구속 연행한 것이다. 이것이 주기철의 첫번째 구속이다. 주기철은 이
도끼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향후도 마찬가지로 주기철 구속이 그 어느
하나도 그가 직접 관련된 사건이 없었다. 다만 일제는 그의 오래 전부터의
신앙경력과 예언자적 발언이 실질상의 한국교회 정신이 강력한 중추하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검속의 형태로 그를 감금시켰던 것이다.
 목사를 유치장에 보내고 산정현교회는 눈물과 비탄 속에서 헌당 예배를 들렸다.
그날 대신 설교를 한 이성휘박사는 목멘 소리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예배당은 예루살렘 성전과도 같습니다. 천정에는 많은 십자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예배당 천정의 무늬를 보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수난, 목사의 순교를
예견한 비탄이 아닐 수 없었다.
 주기철이 바로 그때, 곧 2월에 한 것으로 남아 있는 설교에 "하나님울 열애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의 첫번째 검속 날짜와의 전후관계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거기에는 그의 신앙 심리의 일단이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신사참배 가결이
휩쓸던 때의 일이다.
 그는 구약성서를 특히 중요하게 읽었다. 더구나 신명기와 시편을 좋아하였다. 그
기자들이 열애한 기록이었기 때문이라 밝혔다.

 모든 예언자가 불같은 의분으로 인간을 능책한 것은 저들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아무 각성이 없고 숭경이 없고 성의, 열애가 없음이외다...
 모든 예언자가 애소한 비조는 다 인생의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거스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일, 곧 인간 때문에
당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여 함이외다...

 그는 하나님의 성호가 모독되어 가고 있는 세태에 분노와 비통을 느꼈다. 우리가
헌신하고, 모든 것을 희생할 대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 지고의
대상이 오명에 노출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는 한국교회의 조락을 아픔과
격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약간의 교회가 있다 하나 오늘날 수억의 교회 중에는 과연 하나님을
열애로 섬기는 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조선교회를 보매 그 교회 신앙의 동기는 불순
유치한 것이 많고, 성심과 열애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극히 드뭅니다.

 한국교회는 시련에 직면해서 더러는 전향하고 더러는 이탈되어 나갔다. 가령
장로교의 경우 그 교인은 1938년 36만 2077명이던 것이 1939년에는 36만 838명,
1940년에는 32만 8648명, 1941년에는 32만 4913명, 1942년에는 24만 9655명으로 그
하락 추세가 역력하였다.
 하지만 교회는 자책과 반성의 빛이 없었다. 공식문서에 그런 퇴영적 문구를 쓰지
못하게 한 검열이 심했다고 하자. 그러나 전시체제와 물리적 긴축 그리고 압도하는
신도정치의 굴레 속에서 교회는 묘한 무사 무감각의 반응을 보였다. 생명력과
가치관을 일거에 거세당한 교회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1936년 9월 장로교 총회에
제출한 26개 노회의 보고서는 '평안히 지냈다', '무사히 지냈다' 이런 말들로
천편일률이요, 다만 경북노회가 '시국인식 문제로 일부 교역자가 고통을 당한 일'을
명시하였고, 경남노회가 '시국문제로 여러 가지 어려운 중에도 주님의 손이 붙드사
무사히 지냈다'는 보고가 예외일 뿐이다. 시국문제가 신사문제인 것은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다.
 서북교회에 워낙 일경의 직접 박해가 심했던 까닭에 그 교회의 조직성 노출
때문에 전향이 눈에 띄었다면, 영남교회가 신앙노선의 서북형으로 보수적 성향과
함께 끝가지 교회 순결을 묵수하려 한 결단력이 남달랐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사실
주지철도 영남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덕지, 한상동, 주남고, 이현속, 이주원, 방계성,
오윤선이 다 영남 출신이었다. 서북에서는 이기선, 안이숙, 박관준이 알려진 몇
사람이다. 영남교회가 한국교회사에서 그 보수주의 신앙과 충성의 주맥을 이룬
사실은 한국교회 신앙지리사의 체계적 연구를 검토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기철목사의 2차 검속(1938.8__1939.2)

 주기철이 첫번째 구속에서 언제 석방되었는지 그 날짜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전술한 바 있지만 일본의 도미타가 평양에 찾아온 것이 1938년 6월 말이고 그때
주기철이 이미 석방되어서 묘향산 단군굴에서 이유택목사와 김화식목사와 더불어
금식기도를 3일간 하고 돌아와 산정현교회에서 일본교회대표 일행과 논박한 사실로
미루어보아서 그해 5월에 석방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감옥에서 3개월 남짓
고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해 장로교 총회가 열리기 한달 전 8월에 다시 예비 검속 형태로 구치된
것이다.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위해 경찰 간부회의를 수차 소집했던 일제가
가능한 소요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구속적부심이란 없었던 세월이다.

   농우회사건에 연루된 두번째 구속

 그런데 주기철목사가 두번째 구금되기 얼마 전에 남긴 설교가 있었다.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이 그 설교를 직접 듣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성경
본문은 히브리서 11장 1절이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안이숙은 그날 밤 주기철목사가 "예수님을 상상케 하는 아름답고
성결한 용모를 가진 분"이라 회고하고, "그의 용모와 표정에서 벌써 큰 감화를
받아서 가슴이 설레었다"고 회상하였다. 주목사의 말을 영어의 생활의 형극을
말하면서 시작하였다.

 그들(일)의 악착한 매의 채찍은 살을 찢고 신경에 불을 지르지요. 아픈 것이
그렇게 심하고 무섭다는 체험을 말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지금이 시작이지요.

 그 다음 주일에도 주기철목사는 안이숙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은 남기는
설교를 하였다. 주목사의 창백한 얼굴은 석고로 빚어놓은 듯하였고, 미의 조화로
우뚝선 코, 안질로 붉어진 눈에 고인 눈물, 이것이 안이숙이 그날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주기철의 모습이었다. 예배 시작 찬송은 20장, 오늘의 찬송가로는 31장이다.

 만유의 대왕 늘 경배하며
 그 크신 사랑 늘 찬송하네.
 옛부터 영원히 참 방패이시니
 그 영광의 주를 다 찬송하라.

 우리는 일제시대 말기 교회에서 설교나 찬송 중 '만왕의 왕'이란 말만 나와도
임검했던 경관이 천황의 존엄을 모독한다 하여 '입닥쳐!' 하고 큰소리치던 일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예배는 물론 그것으로 끝나고 목사는 곧 수갑이 채워져
유치장에 끌려갔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부른 것이다.
 주기철목사의 그날 설교는 '심부를 꿰뚫는 것 같은 영력이 막 쏟아져 들어왔었고'
'그의 설교에는 성신이 충만하고 대담한 용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아내로서 남편 외에 다른 주인을 둘 수 없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신 계명은 이 천지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의 명령이십니다... 이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상이 무서워서 배반하는 행동을 하자는 모독배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나가십시요. ...엄연한 하나님의 법은 왕도 번하면 문둥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고 나서 얼마 후에 그는 다시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농우회사건
연루였다.
 농우회라는 것은 유재기(1905__1949)목사가 한국교회의 경제적 갱생을 위해 조직
운영하던 모든 운동을 총괄한 것으로 이것을 일제는 '기독교도의 조선독립 음모'로
적발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단하였던 운동이다. 일경의 판단으로는
유재기목사는 '평양 신학교 및 숭실전문학교 재학중의 사상학생 10여명을 규합하고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현시켜 조선독립을 달성할 수 있도록 농촌연구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 협동조합 소비조합 등의 단체를 결성하고 이들을 통하여 농민
각계층에 투쟁의식을 주입'하였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처음 1934년
기독교농촌연구회로 발족하였는데, 조만식이나 배민수(1896__1968), 김성원(전
건국대학교 농과대학장), 박학전(1905__1972, 전 인천시장)과 유재기가 함께 시작한
한국교회의 농촌사회운동이었다. 이것을 유재기목사가 시무하던 의성교회 안에
농우회로 조직 활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주기철이 관련된 경로나 내력은 불투명하다. 일경이 이 사건을 묘하게도
강력한 장로교 세력의 근거지인 평양의 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에 연결시킴으로써 그
지역교회의 탄압을 목표로 한 것이 분명하다. 1938년 8월 현재 한국 기독교 신자
총수 50만 중에서 35만이 장로교 신자였는데, 그중 5분자 4가 평안남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제가 어떠한 구실로든 이 지역교회의 교세를 꺾으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신학생과 전문학생 몇 명의 가담 사실만으로 평양교회 지도급 목사들을 검거한
배경이 일단은 밝혀진다.
 그래서 주기철, 이유택과 산정현교회 부목사로 있던 송영길, 그리고 박학전 등이
구속된 것이다. 박학전은 심한 고문으로 정신 이상 상태가 되기도 했으나 석방 이후
세브란스 병원, 평양기독병원 등에서 치료하여 해방이후에는 활발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1950년에 서울시 사회국장과, 1951년에서 51년까지 인천시장을
역임한 바 있다. 바로 이 농우회사건 이전에 정일영목사와 권중하 전도사가
의성경찰서에 구속되었었는데 가혹한 고문 때문에 권중하가 고문사할 정도로 당시
경찰 고문은 잔인하였다.

   순교를 권유한 아내 오정모의 신앙절개

 주기철목사가 의성결찰서에서 지낸 기간은 약 7개월로서 1939년 2월에
석방되었다. 주기철, 이유택, 송영길이 의성에서 대구경찰서로 이감되었으나
이유택과 송여길은 먼저 풀려나고, 주기철만이 재감상태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이들을 회유한 것인데, 앞의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묵약이 있었던 것 같고 주기철이
계속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대구의 김정오장로가 대구경찰서 고등계에 가서 주목사를 설득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를 부탁하였다. 경찰에선 3이간의 여유를 주면서 가석방 형태로
주목사를 풀어주었다. 이때 주기철이 이유택과 송영길목사를 질책하였다는 말도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주기철이 신사참배에 가담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김정오장로의 인정어린 충고도 보람 없이 주기철은 사흘 후의 재수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얻은 김정오는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전보를 쳤다. 사실을 알려 사태해결을
의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오정모사모만이 대구에 내려왔다. 다른 이들이
동행하지 않았고, 유계준장로는 그 다음날에야 내려왔다. 일정이 묘하게 엉켜
있었다. 이 엉킨 일정의 의문은 안용준이 해명해 준다.

 (전보 친 다음날) 오집사만 혼자 내려 오시었다. 오시자마자 어찌된 형편인지 물어
듣고는 김장로님과 다른 여러분에게 부탁하기를, 행여나 주목사님에게 잘못
권면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달라고 하시고, 한편 3일 후에 다시 들어가시도록
준비를 하여 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본 다른 친구들은 놀라고,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척들은 원망가지 하였다.
 오집사님이 오신 다음날에야 평양에서 유계준장로님이 오셨다. 왜 그리 되었는고
하니, 먼저 전보를 받은 오집사님은 전보를 받자마자 주목사님이 신앙의 실패나
하시고 석방되셨는가 하는 염려도 있었고, 또 교회 장로님 중에 누가 내려가서 잘못
권면할까 보아서, 교인들에게 알리기 전에 자기 혼자 먼저 내려오셨고, 그 뒤에
교회에 알리도록 해놓아서 유장로님이 늦게 내려왔던 것이다.

 유예기간이 사흘이 지났을 때, 김정오는 유계준과 주기철 및 그 부인 오정모와
함께 대구경찰서에 갔다. 재수감의 길이었다. 한데 그 주임이 경주에 출장중이었고,
그 아래 책임자가 "평양으로 가도 좋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주기철이 한때나마 그
형고에서 풀려 평양에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석방과 관련해서 부인 오정모의 형태에 비상한 국면이 있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오의 집에서 남편 주기철의 수척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부인은 오랜만에 만난 남편의 고생에 눈물을 보이 않았다. 그 첫말이
무엇이었을까.

 승리요?

 그리고는 "다시 감옥에 들어가시오"했다는 것이다. "어서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시오." 좌중이 다들 아연해 하였고, 그리고 주기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김인서의 말은 하나 남아 있다.

 주님 향한 절의를 위하여는 부부의 정도 잊어버린 것이다.

 오정모, 그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그는 평남 용강 태생이요 병약했던 여인이다.
박분옥은 "오집사의 신앙은 칼날 위에 선 신앙"이라고 회고하였다.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성식은 오정모가 다정다감하였고, 겉으로 보기에 냉정한 사람 같았지만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 부인이 주기철에게 "어머니, 아이들
걱정 말고, (감옥에)들어가서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십시요. 목사는 꼭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섭니다" 했다면, 이들 신앙은 이미 인정의 울타리를 벗어난 엄청난
초연의 신앙이란 생각이 든다. 주기철의 위대한 신앙의 투쟁에 이 한 여인, 아내의
결단과 격려가 차지했던 공간은 아마 그 자신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리라.
남편의 죽음을 바라는 아내가 어디 있으리오. 하지만 오정모는 주기철을 순교로
가게 한 반려자였음에 틀림없다. 스스로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그 여인의 체질과
병약에서 신앙적 결단의 인간 한계성을 극복하는 자기조정이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린 아이 막내 광조에게도 3일간씩 금식기도를 시켰던 이 '어머니'는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었으나, 신앙훈련에는 그토록 엄격하였다. 재혼한 아내로 자식
낳은 일 없이 굳세게 병을 이기면서 살아가야 했던 한 여인에게는 골육의 정에
파묻히는 애환보다는 훨씬 냉정하고 고귀하게 신앙생활을 이끌어갈 수 있는
내재력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 이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사람이야"라고 어릴
때 오창신에게 말했다는 막내 광조의 표현을 보면 오정모는 억센 결단력이
엿보인다.

   다시 산정현교회 강대상에 올라

 김정오와 함께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된 주기철은 평양에 전보를 쳐 되돌아간다고
알렸다. 그때 주기철이 인간적인 환희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다시 되돌아가는
평양이었다. '명조, 평양착'. 이 전보문 끝에 주기철이 '할렐루야'를 덧붙였다. 승리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할렐루야를 외치던 주기철의 눈물이 어린 얼굴 뒤에
우리 한국교회사는 그날의 아픔을 다 보고도 남는다. 누군들 그를 살리고 싶지
않았으랴.
 다음날 주기철, 오정모, 이유택, 송영길 그리고 유계준이 평양역에 닿았다. 여럿이
마중나와 있었다. 반갑게 손잡고 다들 다시는 주기철이 이 가시밭길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럴수록 주기철은 외로웠다. 목사는 외로운 것이다. 언제나 세상과는 먼
거리에 서있기 때문에 그리고 주기철목사의 갈 길은 이들의 간절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것이 혼자 있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같이 있어도 갈
길이 다르게 되어 있으면 끝없이 외로운 것이다.
 돌아온 날이 마침 주일이었다. 주기철은 예배당에 도착하자 곧 강대상 앞으로
나아가 거기 거꾸러져 기도하였다. 흐르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 하는
길입니까. 그는 흐느껴 울었다. 그도 목사면서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그날 입은 모습 그대로 주일 강단에 섰다. 돌아온 목자가 다시 선다 해서
교회 안팎에 교인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웠다. 그리고 거기 평양, 대동, 선교리
세 경찰서의 형사대도 안팎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주기철목사의 모습은 '서리
바람에 견디는 새파란 죽처럼 맵싼 기개'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리시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서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찬송이 끝나고 주목사는 마태복음 5장 11, 12절과 로마서 8장 8절 및 31, 32절을
읽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십자가가 인간을 지고 갑니다. 그래서 산성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산정현교회 교인이요 방계성의 사위였던 오재길이 그 설교를 잊지 않고
기록하였다. 오재길은 지금 경기도에서 무공해 농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바로 저 유명한 "5종목의 나의 기도"요, 그것이 그의 유언
설교라 일컬어지는 기념비적인 설교였다. 한국교회 유수의 설교였다. 그 설교 준비는
의성경찰에서 7개월간 한 것이었다.

   유언설교 "5종목의 나의 기도"

 그의 처음 기도, 그래서 그 설교의 첫 테마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줍소서"였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1939년 이른 봄, 그의 죽음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그
비참함을 눈앞에 보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주님 위해' 백번 죽는 것이 가장
고귀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에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거늘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이외다.

 세상은 험하고 인정은 포악하며, 양심의 자유는 냉소되고 진실을 조소되던 때인데,
나 위해 형극의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이 계시다는 것이 한없이 고마웠고,
그 사랑의 숭고함에 자신의 못다한 일들이 가책과 희한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라도 갚을 수 없는 지극하신 은총은 부활신앙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죽음은 그때가 중요한데, 죽어야 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였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릅니다.

 순교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맞서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두번째 기도는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기도였다. 그는 전에
김인서를 만나 시세를 논의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인서는 연통제 연루로 4년간
옥고를 회고하면서, 그 긴 옥고 때문에 신사참배 반대에 나서지 못한다는 말을
지고한 일이 있었다. 주기철은 김인서에게서 실망하고, 자신의 길은 결국 자기만이
알아서 가는 길이라 느끼고 돌아온 일이 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베기겠습니까. 다만 주님만
의지할 뿐이외다.

 그는 그때까지 겪었던 통산 11개월의 고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일을
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그날의 신앙이 단순한 순가의 결단으로 결말을
보는 것이 아니고, 몇 년을 두고 신앙의 근원을 파멸시키고 점진적으로 해체시켜,
정과 사의 간격을 긴 거리로 무디게 하는 조직적 파괴를 견디어 내는 인내로 본
것이었다. 신앙의 가장 무서운 시험은 '시간'이다. 역산인 것이다. 그 시험의
역사성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교회역사 안에 있어왔다. 그것이 신비주의요
천연왕국설인 것이다. 현장에서 아니면 어떤 고정된 시간에 일이 다 성취되는
감각으로 신앙을 보는 것이 기독교는 아니다.
 세번째 기도는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한다"는 기도였다. 주기철도 모정에
눈물겨워 하고 고생하는 처자에 대한 사랑에 다 못미쳤다 하여 마음 아파한
인간이었다. 출옥한 목사의 환영예배에 모인 수많은 청중 앞에서, 승리의 개선담을
들으려 모인 겨레 앞에서 한 개인의 노모와 처자를 말해야 했던 그의 충정을
헤아리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아내의 병이 그의 가슴에 아픈 못을 박고 있었다. 그 아내를 버려두고 가는
마음의 비애를 그는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에 대한 사랑에 목메었다.

 나도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에 역적으로 잡혀죽으면 그
자식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비하신 주님께 맡깁니다.

 주기철은 울었다고 한다. 만당의 교인들도 성경책을 적시며 흐느꼈다고 한다.
골육지친의 정을 마다하고 하나님 위해 가는 길이 순교자의 고난일진대 그것을
기도로 극복하겠노라 외치던 목사에게서 일제 말 한국교회 극난의 시련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는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매지 말기를.

 네번째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소서"하는 것이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번 백번
맹세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 피할 수 있으랴...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을 변치 아니하리이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다섯번째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하는 것이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나 사형장에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죄악 세상에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하나님의 의와 그 믿음 안에 사는 자가 살지 못할 세상임을 안 그는 이제 죽음을
안식과 귀향으로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을 잡았으면 그 다음은
세상에 무서울 것 없었다. 용기와 가슴 핀 위대한 행진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설교는 끝났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의 설교는 그 다음 것이 있었을
터인데도 누구도 의식하거나 또 기록에 남겨둔 사람이 없었다. 이 설교로 그의 할
말은 다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설교가 그의 신앙과 순교를 결산하는 피맺힌
선언으로 우뚝 솟았기 때문이다. 일제치하 한국교회 증언으로 이 이상의 것을 다시
기록하거나 찾을 필요가 없다.

   주기철목사의 3차 검속(1939. 9__1940. 4)

 주기철이 농우회사건으로 석방된 이후의 정확한 행적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대게 1939년 9월경 재입감된 사실이 안이숙의 자전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잡힌다.
안이숙은 박관준(1875__1945) 및 그 아들 박영창과 함께 1939년 29일 일본
제국의사당에 들어가 종교법안 토론 회의장에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라 외치며,
신사 불참배의 전단을 뿌렸던 인물이다.
 안이숙이 곧 일경에 체포되어 박천과 순천의 경찰서를 거쳐 평양에 이감된 것이
1939년 10월경이다. 그때 그는 이미 주기철이나 최권능의 입감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안이숙은 주기철을 본 것이다.

 나는 유심히 건너 방을 넘겨다 보았다. 그때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일어나더니
나를 건너다 보고 인사를 했다. 자세히 보니 긴 수염과 긴 머리카락 밑에서도
뚜렷이 잘생기고 보기 좋은 얼굴을 한 것으로 보아 주기철목사가 분명한 듯했다...
마침내 는 자기 오른 손을 번쩍 쳐들어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주기철이오.'

 안이숙이 평야경찰서 유치장에 도착했을 때는 벌서 잡혀온 사람들이 꽉 차이었다.
안이숙, 박관준 사건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한 일단의 일괄 검속이었다. 그때 그
감방에는 안이숙의 기억으로는 2호 감방에 최권능, 3호에 이인재, 4호에 주기철,
5호에 방계성, 6호에 채정민. 안도명, 7호에 오윤선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김선두나 박관준의 불연속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체계적인 반대운동은 주기철을 정점으로 한 산정현교회를 본거지로 진행되고
있었다. 평양지방법원의 예심종결서에 의하면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이 언제나
내세웠던 주장하나가 있어서 그 저항운동의 추진력이었다고 단정한 대목이 여럿
나온다. 가령 1940년 4월 한상동은 채정민에게 이런 말을 한다.

 평양 산정현교회가 신사 불참배로 목사 주기철은 검색당했으나 남은 시도들이
역시 굴복하지 않고 완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므로 최근에는 당국도 이들 불참배
교도들의 완강한 태도에 약간 굴복한 감이 있다.

 철산 용산교회의 박신근 집사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하여 산정현의 운동
중심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1940년 봄에는 산정현교회 앞뜰에서, 방계성과
한상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지방 저항운동과 이기선 중심의 평북지방 저항운동에
대한 보고를 이주원이 하고 향후의 운동방향을 논의한 일이 있었다.

 이 저항운동의 주요 멤버는 이기선, 김인희, 채정민, 방계성, 이주원, 김형락,
박신근, 김화준, 고홍봉, 서정환, 장두희, 양대록, 한상동, 주남선, 조수와, 이현속,
최덕지, 손명복, 안이숙, 이광록, 오윤선 등이었다. 선교사들로서 이들과 제휴했던
이는 해밀톤, 말스베리, 트루딩거, 스터키 등이다.
 이들은 1938년 7월경부터 다음과 같은 입장을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여호와 신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또한 지배통괄하는 최고 유일의 절대의
전지전능의 신이라 하는 반면에 다른 신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 다 위신 내지
우상이라고 판단하여, 천조대신을 위시하여, 역대 천황은 여호와 신의 피조물인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 필경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여, 이를 봉기하는 황대신궁을
비롯하여 일본의 모든 신궁 신사는 모두가 위신 내지 우상을 봉기하는 것으로 이를
제사 예배하는 계명위반행위라고 하여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리스도는 제림하여 일본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가의 국가제도를 파괴하고 이
지상에 그리스도 교리로써 통치제도를 하는 무죄악, 무차별, 무압박의 절대평화의
이상적인 지상신국, 소위 천년왕국을 기망한다.
 자신들의 고백적 선언이 남겨져 있지 않아 재판기록에서 옮긴 것이 이렇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저항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1. 신사참배 등 반계명 정책에 죽음으로써 반항할 것.
 2.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입하지 말고 이를 취소(파괴)하도록 할 것.
 3. 말세 절박한 이때에 신의 예정과 진리를 널리 도전하여 동지를 다수 획득할 것.
 4. 신사참배를 시인하는 노회에는 부담금을 바치지 않게 하고, 그래서 노회를
파괴하도록 할 것
 5.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말 것.
 6. 가정예배 및 가정기도회 개최를 여행하여, 일면 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를 동지로 획득할 것

 여기 이들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의 과격성이 눈에 뛴다. 현존 교회를 종교적
간음으로 고발하면서 그 파괴를 공언하고 새 노회 건설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1940년 4월 20일 출옥한 주기철은 "신노회 건설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며 그 혁명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역사의식과 건전한 신학을
입증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에 휘말릴 때
주기철이 분열의 전거로 조회되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주기철은 그때 이들과는 다른 신앙투쟁의 길을 간다고 느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 간직하고 있었다. 상처 받은 교회가 비록 순결을 잃었다
해도 역사적 전통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서 완전무결의
교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교회는 '항상 개혁'이라는 프로테스란트 원리가 있지
아니한가.
 주기철의 고독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신앙의 투사들이 더러는 평양을 떠나고,
더러는 해외로 이주했다. 권연호목사가 철산교회로 떠날 때 김상권목사가 원산으로,
김명집은 북중으로 떠났다. 그리고 박형룡은 일본에 갔다가 중국으로 떠났다. 주기철
부부는 박형룡박사의 이별에 눈물을 흘렸다. 피난하여 떠나는 이들, 은퇴하면서
동행하자고 한 이들, 역사적 교회를 공격하며 새 이상교회를 건설하자는 이들, 이들
틈에서 주기철은 이들과 같을 수 없어 한없이 외로운 신앙의 길이 걸어야 했다.

   해체 위기 맞은 산정현교회

 일제 사법기관에서 산정현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본거지라고 지목하였다면 그
수난은 피할 길 없었다. 1939년 10울21일 일경은 산정현교회에 계고장을 보내서
교회의 전 제직회원이 매주 한번씩 신사에 참배하고, 설교와 교회 시무는 당해 교회
제직만이 집행하며, 선교사나 외부인의 관여를 금하며, 그 실행여부를 오후3시까지
회보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계고에 불응하면 교회당을 폐쇄한 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는 특파원까지 파견, 그 숨가쁜 진행상황을 매일 보도하였다.
산정현교회는 신사문제를 22일가지 연기, 재삼 경찰의 재고를 요청하였지만,
경찰서에서는 10월23일의 폐쇄단행을 통보해왔다. 하지만 산정현의 신사참배 결의는
경화되어 갔다. "동아일보"의 기사를 본다.

 산정현교회 태도 강령, 참배결의를 또 유예, 제직회원 아닌 목사가 설교한 것이
문제화.

 한데 경찰과 교회의 대립은 실로 1939년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논조나 경향으로 보아 실로 보도될 수 없을 정도의
투쟁상이 거기 나타나 있었다. "동아일보"취재나 보도 태도 역사 산정현교회만큼
대담하였다. 교회와 언론의 민족적 최후 호응이 거기 있었다.

 최후관두에 선 산정현교회, 금일부터 집회금지? 최후의 회답기 되었어도 교회태도
강경.
 경찰부와 학무과서 대질협회.
 산정현교회 삼장로 제직회에서 사임.(1939. 10. 25)

 여기 세 장로의 이름을 가려낼 수 없다. 신사불참배 강경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목사 입감과 세 장로의 사퇴는 산정현의 강경의지를 시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39년 10월25일 수요일 방계성이 설교하러 가는 길에 구속당하고, 이를
안 교인 300여명이 방성통곡하였다고 "동아일보"가 계속 보도한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예배가 주목된다고 비고하였다. 하지만 산정현교회 문제는 10월 30일에도
결말이 나지 않고 있어서 사태는 혼미를 거듭하고 경찰이 밀리는 인상이었다.
"동아일보"도 계속 '금일중 결정?'의 의문부호만 달았다.
 숨막히는 하루 하루의 긴 시간이 여드레를 끌고간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날 11월
3일까지 갔다. 경찰은 목사의 경질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역 시
이 사태를 '폐쇄위기 완화'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11월 5일 주일아침 예배에
오윤선장로가 설교하려다가 교인들에 의해서 붙들려 내리는 사건이 터졌다.
오장로는 신사참배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실업가였다.
 이러면서 넉달을 끌었다. 긴 세월 초조와 긴장이 천년 같았던 기간이다. 그러나
필경 시련이 왔다. 1940년 3월 26일 화요일 경찰은 산정현교회 교도 13명을
검거하면서 '당분간 집회 정지'조치를 내렸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하였다.
일체치하에서 산정현교회는 이렇게 해서 해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주기철목사의 마지막 투옥 (1940.9__1944.4)

 신사참배 반대의 체계적인 확산을 우려한 일경은 1940년 6월
손양원(1902__1950)목사를 검거하였다. 손목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그 자신도
6^3456,12,15^전란 때 인민군에 의해 총살된 일가족 3부자 순교의 목사였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한상동, 주남선 외 수십 명이 교회 재건운동의 음모가 있다 하여
투옥되었다.

 "내 주님, 내 어머님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이경들이 주일날 산정현교회에 물려와, 주기철목사에게 향후
설교를 못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는 설교권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인 만큼
경찰이 간섭할 수 없다 하면서 일본 헌법에 예배자유 조항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상황만을 회피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었다. 그는 국법을 위반했다는 의식을 진심으로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1940년 창씨개명에도 순응하여 신천기철이라 이름을 바꾼
일도 있었다. 그는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전능자 하나님, 그 분을
성서대로 믿는 것, 그 길만을 간 것이다.
 주기철이 이 말을 하고 강단에 섰을 때 그 모습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엄엄숙숙 비장'하였다. 그때 그 곳에 김인서가 앉아 있었다. 김인서는 주기철
주변에서 떠난 일이 없이 그의 설교나 형태를 가능한 한 많이 기록 보존한 위대한
예언자적 역사가였다. 그의 이런 노력이 없었던들 우리는 주기철 역사 구성에
심각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날 설교만은 김인서도 기억
못한다고 했다. 그 날의 긴박감, 공포 분위기가 어떠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일경 역시 이날은 피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 검거 투옥하였다. 주기철은 이
세상에서 산정현, 평양 그리고 이 나라 강산을 마지막 본 것이다. 꼭 갈 길인 줄
알고 있었던 길이지만 견디기가 힘들었다. 떠나야 하는 집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
마지막 날의 모습을 막내 광조가 여덟살이었는데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께서 구속되시기 전날 밤 마지막 가족예배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죽음을 예견하신 듯, 담담하게 시편 23편을 읽고 다시 읽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시편 23편은 유명한 다윗의 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 글이 그의 뼈속에 사무쳐, 고마워 그는 흐느꼈다.
 떠나면서 그는 뒤돌아보았다. 노모가 거기 목메어 서 있었다. "하나님, 내 주심, 내
어머님을 부탁드립니다." 터지는 울음을 참고, 그는 큰절을 하고, 그 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마흔네살 때의 일이다. 그의 이 땅에서의 싸움을 끝나고, 이제부터
3년7개월은 자신의 육체와 인정과의 싸움이고, 그리고 그 싸움에서 그는 승리하였다.
아픔과 서러움, 고독과 좌절을 이기고 주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탄식과
눈물이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한국교회에 의해 거리로 쫓겨난 항일가족

 주기철이 감옥에서 겨울을 지날 때 일경은 그후 목사직 사면을 자퇴 형식으로
강요하였다. 하지만 주기철은 성직은 임의로 버리거나 일시적으로만 갖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한국교회에 주기철목사를 해직토록 강요하려 하였다. 그래서 주기철
소속의 평양노회의 노회장 최지화를 사주해서 주기철목사 파면을 요구한 것이다.
최지화는 감방에 찾아가 이런 사연을 전하였다.
 여기 한국교회의 그날의 모습이 구슬프게 대립하고 있었다. 같은 노회의 목사였다.
그런데 하는 진리를 위해 곤궁을 당하고 있었고, 하나는 그 진리의 파수꾼에게
목사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최지화는 교회가 평온하다고
총회에 보고를 했다. '지난 1년간 평안히 지냈사오며...' 교회 안의 양심도 이만큼
왜곡되고 부패해 있다는 것을 이 글은 입증하였다.
 1941년 3월 23일, 최지화는 평양노회를 '남문밖교회'에서 소집하였다. 그리고
엄청난 결정들을 한다.

 1. 주기철은 그 목사직에서 파면.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현 강단에 서는 것을 금.
 3. 장운경을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
 4. 산정현교회 7장로 정직.
 5. 산정현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박응률, 심익현, 김선한, 이인식 등 7인 임명.

 이 결정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평양노회는 그 다음 주일이 바로 부활주일이었기
때문에 산정현교회를 접수하고 그곳 중심의 신자참배 반대운동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날 아침 장운경이 접수위원 7인과 함께 사복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중 산정현에 이르렀다.
 교회 사수를 다짐한 교인들은 양재연과 오정모 등의 인도에 따라 강단을 에워싸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와 "십자가 군병들아"를 소리높이 불렀다. 마침내 평야경찰서
고등계 주임 시미즈가 이끄는 경관과 사복들은 이 교인들을 묘하게도 '예배 방해'로
다스려 채정민, 오정모, 양재연 등 30여명을 구류 처분하였다. 이사이에 경찰이
산정현교회를 봉쇄하고 그 입구 대문에 나무를 횡십자로 못을 쳐 폐쇄해버렸다.
 노구의 채정민목사가 "산정현 예배당을 폐쇄한 목사들아, 주기철목사를 파면한
평양노회야" 하고 외쳤지만, 그것은 질타가 아니라 통곡이었다. 그는 40여일의
구류생활을 마치고 나오지 교인들에게 그 목사들이 있는 산정현교회에는 나가지
말도록 권면하고, 자기집에서 교인들을 모아 예배를 드렸다. 산정현교회는
평양신학교에서 와서 문을 다시 열고 신학생 수십 명이 예배를 드렸으나 산정현
교인은 나간 사람이 없었다. 본래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가결하던
1938년에 폐교하였고, 이 신학교는 채근필 주도의 전향배들이 다시 개교한
신학교였다. 장운경 일파의 신학생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평양신학교는 평양노회에다 대고
산정현교회 목사관을 교수 사택으로 쓰게 해달라는 청원을 냈다. 1941년 11월의
평양노회가 이 청원을 이의없이 통과시켰다. 왜 하필 주기철이 살던 집, 그 수난의
교역자의 집을 원했을까. 신학교 교수가 그 집에 이런 식으로 들어가 살아야만
했던가. 그 사택에는 노모 조재선과 셋째 아들 영해, 넷째 아들 광조, 이 세 사람이
살았다. 오정모는 불법예배 인도로 때마침 구류중이었다.
 이 노회 결의 집행을 하러 온 사람이 평양노회장 장운경, 평양시찰장, 그리고
산정현교회 자칭 당회장 세 사람이었다. 경찰이 집행을 재촉한 까닭이다.
유계준장로에게 명도 명령이 전달되었다. 유계준은 그때가 추운 겨울이라 부리던
일꾼도 내쫓을 수 없는 절기어늘 하물며 질고를 당하고 있는 목사댁의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거리로 내쫓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저항하였다. 오윤선장로가
이들에게 대들었다.

 목사님들은 월급을 교회에서 받습니까, 경찰서에서 받습니까. 이런 심부름은
경찰서 사환이나 하는 일입니다.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목사의 가족을 내쫓으려
합니까.

 일경 앞에서 서로 싸워야했던 수치와 굴욕의 한국교회였지만 한쪽은 진리와
정의의 편이었다. 주기철을 파면한 교회도 그때에 전도도 하고 총회도 모이고
예배도 보았다. 다들 그 일에 바빴다. 그들에게 주기철이 낯설어지고, 그리고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정통사는 잊혀진 주기철을 거점으로 뻗고 있었다.
 결국 갈 곳 없는 세 사람은 헛간에서 사흘을 보내고 거리고 쫓겨났다. 그들은
머물 곳이 없는 사고무친의 유민이었다. 거리를 헤매다 이들이 겨우 몸을 의탁한
곳이 어떤 형사네 집 건넌방이었다. 일경만큼의 정도 못가졌던 한국교회였다.
주목사가 살던 사택에는 평양신학교 모박사가 들어 살았다. 이 노인과 두 아이의
피눈물 위에서 살아간 신학교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해방이 될 때까지 이들 세 가족은 무려 열세번이나 집을 옮겼다. 주야로 경찰의
감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반길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의
학교교육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영진은 염전, 탄광으로 숨어 다녀야 했고, 영해와
광조는 숭덕학교에 다녔으나 동방요배 거부로 퇴학당해 컬슬러 목사 경영의
성경구락부에 다녀야 했다.
 생활난도 심했다. 유계준, 오윤선, 조만식이 이들 주기철 가족과 백인숙 전도사 및
방계성의 생활비를 줄곧 대주고 있었으나 일경의 간섭이 심했다.
 하지만 주기철 가족의 시련은 가난과 고독만이 아니었다. 자녀들의 장래는
불투명하였고, 아버지 주기철의 생명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 있어서, 한
가족으로서의 중추가 꺾어진 비통이 거기 있었다. 다만 오정모의 강인한 신앙만이
횃불처럼 타올라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유치장 안에서도 믿음의 용사답게

 평양경찰서에 유치되었던 주기철목사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함께 갇혔던 이들이
여럿 있었으나, 주목사의 동정을 살펴 훗날 기록에 남긴 사람은 지금까지는 두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는 안이숙이요, 하나는 안도명이다. 후자는 한때 흥사단
사무총장을 지낸 목사로서 이때 주목사와 함께 감방에 있었다. 안이숙은 두께가 큰
자전 형식의 옥중생활기를 남겼지만 연대와 날짜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아 역사
구성에는 심각한 혼란이 있다.
 안이숙이 주기철의 4찬 검속 때에도 만났다는 사실은 주기철이 안이숙과 손가락
대화를 하는 중, 4차 검거 이전에 안이숙의 동경의사당 투서사건을 들었다는 말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1년을 함께 감방에서 지냈는데 그후 주기철이 순교한 사실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이 마지막 투옥 때도 안이숙이 주기철목사를 본 것이 확실하다.
 안이숙이 처음 주기철을 본 것은 날짜미상이지만 유치장에 기독교인들이 다 함께
고등계로 불려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 본 것이다.

 주기철목사를 가까이 보니 참으로 거룩해 보였다.
 최권능목사를 보니 베드로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방계성장로의 그 충성스러운 모습 이인재전도사와 이광록집사의 어린 양같이
순하고 애처롭게 보이는 모습, 오윤선장로의 늙고 뼈만이 남은, 그러나 순결하고
성인같은 모습.
 나는 이 훌륭하고도 참다운 주의 종들을 보았다.

 이러고 나서 얼마 후에 이 교계인물이 다 평양형무소로 이감된다. 형무소에
도착하고 안이숙은 다시 주기철을 보았다.

 주목사는 조각한 얼굴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 안질로 인해 빨간 누에 나는
쏟아질 듯한 서러움을 꾹 참고 절을 했다. 그도 절을 하고 미소를 뛰었다.

 일생 거반을 고생하던 주기철이 손길 없는 감방 속에서도 그것으로 고생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소와 자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새해(1942년)추운 날 '재판소 행' 과정에서 다시 안이숙이 주목사를 본다.

 그(최권능) 뒤에 나오시는 주기철목사를 보았다. 그야말로 목자를 따라가는 어린
양의 모습 같았다. 얼마나 거룩해 보이고 그 얼마 고상한지, 햇빛을 못본 그의
조각상 같은 미모의 얼굴은 맑고 희며, 발산되는 듯이 느껴지는 그의 순교열은
뜨거운 인상을 내 마음속에 새겨주었다.

 안이숙과는 같은 감방이었어도 거리가 멀어 손가락 회화로 여러 말을 나누었다.
피차 서러움을 위로한 일도 있고, 거문의 질고 대문에 순교의 용기를 잃었을 때
주기철이 한 말도 남아 있다.

 우리는 그저 한 발자욱씩만 걸읍시다. 뛰려고도 말고 날려고도 말고, 그날
닥쳐오는 일을 한 발자욱씩만 다지면서 가면 갈 수 있겠지요. 죽는 것이 목표이면
그 죽음이 언제 오든지 그 나머지 일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니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기철이 고문의 아픔을 얼마나 느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자술 속에 그 일면이
보인다. "인간의 육체라는 것이 그렇게도 아플 수 있는가."
 그의 신앙은 불꽃 같았지만 그 신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신앙이었다. 그는
고문의 쓰라림에 인내하지 못할세라 힘 달라고 기독하고 있었다.
 이미 감옥생활을 오래 한 주기철이었다. 마지막 감옥생활은 계속 4년을 끌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도움과 위로의 말은 없고, 계속 위협과 고통과 병고,
환경의 심각한 비위생이 그를 계속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기간에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생각과 환상을 본다. 그립던 일과 쓰라렸던 일, 모두가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고귀한 가치를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생의
보람은 비할 데 없다고 느꼈다.

   순교의 의미 부각시킨 인간적인 고뇌들

 하지만 주기철의 인간다움에서 다시 한번 그의 순교적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고독과 고문 그리고 감방의 거친 식사에 시달렸다. 그는 한때 안이숙에게
손가락 회화로 "갖가지 음식이 눈에 선하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의 창백하고
안질로 붉어진 눈매에 인간의 약함이 보여다. 그는 쑥갓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

 쑥갓, 파란 쑥갓을 소고기로 어떻게 요리하는지는 몰라도, 쑥갓물에 잰 것을
슬적슬적 집어멱으면서 국물을 훌훌 마시면 그것은 참 진미고.
 나는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한번 먹고 다시 생각이 안나도록 했으면 합니다.

 주기철이 캄캄한 감방에서 이런 말을 손짓으로 하는 것을 그의 노모나 아내가
보았다면 땅을 쳤을 것이다. 그는 바위가 아니었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였다.
 고문과 안질, 약해진 폐와 심장, 골육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무한한 고독과 협박
속에서 그는 수없는 유혹과 시험을 이겨 나가며 하루는, 한 주일을, 일년을 그리고
4년을 살아가야 했다. 그래도 "몸은 늘 단정히 가지고 기도하며 성경 암송에 힘쓰고
평화로운 얼굴을 가지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성자답게 살아갔다.
 안이숙과의 대화도 일년에 끝났다. 그 어간 손가락으로 허공에 쓴 글은 "책으로
써도 한 권이 될 것"이라 하였지만, 그 기록은 안이숙 책에 다만 몇 페이지 남아
있을 따름이다.
 주기철이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 중에 김인서는 해방 이후 목포지 방 공산당
책임자였던 김복동을 들었으나, 함께 감방에 있던 안이숙과 안도명은 그것이
주영하라 증언한다. 안도명은 그때 갓 스무살이었고 기억도 생생하다. 주영하는
주기철의 고귀한 신앙의 자세에 압도당해 "내가 만일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한다. 그랬더니 주기철
역시 "나도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당신을 알았더라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
대응했다 한다. 사상과 신념에 헌신한 두 종교적 확신의 인물들 사이에 통하는 것이
있었다 다만 주영하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놀라운 자세에는 "당할 수가
없다"고 굴복하였다 한다. 안도명이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여 최근
간행한 "신사참배 반대운동 정신사"에 실었다. 주영하는 '콤그룹'의 멤버로 1943년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 주영하는 평양에서 출옥한 안이숙을 찾아와
모스크바대학에서 연구하고 장차 이북에서 같이 활동할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
그때 안이숙과 같은 감방에 있었던 여자 공산당원 박정애도 함께 내방하고 있었다.
 주기철이 감옥에서 밖으로 보낸 편지들이 있을 터인데, 남아서 전수된 것이 별로
없다. 편지를 보내는 일도 어려웠겠거니와 보관이 또한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김태연의 말에 따르면 주기철이 고향에 서보낸 편지 중에 '하바국
서를 많이 보시오'란 글이 있었다고 한다. 침략자 지배하려 드는 야욕을 보시고도
잠잠하신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해 하바국은 묻고 있었다. 그때 하바국이 믿음의 망대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침내 순교의 길로

 주기철의 감옥의 신고에 대해서는 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세한 내용은
다른 서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일제 말기 경찰서와 형무소의 고문이나 환경의
비인도적 방치상태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통산 5년의 감옥에서의 질고,
그것으로 그는 이미 순교의 길을 태반이나 간 것이었다.
 1944년 4월13일 목요일, 그가 마지막 투옥된 지 3년 7개월이 되던 때 그의 몸은
이미 병고와 고문 그리고 거친 식사에 시달려 해체되었고 기어이 병감에 옮겨졌다.
그 오랜 세월, 일 초, 일분, 한 시간을 손으로 헤면서 보낸 날이 세상 밖에서는
침묵과 격리 그리고 부지로 병행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진 줄 안 주기철은
이제 확신과 투쟁보다는 주님 향한 다사로운 사랑 그리워 그 품에 안기고 깊어졌다.
어서 속히 이 눈물과 탄식이 끝나 그 보좌 앞에 서고 싶었다.
 그는 한국인 간수이던 안태석에게 종이와 연필을 사정해서 구해 그의 집에
유언서를 보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태석은 그것을 아우 안기석에게 전해, 그가
다시 평양 고아원의 최운옥에게 부탁해서 오정모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런데
오정모는 이것이 함정이 아니가  해서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 연락을 한 안기석과 최운옥은 이 말에 무척 섭섭했다. 교회가 부역과 순교로
이분되던 날에 진심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던 시대의 한 비극이었다.
 그 유언서는 깨지고 탈진된 손으로 써서 읽기가 어려웠다. 대략 그 내용은
이러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 올랐습니다.
막내 광조에게는 생명보험을 든 2백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하여 드리고...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가고 다시 또 오는 시간

 계속되는 고문으로 시달리기 연이어 5년에 그의 기운과 결단력 및 신앙력은
끈기와 인내로 이겨내야 했다. 내일 다시 이 육체의 감당 못할 아픔을 당하리라는
예견, 그리고 다시 내일이 오고 그러기를 하루가 아니요 한 주일이 아니요 한달이
아니요 1년이 아니라 5년이었다.

 주님, 저 이러다가 순교 못할 것 같습니다. 순교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순교를 방해하는 것은 그리운 가족, 가혹한 고문, 고독 등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긴 긴 시간이었다.
 1944년 4월 어느 날, 주기철 노모의 꿈에 아들이 흰 옷을 입고 나타난 소문이
퍼져 다들 그이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4월20일 목요일, 오정모가 간청해서
겨우 주기철과의 마지막 면회가 허락되었다. 멀리 간수의 부축을 받으며 얼굴이
회색으로 검고 뼈대가 흐트러진 성자 주기철이 다가와 오정모 앞에 섰다. 수천
수만의 감화와 정이 두 사람 사이에 폭포처럼 흘러갔다. 평소에 신앙 때문에 인정을
억누르거나 하지 않았던 주기철이었다. 신앙이 감격과 비탄을 경직하게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그리고 그 모습 뒤에 노모, 자식들을 그리어 보았다.
눈망울에 눈물이 가리었다. 그때 오정모가 또렷이 일렀다.

 여보 승리해야 하오.

 이마 다 간 길, 인정의 약함으로 흩트려 놓을 수 없다 해서 한 말이겠지만 그런
때의 말로는 아내로서 가혹한 말이었다. 신앙의 세계가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주기철이 노모 생각에 더듬거렸다.

 내 대신, 내 불쌍한 어머니를 잘 모셔주십시오.

 예수님도 요한에게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웃에서 신앙은 구현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평양의 4월은 아직 추었다. 추위에
떨던 주기철이 말했다.

 따스한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소.

 거인이 사람 앞에서 보인 순수한 모습, 바로 그 까닭에 주기철은 우리와 멀지
않게 숨결곁에 가까이 있다.

 내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 위해 기도하리이다.

 일제의 오도된 신사와 황실의 이데올로기로 해서 민족수탈과 함께 그 정신적
피탈을 겪고 있는 겨레의 수난 때문에 그는 지금 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양심으로
그는 촛불을 밝히며 타 없어져 가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 겨레가 기댈
커다란 기둥, 의지할 곳이 하나 있는데, 그 분 앞에 서는 날, 먼저 내 겨레, 내
교회가 떠올라올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 주십시오. 내 어머님도 세상
떠나시거든 개 곁에 묻어주십시오.

 하늘 날에 가면 육신의 몸이 남을 곳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세상 떠난 곳,
등대처럼 빛 밝혀가다가 끝난 곳 평양에 눕고 싶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 평양
돌박산, 적 북녘에 있다.
 시간이 되어서 뒤로 돌아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던 주기철이 모퉁이로 사라지고,
그래서 이 세상 시야에서 마지막 그 모습이 가던 때, 오정모는 돌아서 오다가 다시
뒤를 되돌아 보았다. 바람벽과 문들 '없어진' 그이, 그 빈 공간, 빈 자리가
채워지이다. 그는 기도하고 울었다. 감방문을 나서면서 그는 한번 더 되돌아나 볼
것을 하고 가슴 아프게 흐느꼈다. 그이는 저렇게 가는 구나 하는 생각에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믿고 있었다. 저 빈자리, 없는 공간, 그것이 반드시 더
많은 기억과 교훈과 사랑, 그리고 힘으로 채워지리라고.
 남편을 보고 나온 오정모는 곧 유계준을 찾아가 "오늘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면서 그의 임종을 예견하였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해방되기 1년 전 사월 스무하루, 밤 9시.
 그날 그 시간에 주기철목사가 감방에서 조용한 기도소리가 들렸다.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한국교회사의 정상이 높이 솟은 것이다. 이날 한국교회 역사의 숱한
수치와 굴욕과 오욕을 다 감당할 영예와 도덕적 순결, 그리고 신앙의 위대한 동력이
움솟은 것이다. 얼마 지나 행방을 맞았을 때 김인서가 한편의 시를 썼다.

 하나님의 사람은 잘 싸웠도다.
 우리의 순교자는 이기었도다.
 대일본 대국군은 넘어짐이여
 주기철목사는 이기었도다.
 백련정금은 그 믿음이오
 일심백석은 그 절개로다
 매 맞던 그 머리에 의의 면류관이요
 상했던 그 몸에 세마포 옷이로다.
 죽고 또 죽어 열백번 죽어도
 일편담심 예수뿐일세.
 옥중 고통 다 지나간 후
 주님 나라에 오르도다.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살아도 교회, 죽어도 교회
 십자가에 드린 제물이여
 하늘에 오르도다.

   일제의 국체에 강력한 저항--순교

 이렇게 해서 이 나라 교회의 양심과 신앙의 거대한 주추였으되, 그 자신은 인정과
병약으로 살다간 주기철이 순교의 행렬에 선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국체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저항의 정점으로서의 고귀한 생애였다. 그의 나이 3년을 더
살았으면 쉰이 되는 마흔 일곱이었다.
 오정모가 예감이 이상해서 옷을 차입한다고 4월22일 형무소를 찾았을 때,
주기철이 그 전날 밤에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종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지극히 쓸쓸한 죽음이었다. 찾아간 날이 토요일이었고, 형무소에서는 그날 저녁
여섯시에 북문에서 시신을 인도한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하려 유계준에게
달려가면서 오정모는 계속 울면서 스스로 다짐하였다.

 우리 목사님 승리하셨습니다. 우리 목사님 승리하셨습니다.

 유계준의 아들 유기선이 손수레를 가지고 오정모, 박분옥과 함께 그 시간에
형무소 북문에서 유체를 인도 받았다. "거적으로 싼 시신, 과히 무겁지 않고
흐물거리는 느낌"이었다. 상수리 오정모집에 모인 산정현의 옛 제직들이 맞아
청석당 뜰에 유체를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순교 소식을 듣고, 부산 동래 기장에 있던 영진, 범일동에 있던 영해가
평양에 달려왔다.

 주기철목사의 장례는 5일장으로 지냈다. 4월 25일 화요일, 그의 장례는 일경의
경계 아래에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수리의 평양 서광중학교 정문 앞길에서
거행되었다. 유계준이 집례하였다. 상여는 없었고, 긴 막대기에 흰 천을 감아 들것을
만들어 그 위에 흰 천으로 싼 관이 올려져 있었다. 순서지 하나 없어 그날의
장례식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 길 없으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순교가 소리높이 찬양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장례행렬이 모란봉을 거쳐 돌박산에 이르렀을 때 햇빛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조용한 화요일 늦은 오후였다. 세상은 그 비극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영광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 한국교회 생명의 커다란 씨앗이
땅을 솟고 가지앞 억만을 내고 있었다.
 주기철이 순교할 때 손양원은 청주구치소에서 수감중이었다. 그의 부친 손종일이
최봉석과 주기철의 순교를 알리는 글을 타전하였다.

 여숙 최권능씨는 4월 19일에 본고향에 가고 여형 주기는 4월 21일 오후 9시에
본고향에 갔다. 그 모친 향년이 82세요 4자 미성이란다.

 목사직에서 주기철을 해면시켰던 평양노회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는지 소식 없고,
자료인멸로 알 길이 없다.
 오정모는 해방 이후까지 살았다. 그 때 산정현교회는 한상동 목사가 잠시
목회하기 시작하였다. 한데 1945년 9월, 오정모는 유암에 걸린 것을 알았다. 주위의
권고로 평양 기홀병원에서 장기려박사에게 수술을 받아서 한때 병에서 회복된
듯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재발되고, 1947년 1월 27일 월요일 아침 새벽 기도회를
보다가 뒤로 쓰러져 잠시 후 곧 세상을 떠났다. 오창신이 소식을 듣고 뛰어갔을
때는 침대머리를 붙들고 기도하는 자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돌박산 그의 남편 주기철목사 옆에 나란히 묻혔다. 박현숙이 그의
장례식 때 조사를 하였다. 그날 멀리 서기산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이는 가고, 그리고 주기철목사와 함께 이 나라 교회 연대기에 고귀한 신앙의
용사로 그 이름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것이 오정모 그리고 그의 지아비 주기철목사의 마지막 기도였을 것이다.

   제6장 맺음말

 주기철은 1968년 7월 9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 애국투사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무론 빈 무덤이다.
 이 빈 무덤이 여러 가지 뜻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독립투사이던가. 해방이 되자
이북에서 공산당 고위간부가 오정모를 찾았다. 금일봉을 내어 주면서 반일투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 위문하였다. 그때 오정모가 대답이 이것이었다.

 못받겠습니다. 우리 주목사님은 항일투사가 아닙니다. 일본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서 마귀를 배격한 것입니다.

 이 말은 주기철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뜻깊은 선언이었다.
 주기철은 민족운동이나 항일투쟁을 염두에 둔 일이 없었다. 다만 그는 성서대로
믿고 거기 충실하여 한 것뿐이다. 그런데 일제는 '아 일본제국 국체변혁을 필연
초래할' 음모와 저항으로 주기철을 다스려 마침내 순교의 길에까지 끌고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기철은 저항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일제는 국체변혁까지의 저항이라
단죄하였다는 말이다.
 여기 주기철의 한국신앙사에서 지는 독특한 위치가 있다. 신앙의 깊이와 경건의
중심에 이르면, 그 현존 자체가 바로 불의와 부정의 실체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현상학이다. 불의의 상대편,
거기에서는 이쪽의 신앙 현존 그것이 자동 현상화하여 무서운 도전으로 구체화해서
박두해 오는 것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 안에서 타올랐을 때 밖으로
뻗어나간다는 전개 논리이다. 우리의 신앙의 속에서 불타 거룩함과 진실, 충성으로
서기만 하면, 우리의 신앙이 속에서 불타 거룩함과 진실, 충성으로 서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일은 다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상대편에게는 도전과 저항의 어떤
형태로 구상화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의 저항 현상학이고, 그것을 주기철은 우리 근세사에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유산으로 남기고 갔다. 위대한 정신적 가치는 그것을 지키는 자에 의해서
스스로 외연하여 힘으로 나타난다는 고귀한 유산이 그것이다.
 우리는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위대하고 숭고하게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각자 맡겨진 사명수행과 그 보람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가는 것이다. 주기철도 한마디, 그것도 남이 안 듣게
취조관에서 시골 가서 묻혀 살겠노라 했으면 그 가족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보기
흉한 전향배들의 광란도 보지 않고 일경의 간섭도 없이 지내며 살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교의 길에까지 가게 된 그 길이 그에게 주어진 길이라 믿고 형극의
길을 갔던 것이다.
 한국현대사를 빛낸 여러 지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기철은 실로 신념과
신앙의 삶이 가지는 고귀함을 우리역사에 남겨, 위대한 인간승리의 의미를 보여준,
몇 안되는 훌륭한 한국인이었다.

   주기철 연보

 1897. 11. 2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1906. 아명 기복으로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0. 12. 25 웅천 장로교회에서 입교
 1912. 개통학교 고등보통과 졸업
 1919. 3. 3. 정주 오산학교 입학
 1919. 3. 이름을 기철로 개명. 여강이란 호를 사용하기 시작
 1916. 3. 23 오산학교 졸업
 1916. 가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 웅천에서 지냄
 1917.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 집사 피택
 1919. 10. 25 장남 영진 출생
 1921. 12. 13 경남노회에서 신학입학생으로 시취
 1922. 3 차남 영만 출생
 1922. 경남 양산교회 전도사(1925. 9월까지). 조용학 만남
 1925. 1. 9 3남 영목 출생
 1925. 가을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1925. 10. 15 서울에 조선신궁 건조
 1925. 12. 30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
 1926. 1. 10 부산초량교회 담임목사
 1927. 11. 13 4남 영해 출생
 1928. 7. 3남 영목 병사
 1930. 3. 5 장녀 영덕 출생. 초량교회 제직회록 비치하기로 함
 1931. 여름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 주도
 1931 6. 28 초량교회 사임
 1931. 7.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2. 3. 18 4남 광조 출생(3남 병사로 광조가 4남이 됨)
 1932. 9. 17 평양 서기산에서의 전물장병 위령제의 일제, 한국교회학교의 참배
강요
 1932. 9. 예수장로교회 총회, 신사참배 반대 결의. 총독부에 교섭케 함
 1933. 5. 16 부인 안갑수 병서
 1934. 여름 부친 주현성장로 서거
 1934. 9. "죽음의 준비"설교
 1935. 4. 총독부 정무총감 이마이, 학생들의 신사참배 필수 확인
 1935. 5. 금강산 목사수양회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 여름 오정모여사와 속현
 1935. 9.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에서 "일시각오" 설교
 1935. 11. 평양숭실전문학교 맥 교장과 숭의여학교의 스누크 교장대리 신사참배
강요받음
 1936. 조선사상보호관찰령 발효
 1936. 7. 선교사들, 신사참배 강요로 교육인퇴 논의
 1936. 7. 마산 문창교회 사임
 1936. 7.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1936. 8. 미나미 조선총독 부임. 신사참배 강요. 정책 강행 다짐
 1937. 2. 남장로교 선교부 교육인퇴 결의
 1937. 3. 산정현예배당 신축 위한 설교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취한다"
 1937. 3. 평양3승(숭실전문 숭실중 숭의여고) 인도계약
 1937. 9. 5 신축 산정현교회당 입당예배
 1938. 2. 9 평북노회(노회장 김일선) 신사참배 결의. 평양신학교 학생 장흥련 등
김일선 기념식수목. 도끼로 찍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제1차 구속
 1938. 3. 교육의 철저한 황민화정책을 위한 조선교육령개정발효
 1938. 3. 16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교육인퇴 확인
 1938. 5. 주기철 석방
 1938. 5. 친일적인 조선기독교연합회 서울에서 결성
 1938. 6. 8 전북노회 신사참배 결의
 1938. 6. 전남노회 신사참배 가결
 1938. 6. 주기철. 이유택. 김화식. 묘향산 단군굴에서 금식기도
 1938. 6. 30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타 평양에 도착, 산정현교회에서 교계지도자
간친회 갖고 신사참배의 국민의례성 강조
 1938. 7. 평양, 평서, 안주, 황해노회에서 신사참배 가결
 1938. 8. 농우회사건 연루로 제2차 검속
 1938. 9.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해산
 1938. 9. 2 경안노회 신사참배 가결
 1938. 9. 1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938. 10. 북장로교 현지(조선) 선교부, 평양 내외 및 서울의 연회, 세브란스, 정신
폐쇄 결의. 평양장로회 신학교 폐쇄
 1938. 10. 17 시국대처 기독교장로회대회 개최
 1939. 2. 주기철 석방, 대구경찰서에서 평양에 돌아옴
 1939. 2. 돌아오는 날 산정현교회에서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 9. 박관준, 안이숙의 일본의사당 투서사건 및 한상동. 이기선 등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연루 검거. 제3차 구속
 1939. 10. 산정현교회 경찰압력불구 신사참배에 완강히 저항.
 1939. 11. 3 경찰, 산정현교회 주기철 경질 요구
 1940. 3. 25 경찰, 산정현교회 폐쇄
 1940. 6. 한상동 손양원 주남선 등 신사참배 반대로 구속
 1940. 9. 위 사건과 연루시켜 주기철 검거, 제4차 구속. 그의 최후의 구속
 1941. 3. 23 평양노회(노회장 최지화) 주기철의 목사직 해직. 장운경 산정현
당회장으로 부임. 교인들 저항
 1941. 3. 경찰, 산정현교회 및 그 목사 사택 폐쇄. 주목사 가족을 추방
 1944. 4. 12 주기철 형무소의 병감에 이감
 1944. 4. 20 오정모, 마지막 면회
 1944. 4. 21 밤9시 순교
 1944. 4. 25 장례식. 유체 돌박산에 묻힘
 1947. 1. 27 오정모 유암으로 병서
 1968. 7. 9 주기철,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안장됨

출처 : 고동엽(ikorea) 교회개혁 공간
글쓴이 : 바른교회 이야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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